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이게 왜 여기에.”
나는 유리관 속 진열된 두 종류의 ‘깃발’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였다.
기억하기로.
‘안전지대 생성권’은 본래 없던 물품이었다. 비치된 모든 물건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주요 품목은 종종 체크해 두는 터라 유무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고로.
이 녀석은 갑자기 출시되었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느닷없이 출고가 되던가……?’
일전에 ‘특수 퀘스트 5회 달성’ 임무를 클리어해 상점이 2레벨로 올라갔던 때를 제외하면 신규 아이템이 출하된 적은 없다.
허면.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뚝 하고 떨어진 걸까.
나는 의아한 마음에 갸웃거리면서도 우선 ‘안전지대 생성권’을 자세하게 살펴봤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 입장에선 당장 매입해야 할 일 순위 아이템이 됐으니 확인은 필수였다.
《무작위형 안전지대 생성권》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원하는 위치에 설치할 시, 「골렘」 1기를 소모해 깃발을 중심으로 최소 직경 50m에서 최대 직경 100m(사용자 지정)에 이르는 안전지대가 생성되며, 이후 무작위로 ‘수식어’와 ‘추가 옵션’이 적용된다.
[구매가 : 2등급 근원석 750개]
《선택형 안전지대 생성권》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원하는 위치에 설치할 시, 「골렘」 1기를 소모해 깃발을 중심으로 최소 직경 50m에서 최대 직경 100m(사용자 지정)에 이르는 안전지대가 생성되며, 이후 설치자의 선택에 따라 ‘수식어’와 ‘추가 옵션’이 결정된다.
[구매가 : 2등급 근원석 800개]
설명 창을 통해 알아본 두 아이템은 무난하다면 무난한 옵션을 갖고 있었다.
“…골렘이 소모된다고?”
‘골렘 1기를 소모해…….’
라는 이 문구를 뺀다면 말이다.
“…….”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설명에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깃발을 쳐다봤다. 어마어마한 비용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여기에 골렘까지 투자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골렘이란 무엇인가.
1일 차 순위 발표식에서 단 100명의 랭커에게만 제공한 특전이었다. 수십, 수백, 수천만의 생존자 가운데 오로지 백 명만이 소유권을 인정받은 보물.
헌데.
그걸 홀랑 가져가겠다고?
게다가.
이런 식이라면 랭킹에 들지 못한 이들은 자금이 있어도 구매를 못 하는 아이러니한 꼴이 돼 버린다. 거금을 들여 사 봐야 설치가 안 되는데, 뭣 하러 돈을 쓴단 말인가.
상품치고 편의성이 너무 결여돼 있다…라고 생각하던 순간.
파직!
“……?!”
뒤쪽에서 불빛이 번뜩였다.
기습적인 광휘에 몸을 돌리니, 진열대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던 상점 구석에서 빛무리가 모여드는 게 보였다.
뭐지?
의아한 눈초리를 한 채로 가까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면에 몇 줄의 문장이 출력된다.
[현재 공사 중인 공간입니다.]
[완공 시점 : 11시간 59분 59초]
[설치 부처 : 골렘 공방]
“아.”
이 세 줄을 보고 난 후에야, 뇌리에 새겨졌던 의문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어쩐지.
왜 이렇게 뜬금없는 요구를 하는 건가 싶었더니만.
“골렘 제작이 가능해지는 건가.”
연결 고리라고 하던가?
아니면 톱니바퀴?
뭐든 간에 여하튼, 이 신설되는 ‘골렘 공방’으로 인해 어째서 1일 차 랭킹 보상으로 골렘을 주었는지에 대한 까닭도 이해가 갔다.
이 세상에 골렘을 뿌리기 위한 빌드 업.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이면에는 그와 같은 속내가 감춰져 있었다.
단지.
여기까지 오게 되니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젠 ‘무슨 연유로 인류에게 골렘을 주려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우주의 법칙’인지 뭔지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기적의 조각’을 모두 모아 누나와 재회하는 것. 이외에 나머지는 해피 엔딩으로 가는 발판이자 계단일 뿐이었다.
* * *
[‘기술서 : 워터’를 탐독합니다.]
[‘기술 : 워터’를 습득합니다.]
[마력과 속성이 2 상승합니다.]
《기술 : 워터》
- 등급 : 사본(寫本)
- 단계 : 1/3
- 설명 : 행성 ‘프리아칸(Preacan)’의 어느 마법사가 제작한 기초 마법. 마력을 발산해 대기의 수분을 끌어와 시전자의 의지대로 사용한다. 마력 소모량에 따라 조종 가능한 물의 양이 늘어나며, 마력의 영향으로 물은 언제나 최상의 청결 상태로 유지된다.
[‘단계 향상의 돌’을 사용합니다.]
[‘기술 : 워터’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단계 향상의 돌’을 사용합니다.]
[‘기술 : 워터’의 단계가 상승합니다.]
“됐네.”
탁―
난데없이 출고된 ‘안전지대 생성권’으로 약간 돌아가긴 했다만, 계획대로 물을 소환해 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실용성만 있으면 되겠다 싶어 처음에 구경했던 ‘워터 볼’이나 ‘워터 실드’ 같은 전투형은 제쳐 놓고 제일 싼 값의 ‘워터’를 익히고 단번에 3레벨까지 올려 뒀다.
1레벨로는 마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500mL 생수병 하나를 채우는 게 고작인지라.
여름 혹은 더운 환경에서 땀을 흘리고 씻어야 할 경우를 고려해 아예 마스터해 버렸다. 덕분에 이제는 여유만 된다면 10L까지도 무리 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그즈음 한세정들도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 왔는데.
[구매 목록]
[한세정 : 치유 / 기초 투척술 / 독살 / 포이즌 미스트 / 인첸트―포이즌]
[조이령 : 치유 / 돌진 / 진격의 함성 / 열세 극복 / 폭발하는 뱀]
[곽재우 : 기초 둔기술 / 기초 방패술 / 내려찍기 / 방패 치기 / 하울링 ]
[신지유 : 눈꽃송이 / 실바람 / 땅지기 / 기초 속성 친화력 / 기초 계약술―소환편]
[신지운 : 치유 / 돌진 / 인첸트―샤프니스 / 오토 실드 / 다중 베기]
목록에 나와 있는 대로 각자 다섯 개씩을 선별해 마스터 레벨까지 찍고 왔다. 당연히 ‘한계 돌파 의뢰서’ 또한 전부 적용해 두어 미션만 클리어하면 죄다 원본(原本) 등급으로 진화될 예정이었다.
때문에 재차 2,000여 개의 근원석이 소진됐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외려 내어 준 지원금을 다 쓰고 오지 않아서 나무랐지.
“남은 건 포션으로 사 와.”
“해독이나 상태 이상용 위주로 사 올게요.”
“이것도 가져가.”
“넵!”
하여간.
한세정들이 남겨 온 500여 개에 추가로 1,000개를 지원해 비상 약품으로 쓸 ‘중급 포션 세트’ 두 묶음을 구입해 오게 했다.
개당 700개나 하는 고가였지만, 포션은 넉넉하게 갖고 있을수록 좋은 만큼 과감히 자본을 투여했다.
이리해서.
대충 남은 물량은 2등급 근원석 1,000여 개.
용도를 다한 기존의 장비들을 팔면 2~300개는 나올 테니 대충 1,300개어치다.
여전히 이만큼이나 보전된 데에는.
‘장신구가 빠졌네.’
장신구를 미구매한 게 컸다.
분명 장신구와 관련해서도 말을 해 뒀으나, 아무래도 생소한 쪽으로는 손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그 방면은 나중에 손대기로 하고.
“이쪽은 비축해 두기로 하자.”
나는 커다란 궤짝 서너 개에 남은 근원석을 담아 신지유가 건축한 신축 거점 심처로 옮겼다.
아껴 두면 뭐 된다.
이런 신조이기는 한데, 내일이면 ‘안전지대 생성권’과 ‘골렘 제작’이 시중에 풀릴 거라.
그때 지불할 여윳돈을 저장해 둘 심산이었다.
아직 2일 차 세 번째 파도가 우리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중이니 경비 확보야 금방이지만, 얼마가 들어갈지 모르니 3~4천 개 선에 맞춰 둬야지.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자.
화르륵―!
화륵!
금새 거점 앞쪽 공터에 불이 피워졌다.
본격적인 휴식 겸.
“고기 구울게요!”
치이이이이익―!
늦은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농장이 짓밟히고 거점이 송두리째 날아가 풍미와 영양분을 더해 줄 채소는 없지만, 다행히 고기는 눈이 있는 외부에 냉동해 뒀기에 배를 곯는 등의 2차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다.
“아까는 진짜 눈앞이 캄캄했던 거 있죠?”
“너도 그랬어? 나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어.”
나무 꼬챙이에 끼워 구운 스랄레오 육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익자 우리는 각기 하나씩을 쥐고 한 입, 두 입 뜯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토크 주제는 단연 조금 전의 대전쟁이었다.
한세정과 조이령이 물꼬를 트며 이어진 담소는 대체로 막막했던 과정과 기막혔던 아이디어에 당혹스러운 커맨드 출현 등 결말이 좋아 십년감수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만일.
우리에게 ‘점령의 구슬’이 없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한세정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정을 해 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면 누구도 멀쩡하지 못했을 게 뻔했으니까.
우득―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당시만 회상하면 이가 절로 갈린다. 불곰파 이래로 이토록 강한 살의(殺意)를 느껴 본 건 최초였다.
그러하기에.
다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못해도 웃대가리, 이 사안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살려 주지 않을 거다.’
신(新)한국 정부 인사든, 성십자가 클랜의 수뇌부든 가만히 있던 날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오늘.
날 죽이지 못한 게 그들의 가장 큰 실수였음을 면전에 대고 고해 주리라. 그 맹세를 영혼에 새겼다.
* * *
[축하합니다!]
[모든 생존자가 ‘절망의 파도’를 막아 냈습니다.]
[2일 차가 종료되었습니다.]
[각자의 ‘공적치’를 토대로 「순위」를 산정 중입니다.]
[남은 시간 : 59초]
[남은 시간 : 58초]
[남은 시간 : 57초]
어느덧 노을이 저물고 달과 별이 천공을 장식하는 흑야가 되었다.
별 탈 없이 13인 판정을 받고 발발한 세 번째 파도를 압도적인 파워로 막아 내고 대기하길 여덟 시간여.
마침내 2일 차가 종료되고 순위 발표식이 목전에 다다랐다.
다만.
어제와 달리 금일은 아무도 긴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최초 커맨드급 사냥 타이틀’로 다들 공적치를 3,000씩 챙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겨우 3천으로는 무조건 랭킹에 들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해서 세 번째 파도를 공적치가 낮은 순으로 몰아줬다.
그 덕에.
“저요? 제가… 8,221이요!”
제일 적은 신지운도 8천을 넘긴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이 정도면 3~40위권도 너끈히 노려 볼 수 있을 거라 여겨졌다.
1일 차 1위였던 내가 고작 1,726이었지 않던가.
그러니.
[「2일 차 순위」를 발표합니다.]
[100위 : 장한수]
[99위 : 김주용]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34위 : 신지운]
[27위 : 조이령]
[12위 : 곽재우]
[3위 : 신지유]
[2위 : 한세정]
믿음은 배신하지 않았다.
[축하합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의 2일 차 순위 발표식을 종료합니다.]
[각자 등수에 맞는 특별한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이를 발판 삼아 앞으로의 시련 또한 훌륭히 이겨 내시길 기원하며…….]
[끝으로…….]
[다시 한번 순위 발표식에서 「1위」에 오르신 〈생존자 : 아윤〉 님의 업적에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