145화
돌이켜 보면 항상 그랬다.
가장 최근에 입수했던 미궁의 ‘찢어진 조각’이나, 그 미궁으로 쉽게 갈 수 있게끔 뿌려졌던 ‘완전한 지도’ 외에 여러 가지 등.
흔히 시스템으로 부르는 녀석은 뭔가 문젯거리를 던져 준 후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힌트를 던져 줬었다.
내 손바닥 위를 차지한 이 종이처럼.
《단서 001》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어떤 의도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종잇조각. 특수한 주문이 걸려 있어 완전히 불태워야만 감춰진 비밀을 엿볼 수 있으며, 소각 이후에는 재확인이 불가능하다.
- 옵션 : 소각 시, ‘낱말’ 공개
그저 내용만 보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영 부실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직감했다.
길 안내를 도와줄 친구가 등장했음을.
화르르륵―!
확신에 찬 심정으로 도깨비불을 움직여 가로 3cm, 세로 2cm쯤 되는 종이를 불태우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이끌려 두둥실 떠오른 재와 불씨가 하늘을 도화지 삼아 검붉은색의 단어를 빚어낸다.
[십]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글자를.
“십.”
“이게… 뭘까요?”
“십? 열? 열 개?”
“제가 보기엔…….”
“저는 경계 나가 보겠습니다.”
허공에 글씨가 나타나자 신기하게 구경하며 저마다의 견해를 기탄없이 내뱉는 한세정들.
마치 방 탈출 게임에 입장하기라도 한 듯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추리는 젬병인지 대충 훑어보더니 후다닥 도망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가자.”
서서히 흩어져 이내 흔적조차 지워져 버린 ‘단서 001’을 뇌에 저장하고서 몸을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끼리 합심해서 답을 구하는 것도 재미야 있을 터이나.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봐야 열두 시간이 지나야 정답을 확인할 수 있는 데다가 애당초 저걸로는 뭔가를 유추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가서 더 얻어야지.
희뿌연 안갯속을 훤히 비춰 줄 등대를.
* * *
“케르르륵!!”
“케에에엑!!”
“케에엑!”
[돌진]
[아쿠스의 연속 찌르기]
후욱―
촤좌좌좌좌좍!!
기습적인 대시에 이은 연격.
대가리에서 심장, 복부, 어깨와 무릎 등 닥치는 대로 부수며 밀고 지나가는 기세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개구리들이 태풍을 만난 잡초처럼 이리저리 내몰리다 바닥을 구른다.
찌르는 궤적을 따라 쏘아진 마력 창으로 인해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휩쓸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갔다 오겠습니다.”
그 덕분에 금세 한산해진 통로를 수월히 통과한 신지운이 중간중간 용케 목숨을 건진 놈들을 베어 넘기며 제단으로 올라가 깃발을 꺾었다.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는 양 미궁을 작살 낸 소년은 공적치 적립이 완료되자 10m가량 되는 높이를 훌쩍 뛰어내려 와 막 지급된 단서를 내게 건넸다.
화르르륵!
[다]
“다, 다…….”
이번에 획득한 단어는 ‘다’.
여전히 무얼 뜻하는지 아리송한 낱말.
허나 굴하지 않고 다음 공략지를 찾아다니며 꾸준히 단서를 모아갔고.
[단서 001 : 십]
[단서 002 :다]
[단서 003 : 가시]
[단서 004 : 활]
그 노력이 빛을 발해 복귀할 즈음엔 네 개의 단서를 입수해 낼 수 있었다.
촉박하지만 않았으면 충분히 구해 갔을 텐데.
아무래도 이동과 전투에서 소진되는 시간이 상당했을뿐더러 거점으로 귀환하는 거리도 계산해야 했기에 원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도 수집의 성과가 전혀 없진 않은 터라.
“한번 해 볼게요!”
“저도요. 저 방 탈출 게임 많이 해 봤거든요.”
이걸로라도 풀어 보겠다며 열의를 불태우는 한세정과 조이령에게 단서들을 넘겨주었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으로 올라가 풀이에 몰두했다.
공책과 연필을 대신해 목판과 단검을 쥐고 집중하는 여인들.
“…곽재우.”
“예.”
“둘은 나오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나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의견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심도 있게 고민하게끔 전선에서 배제시켰다.
한둘이 빠져도 전쟁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거니와 어차피 2번, 3번으로 깃발을 파괴하며 공적치를 쌓아 참전한들 적극적인 활동도 불가했으니.
괜히 불러와 신경만 분산될 바엔 놔두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때가 도래했습니다.]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5km 내’에 존재하는 생존자를 탐색합니다.]
[…완료!]
[검색된 인원 : 열세 명]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500분]
적당히 정비를 끝내고 대기하다 맞이한 두 번째 파도.
“열일곱에 열여덟. 열여덟 마리인가.”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을 세우며 커맨더급 개체를 분류해 낸 나는 곽재우를 주전으로 삼고 신지운에 보조를 맡겨 처리하도록 명령하고, 신지유의 가드를 자처하며 교전에 돌입했다.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
금번 싸움에서 내가 한 일은 수십 겹의 ‘마력 방패’로 적군의 진로를 봉쇄하며.
[웨이브]
[웨이브]
[웨이브]
쏴아아아아아―!!
세찬 물결로 일으키는 정도였다.
“애들아! 공격해!”
신지유가 괴물들을 씹어 먹는 사이에.
[축하합니다!]
[과제의 달성률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기술 : 칼리아스의 마력 방패」가 온전하게 승격됩니다.]
[「기술 : 웨이브」가 온전하게 승격됩니다.]
모자랐던 달성률을 끌어올리고자.
“됐네.”
이로써 주력 기술은 모조리 원본(原本) 등급으로 승격됐다.
남은 건 초장기에 익혔던 ‘끈질긴 추적’이나 습득은 했지만, 사용률이 극이 미미한 ‘무기 활용’과 ‘멀리 보기’.
아마 저것들은 천지 개벽에 준하는 사건이 발발하지 않는 한 영원토록 제자리걸음을 할 거로 보였다. ‘감각 증폭’이라는 상위 호환의 대체재가 있다거나, 혹은 무기를 안 쓰는 타입이니 말이다.
“키에에엑!”
파직!
쿵―
“후……. 다 잡았다.”
상념을 이어 가는 동안 어느새 전장에 마침표를 찍은 신지운이 드라이어드를 비롯한 소환수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내게 다가왔다.
엇비슷하게 승전을 거둔 곽재우와 신지운도 튼실해진 크기의 3등급 근원석들을 회수해 오는 중.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486분 27초]
단 14분 만에.
확실히.
근원석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스탯을 250선에 맞춰 뒀더니 그 전투력이 어마어마했다.
예전엔 커맨더급 개체는 고사하고 나이트와 솔져만으로도 접전을 치렀었는데.
이 정도면 나와 붙어도 될 듯했다.
물론 오리지널 기술은 봉인해 둬야―
‘아니.’
생각해 보니 굳이 양보해 줄 필요는 없겠구나.
신지운에게도.
‘신력 발현’이라는 동등한 기술이 있으니까.
이거 승리는커녕 패배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고려한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당분간은 쭉 쉬게했다.
앞으로 일곱 시간여 뒤에 개시될 ‘축제의 문’ 수색을 최상의 상태로 진행할 수 있도록.
* * *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2시간 47분 14초]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2시간 47분 13초]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2시간 47분 12초]
똑딱똑딱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오후.
수면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는 등 각자만의 공백기를 보내던 차에.
툭툭―
10평 남짓한 방 안 침대에 누워 한숨 자고 있던 나는 나지막한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오빠! 저 세정이인데, 들어가도 될까요?”
날 깨운 이는 한세정이었다.
부스스한 용모를 정리하며 출입을 허락하자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여는 그녀.
옆에는 조이령도 함께다.
같인 온 걸 보아 ‘단서’에 대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며 의자를 가져와 앉자 눈빛을 교환한 두 여인이 탁자에 목판을 내려놓으며 자신들이 종합한 해답을 얘기했다.
‘십’, ‘다’, ‘가시’, ‘활’을 종합하여.
“교회예요.”
“교회?”
“네!”
‘축제의 문’이 생성될 곳은 ‘교회’라고.
그 근거가 뭘까.
“어째서?”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질문에 돌아온 설명은 이러했다.
“먼저 십. 이건 한자로 ‘十’ 이렇게 쓰고, 보통 이 기호는 십자가를 의미하죠.”
“음.”
“그리고 다. 사실 이건 확신이 없지만… 제가 언뜻 봤던 기사 중에 조사 결과 치킨집보다 많은 게 교회라던 뉴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다(多)’는 문자 그대로 많음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시는?”
“가시 면류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가시로 된 면류관을 쓰셨었어요.”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활은 ‘부활’이 될 거구요.”
물음표를 띄운 내게 차분하게 답변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는 꽤나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평으론 전체적으로 믿고 따라가도 좋을 법한 가설이라고 여겨졌다. 애초에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
못 미덥다고 거부하는 게 더 우스웠다.
“교회, 교회라. 이 근처에 교회가 어디 있었더라?”
고로.
나는 두 여인이 내놓은 답안을 전적으로 신뢰해 줄 심산이었다.
* * *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5분 58초]
기나긴 기다림의 끝자락이 보인다.
마침내 5분대로 진입한 타이머.
때가 도래하자 전원을 소집해 무장을 비롯한 각종 포션과 스랄레오 냉동육 등 이사라 해도 좋을 만큼 단단하게 챙긴 나는 원앙 부대와 골렘들에게 거점을 부탁하곤 제일 인접해 있던 ‘휘광 교회’로 향했다.
사실.
이곳은 조철영 무리와의 격돌…이라기보단 일방적 학살이었던 당시의 충격으로 당시에 충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이라, 설령 한세정과 조이령의 주장대로 ‘단서’가 교회를 가리킨다 해도 게 기능을 잃어버린 실정이니 소용이 없을 것 같다만.
밑져야 본전이기에 일단 들러 보기로 결정했다.
걸리면 좋고.
일부러 5분을 일찍 나와 아예 휘광 교회에서부터 ‘이벤트 전용 퀘스트 : 페스티벌’을 개시하는 거라 혹여 틀리더라도 별로 마음에 부담은 없었다.
“주변에 괴물은 없습니다.”
하여.
편안한 심정으로 당도한 휘광 교회 터.
앞서 나갔던 곽재우가 안전성을 검열하고 보고를 마치자 나는 한세정들을 이끌고 안으로 입성했다.
입구를 포함해 약간의 잔재만이 쓸쓸하게 서성거리는 공간.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28초]
“30초. 다들 준비해.”
코앞으로 다가온 초침을 주시하며 퀘스트 시작 공지가 뜨면 곧장 달려 나가리라 작정하고 천천히 호흡을 고르던 찰나.
“그래도 저건 멀쩡하네.”
어딘가를 가리키려 중얼거리는 신지운.
녀석이 손가락이 지목한 방향에는 소복히 쌓인 눈 위로 빼꼼 튀어나온 커다란 십자가가 있었다.
흉물스러운 조형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축제의 문’ 생성까지 남은 시간 : 0초]
[〈이벤트 전용 퀘스트 : 페스티벌〉이 시작됩니다.]
[각지에 「축제의 문」이 생성됩니다.]
우우우우우웅―!!
쿠우우웅!!
“……?!”
찬란한 광휘(光輝)를 머금은 ‘석문’과 한데 어우러진 십자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