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132화 (132/232)

132화

줄 세우기.

“됐네.”

34위부터 2위에 이르기까지 최상위권을 나란히 차지한 한세정들의 성적을 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훨씬 기분 좋았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성과였달까. 이는 한세정들도 마찬가지인 듯 연신 서로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는데, 특히 행복해하는 건 역시나 1일 차 랭킹에서 소외됐던 조이령과 신씨 남매였다.

알게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았다.

나나 한세정, 곽재우가 골렘들을 끌고 다니며 활약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을 거고. 그래서 웬만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가져가기를 바랐는데,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맺었으니 한시름 놨다.

[축하합니다!]

[‘1위 보상 선물 상자’를 습득합니다.]

기뻐하는 일행의 춤사위를 감상하며 안도하길 잠시.

공중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화려하게 치장된 여섯 개의 상자가 손바닥 위로 나타났다.

‘어제는 골렘, 오늘은 뭘 주려나.’

다들 기대감에 찬 눈으로 신지운에게 눈길을 보냈다.

34위.

랭킹이 낮은 사람부터 까 보라는 무언의 제스처. 이에 침을 꿀꺽 삼킨 신지운이 심호흡을 하며 금장식이 되어 있는 끈을 천천히 풀어 헤친다.

스르륵―

부드럽게 개봉되는 상자.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툭―

“…심장?”

시뻘건 색채를 자랑하는 큼지막한 ‘심장’이었다.

“으악!”

골렘, 혹은 그에 준하는 보물을 꿈꾸던 신지운은 제 손에 쥐어진 게 심장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기겁해서 주저앉았다.

반짝이던 눈으로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놀라긴 매한가지.

그 바람에 하늘을 난 아이템이 내 발치까지 굴러와 툭 하고 멈췄고, 나는 신지운을 대신해 설명 창을 열었다.

《상급 영약》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상급 영약」입니다. 우주의 에너지가 뭉치고 뭉쳐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변모한 이 영약을 복용할 시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 마력’ 중 두 가지와 개방되지 않은 특수한 능력치 두 가지를 선택해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 옵션 : 신체 능력치 대폭 향상

“영약.”

우리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울린 이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약’이었다.

영약이란.

무협지를 보다 보면 꼭 한 번은 나오는 신묘한 기운을 품은 약초 등으로, 보통은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물건인데 이 세상에 맞게 설정이 바뀐 듯했다.

이 내용을 쭉 읊어 주자.

“…어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영약이면 약처럼 만들어 주지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든 건데……. 씁!”

마치 애 떨어질 뻔했다는 뉘앙스로 가슴을 쓸어내린 신지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영약을 되받아 갔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으적!

녀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바로 영약을 씹어 삼켰다.

나는 그 행태에 피식하고 웃으며 다음 순번으로 상자를 개봉했다. 신지운에 의해 이번 보상이 영약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1위 보상 선물 상자’를 개봉합니다.]

[축하합니다!]

[‘영약 : 테라’를 습득했습니다.]

《영약 : 테라》

- 등급 : 유일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누구보다 높은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영약 : 테라」입니다.

우주의 에너지와 〈차원 : 테라〉의 기운이 하나로 섞여 탄생한 이 유일무이한 영약을 복용할 시 ‘근력, 체력, 내구, 순발력, 마력’ 다섯 가지와 개방되지 않은 특수한 능력치 다섯 가지를 선택해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 옵션 : 신체 능력치 대폭 향상

* * *

[곧 3일 차 ‘이벤트 : 절망의 파도’가 개최됩니다.]

[남은 시간 : 13초]

서서히 밝아 오는 아침 해.

그 서광(曙光)을 등지고 카운팅되던 숫자가 0을 가리켰을 때.

[때가 도래했습니다.]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3km 내’에 존재하는 생존자를 탐색합니다.]

[…완료!]

[검색된 인원 : 열세 명]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300분]

익숙한 멘트와 함께 3일 차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장비를 점검하거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우리가 쏘아진 신호탄에 맞춰 한데 모이자.

[더불어 시작 전 3일 차에 적용된 「설정」에 대하여 알려 드립니다.]

변경점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그런데.

“…음?”

연속되는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삐딱하게 틀어졌다.

[‘차원 상점’에서 「골렘 제작 도면」 및 관련 재료 판매처가 개설됩니다.]

[해당 아이템들은 ‘이벤트 : 절망의 파도’가 진행되는 동안 특수한 조건 달성으로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미리 예측했던 문단 아래로.

[더하여…….]

[금일부터 ‘이벤트 : 절망의 파도’의 진행 방식에 새로운 갈래가 추가됩니다.]

라는 글이 뒤따라온 탓이었다.

“새로운… 갈래?”

이건 갑자기 또 뭘까.

의아한 마음을 한가득 품고 응시하길 몇 초, 곧 룰에 관한 공지가 시야를 꽉 채웠다.

[새로운 갈래 : 깃발 파괴]

[〈깃발 뺏기〉란, 각지에 소환된 「깃발」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깃발」을 파괴할 시 ‘공적치 : 10,000’이 주어지며, ‘특별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단, 〈깃발 뺏기〉는 오직 파도가 밀려오는 시기에 한하여 도전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쌓은 ‘공적치’가 리셋됩니다.]

다소 급작스럽게 등장한 신식 규칙은 상당히 간단한, 어찌 보면 꽤나 낯익은 형식이기도 했다.

첫 번째 이벤트 ‘기수 사냥’에서 시행했던 그대로였으니.

“오빠, 이거…….”

“맞아. 그거야.”

설마 이걸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세정들도 똑같은 심정인지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우리의 감상평이 어떠하든 이벤트 주최자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신체 능력이 19%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기술 위력이 15%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특성 효력이 10% 상승합니다.]

[위와 같이 변화된 항목을 참고하여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지금부터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합니다.]

얘기는 다 했으니 이제 알아서 잘해 보라는 양 마지막 대사를 전하곤 자취를 감춰 버렸으니까.

“…….”

나는 조용해진 허공을 물끄러미 주시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은 것이다.

공적치 10,000.

결코 적지 않은.

아니.

‘공적치 리셋’이라는 사달이 벌어졌기에 먹을 수만 있다면 랭킹은 따 놓은 당상이요, 운이 따르면 최상위권도 노려 볼 무지막지한 수치다.

그렇기에.

안정적으로 랭킹 특전을 얻으려는 우리로서는 마땅히 길을 떠나야 하지만…….

‘파도 방어 중에만 시도할 수 있다’.

위 조항이 문제였다.

이는 바꿔 말하면 ‘깃발 뺏기’를 노리려 바깥으로 나갔다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에게 묻힐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게 끝인가?

“깃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리는 없겠죠?”

“아마도.”

공적치 10,000짜리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뒀을까. 필시 온갖 장치로 진행을 방해할 게 분명했다.

그런 곳을 뚫겠다고 난리 치다 2차, 3차 파도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엄청 위험하겠네요.”

한세정의 나지막한 읊조림처럼, 위험도는 천정부지로 상승하리라.

그러니.

어디 있는지도 모를 깃발을 찾으러 떠나는 게 옳은 결정인지 확실하게 가릴 필요가 있다…라고 판단하던 참이었는데.

“잠시만.”

문득.

하나의 아이템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완전한 지도》

우리를 제법 곤란하게 만들었던 ‘완전한 지도’였다.

내가 현 상황에서 이걸 떠올린 까닭은, 이 아이템이 가진 기능 ‘탐사력’ 때문이었다.

《주문 : 탐사력》

- ‘지도’ 소유자를 기준으로 인근 5km 내에 「커맨더」의 위치를 찾아낸다.

“…….”

그냥 가정이기는 한데.

혹시.

이러한 옵션을 준 진짜 목적이 ‘깃발 뺏기’를 염두에 둔 초석 마련이 아니었을까?

즉.

‘탐사력’을 통하여 수색에 나서다 보면, 자연스레 커맨더와 커맨더가 지키고 있는 깃발을 발견하는 그런 시나리오 말이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매우 그럴듯한 가정에 결정을 내렸다. 탐색을 나가 보기로.

한번 검증해 볼 작정이었다.

이론이 맞아떨어진다면 깃발과 커맨더급 개체를 동시에 챙겨 가는 공적을 쌓게 될 테니.

콰아아앙!!

우선은.

“키에에에에엑!!”

“아우우우우!!”

저놈들부터 막아야겠지만.

“봉인 해제.”

“봉인 해제.”

“봉인 해체.”

쿠우우웅!!

* * *

3일 차라서 그런가.

우리를 덮친 대략 2천 마리쯤 되는 전체가 다 나이트로 구성돼 있었다. 솔져는 단 한 마리도 없다.

게다가.

무려 3일에 걸친 능력치 증강 때문인지 놈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굉장했다. 초창기 ‘성장의 땅’에서 마주했던 개체와 비교하면 족히 몇 배는 차이가 나리라 싶은 수준.

허나.

전력 보강이라면 우리도 뒤지지 않는다. 조금 전 영약 복용으로 최소 100 이상의 스탯이 더해지며 평범한 레벨을 아득히 초월해 버렸으니까.

“중앙은 재우 씨가 맡고, 지유와 지운이가 보조해. 나는 왼쪽, 이령이 너는 오른쪽으로.”

“알겠어!”

“먼저 가겠습니다.”

“드라이어드, 도깨비불, 눈꽃송이, 실바람, 땅지기.”

“형! 같이 가요!”

2천이 됐든, 3천이 됐든.

적의 규모를 파악한 직후 한세정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주어진 포지션을 맡으며 전장을 휘저었다.

“커맨더급이 껴도 나 없이 막아 내겠는데.”

나는 신지유가 설치한 단상에 서서 뒷짐 지고 전황을 굽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섯에 의해 2천이 깨져 나가는 광경은 즐거움을 넘어 시원함을 선사했다.

앞으로 골렘 제작이 가능케 됐으니.

저기에 병력이 더해진다면 전날의 파란도 기발한 작전 없이 순수한 무력으로 파훼해 내리라 생각할 만큼.

하여.

“무우우어어어어어!!”

쿠우웅!!

저 물소와 코뿔소가 뒤섞인 듯한 커맨더급 괴물을 양보해 주는 게 어떨까 고민했으나, 일단은 직접 발을 내디뎠다.

한세정들도 한세정들이지만.

나도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샌드백을 두들겨 봐야 했다. 아쉽게도 2일 차 세 번째 파도에서는 커맨더급이 나타나질 않아 훈련이 어려웠던지라 지금이라도 시험해 볼 요량이었다.

타아앗!

후우욱!

순전히 신체 능력만으로 사뿐하게 도약해 비상하길 3초.

‘가속’이나 ‘돌진’이라도 쓴 것처럼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땅에 내려앉자, 그제야 내 존재감을 인식한 놈이 발을 구르다 말고 이쪽을 노려본다. 나는 말없이 팔을 벌렸다.

뭐든 해 보라는 도발이었다.

“무우우어어어어어!!”

콰아앙!

쾅!

콰앙!

그 도발이 훌륭히 먹혀들었는지 괴성을 지른 놈이 4m에 달하는 육체를 앞세워 내게 돌진해 온다.

능히 태산을 부술 만한…….

텁―

“무우어?”

“후아!”

후우우우우우욱!!

콰아아아앙!!

가벼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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