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가자.”
느닷없이 당면한 막막함에 일순간 당황하던 나는 암순응이 끝나 가는지 점차 뚜렷해지는 사물들을 바라보다, 머리를 휘휘 저으며 ‘케륵’거리는 하울링을 쫓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깃발 뺏기’를 위하여 탐사를 계획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설이 맞고 틀렸는지를 알아보려 했을 뿐 설마 이런 상황에 부닥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으나.
어쩌랴.
갑작스레 당면한 현실에 막막함을 토로해도 바뀌는 건 없는 바. 쓸데없이 떠들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한세정들이 날 찾아오도록 기다리는 것보다는 내가 한세정들을 찾아 나서는 게 훨씬 현명한 처사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누구인가.
각자 최상의 무장과 최고의 능력치는 물론 실전성까지 두루 갖춘 소수 정예의 표본이었다.
이 미궁에 어떤 맹수가 도사리고 있든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걱정과 우려 따위는 집어치우고, 일행에 대한 신뢰로 멘탈을 다잡으며 앞으로, 또 앞으로 어둠을 가르고 전진해 나갔다.
저벅―
저벅―
“케륵!”
“케르륵!”
얼마나 걸었을까.
벽을 타고 전해지던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싶더니 어느 시점에 통로가 조금씩 넓어지며 개구리들이 그득한 공동이 나타났다.
1m 50cm에서 2m쯤 크기를 자랑하는 스무 마리가량의 괴물들은 단순한 짐승이라기보단 ‘침략군’ 의 일종인 듯 개구리 주제에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물갈퀴가 달린 손에는 무기도 꼬나쥐었다.
이런 미궁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거무튀튀한 도(刀)가 놈들이 주 무기였는데.
뚝―
뚝―
‘물? 아니면… 독?’
아래로 축 늘어뜨린 칼날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 땅바닥을 적시는 중이었다.
기분이 꺼림칙한 걸로 보아 평범하진 않아 보인다.
다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텁―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자.
손가락에 일반 회복 포션을 필두로 중급 해독 포션과 상태 이상 유인 빙결과 마비 치료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인스턴스 던전과 마찬가지로 미궁은 아이템이 사용되는 공간.
허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뭐.
탁!
[가속]
[돌진]
콰앙!
애당초 저 액체가 내 몸에 닿을 일은 없을 테지만.
후우우우욱!
[베어 내기]
촤아아악!!
서거걱!
“켁―”
“케엑―”
한달음에 면전에 다다라 내지른 왼손.
대각선을 그린 참격이 전방으로 뻗어 나가며 대여섯 마리를 가르고 지나가자 박살 난 시체와 핏물이 비가 되어 쏟아진다.
나는 후드득 비산하는 잔해를 피하며 이타를 날렸다.
[오르그의 파괴 본눙]
우우웅―!
콰아앙!!
일대를 짓이기는 응축된 마력으로 하여금 잔해고 뭐고 내게 닿지 못하게끔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두 번의 공격으로 전체를 지워 버리고 다시금 길을 나서려던 찰나.
[‘미궁의 병사’를 처치했습니다.]
[‘찢어진 조각 No. 6’을 습득합니다.]
[‘찢어진 조각 No. 9’을 습득합니다.]
[‘찢어진 조각 No. 6’과 ‘찢어진 조각 No. 9’가 합쳐집니다.]
[〈미궁 전용 퀘스트 : 조각 완성〉이 부여됩니다.]
“음?”
눈앞에 몇 줄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미궁 전용 퀘스트?
《미궁 전용 퀘스트 : 조각 완성》
- 이 퀘스트는 오로지 〈미궁〉에서만 진행 가능합니다. 사냥, 수색, 그 외의 특수한 조건을 달성하여 확보한 ‘조각’은 당신의 횃불이 되어 〈미궁〉을 환히 밝히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현재 획득한 조각 : (2/10)
[‘미궁 전용 맵’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무작정 떨군 건 아니었나.’
나는 주르륵 펼쳐지는 화면을 응시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워낙 급작스럽게 일이 벌어진 탓에 솔직한 심정으로 망망대해에 표류된 느낌이었는데, 저 시스템 덕택에 약간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아무리 초행길이라도 안내만 잘 따라가면 목적지든 일행과의 재회든 이뤄질 테니.
“남은 게 여덟 피스.”
나는 먼저 총 열 개로 구성된 조각을 완성하는 것으로 1차 목표를 정했다.
[돌진]
쿠웅!
* * *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미궁은 몬스터와 함정이 도배된 미로를 말한다.
이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철컥―
투두두두두!!
현실도 똑같았다.
[마력 방패]
카가가강!!
내디뎠던 바닥이 푹 하고 꺼지는 촉감이 전해지자마자 좌우에서 발사된 수십 대의 화살.
‘도검불침’을 비롯한 몇 겹의 방패가 있어 설령 적중당한다 해도 딱히 상처를 입진 않을 듯하나, 굳이 맞아 줄 필요도 없기에 날아오는 강전(強箭)을 막아 내며 더 달리길 10여 초.
이번엔 등장한 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었다.
“음.”
잠깐 멈춰 서서 고심하다 오른쪽을 골라 들어갔다.
6번과 9번 조각으로 맵이 활성화된 상태였으나, 둘 다 이 부근과 관련 없는 아이템인 터라 오직 내 감에 의지했다.
“케륵!”
“케르르륵!!”
어디로 가든.
괴물들이 최대한 많은 전장으로.
그래야.
[스트랭스]
[강격]
[마력 변형술 : 거인의 주먹]
후우우우웅―!
쾅!
콰과과과광!!
[‘찢어진 조각 No. 3’을 획득했습니다.]
“3번.”
조각 모으기가 편했다.
삑―
세 장의 조각이 하나로 결합되는 이팩트를 구경하다 재차 길을 나서려는데, 자그마한 알림음이 날 붙잡는다.
소음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니.
허공에 개설된 ‘미궁 전용 맵’ 한쪽에 뭔가가 생성돼 있다.
황금빛 테두리가 인상적인.
“…상자?”
누가 봐도 ‘보물 상자’를 표현하는 그림이었다.
미궁.
정말 별것이 다 존재하는 스테이지였다.
“…가 봐야 하나.”
나는 트래져 박스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궁 전용 퀘스트’ 설명에서 말했다.
‘사냥, 수색, 그 외의 특수한 조건을 달성하여 조각을 확보할 수 있다’라고.
저 보물 상자가 위에서 얘기하는 ‘수색’ 혹은 ‘특수한 조건’ 중 하나를 뜻하는 것일지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두 시, 열한 시, 세 시.’
꼬불꼬불하게 나 있는 길.
지속적으로 발동하는 함정을 피하거나 파훼하며 진격하길 3분여.
마침내 어지럽게 꼬여 있던 길목이 차차 직선화됐고, 2분 정도를 더 가자 곧 거대한 동공이 나를 반겼다.
“케르륵!”
스르르릉―
서슬 퍼런 대도(大刀)를 어깨에 걸친 3m짜리 거와(巨蛙)와 함께.
체구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의 개구리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녀석이었다. 그냥 개구리가 솔져급 이상이라면, 놈은 나이트급 이상이랄까.
그래 봐야.
사냥감임은 매한가지.
[강격]
[오르그의 파괴 본능 : 마력 권갑화]
우우웅!!
요 근처에 있을 보물 상자에 영향이 가지 않게 마력을 한점으로 밀집시켜 내지른 권격.
“케륵! 케르륵!”
촤아아악!!
뒤늦게라도 습격을 파악한 거와가 대도를 휘둘러 공세를 방어해 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쐐에에에엑―
쾅!
콰직!
콰드드득!
충격을 버티지 못한 칼날이 부러지며 단박에 승패가 갈렸다.
[그림자 걸음]
후욱―
후방에 그림자를 세워 두고 은신 타임에 등을 잡아 왼손을 쑤셔 넣는다.
콰직!
“케에에엑!!”
가죽을 찢고 뼈를 부수며 등짝에서 복부로 터널을 뚫어 주자 괴물의 주둥아리에서 고막을 찌르는 비명이 치솟는다.
털썩―
“조각은… 안 주네.”
생명의 불꽃이 꺼지며 허물어진 괴물의 목을 잘라 확인 사살을 마쳤으나 드랍되는 게 없다.
조각 하나쯤은 던져 주지 않으려나 싶었거늘.
아쉬움에 혀를 차며 사체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거닐며 중앙에 놓여 있는 상자에 도달했다.
금색 장식에 불빛이 반짝이는 돌이 잔뜩 박혀 있어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외관.
자물쇠로 막혀 있지 않아 부술 필요 없이 깔끔하게 개봉하자.
달그락―
달그락―
“포션?”
이리저리 흔들리던 병 두 개가 짤랑거리며 날 맞아 줬다.
“포션?”
…은 아닌 것 같았다.
‘병’이라는 소재에 무의식적으로 포션을 떠올렸으나, 꺼내서 보니 기존과 포션과 달리 액체 대신 푸른색 가루로 꽉 차 있었으니까.
이 생소한 물건은 어디에 쓰는 것인가.
《천리향》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향기가 천 리까지 전해질 만큼 좋다 하여 ‘천리향’이라 이름 붙여진 이 특수한 향분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사라지지 않아 대개 누군가를 추적할 때 쓰이며, 낭설에 따르면 최초로 이 향분을 채취했던 자는 강제로 이별해야 했던 연인에게 되돌아가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고도 합니다.
- 옵션 : 사용 시 일시적으로 사본(寫本) 등급의 기술 ‘향기 추적’ 발동
“천리향.”
아이템 정보를 열어 보고 난 후,
나는 이 이것의 용도를 얼추 알게 되었다.
두말할 거 없이.
아군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미궁의 특수성을 해결해 주는 안전 고리였다.
실제로 써 본 적이 전무하니 효과에 관해서는 미지수이나.
효능이 ‘천리향’이라는 명칭의 절반만 발휘해 줘도 각지에 떨어진 일행과 상봉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리라.
스윽―
미래를 기약하며 끈으로 천리향을 매달고 나자 상자 내부에 붙어 있던 종이가 보였다.
[‘찢어진 조각 : 지정권’을 습득합니다.]
[원하는 넘버링을 선택해 주십시오.]
“오.”
운 좋게도 원하는 대로 바꿔 주는 ‘지정형 조각’이었다.
[‘찢어진 조각 No. 2’를 습득합니다.]
“좋아.”
이로써 내가 보유하게 된 조각은 총 네 장.
이제 여섯 장 밖에―
삑!
“……?”
벌써 반절이나 구했다 싶어 기뻐하던 와중.
이 근방이 3번 조각의 필드이니 인접한 2번을 개방하자는 취지로 결정하고서 합성을 기다리던 나는, 맵 일부의 시야가 걷힌 자리에 또 다른 물체가 찍히는 걸 목격했다.
그것은.
보물 상자도 괴물도 아닌.
“사람?!”
인간이었다.
미궁에 인간이라면 뻔하다.
한세정들.
[가속]
쿠웅!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맵을 살피며 다리를 뻗었다.
* * *
한참을 뛰었다.
보물 상자는 3번 끄트머리에, 신원 미상의 인물은 2번 끝자락에서 포착돼 간격이 너무 멀어 시간이 좀 걸렸다.
중간에 개구리들과 내리 세 번을 연속으로 조우해 교전을 벌이느라 지체되기도 했고.
때문에 5분이면 될 걸 10분이나 지연되어 이른 공동.
“하압!!”
“케르륵!”
쾅!
가까이 가자 낯익은 기합이 들렸다. 묵직한 음성이 특색인 곽재우였다.
그는 거와와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실력을 평가하자면 ‘나이트〈거와〈커맨더’ 대충 이런 형국이라 쉬이 승부를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으아!”
우우웅―!
콰앙!
“케에엑!”
그래도 간간이 두들겨 패는 걸 보면 6 대 4에서 7 대 3 정도로 곽재우가 한 수 앞선다.
하여.
턱―
손수 나서서 도와주기보단 가만히 관전에 치중했다.
먹이를 잡아 주지 말고, 먹이 잡는 법을 알려 주라 하지 않던가. 정세가 유리하다면 경험치를 쌓게 해 주는 게 더욱 도움 되는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흐하아아아아!!”
부우우웅―
콰아앙!!
“케르ㄱ…….”
콰직!
곽재우는 훌륭하게 승전을 기록했다.
비록.
“크흡, 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뽕!
꿀꺽―
“…후.”
치료할 방책이야 차고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