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참, 오빠 이거요.”
“음? 아. 고맙다.”
“뭘요……. 헤, 얼마나 필요할지 몰라서 일단 다섯 명이 다 모아 왔어요.”
기꺼운 마음으로 ‘펼치기▼’를 눌러 근원석 폭식 타임에 극악의 난이도를 뚫고 습득된 두 개의 기술을 확인한 뒤 한세정들에게 합류하자, 비슷한 타이밍에 복용을 끝내고서 증가한 힘을 음미하던 한세정이 문득 손뼉을 치더니 뭔가를 건네줬다.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나무 잔.
다섯 명의 혈액이었다.
원앙 부대가 근처에 있었기에 대놓고 이식 수술을 하겠다고 말하기가 애매해 ‘할 일이 있다’쯤으로 에둘러 얘기해 놓고 홀로 남은 것인데, 동행한 세월이 있다 보니 무얼 하려는지 짐작하고서 미리 혈액을 모아 둔 것 같았다.
나는 그 준비성에 고마움을 표하며 다섯 잔을 한꺼번에 삼켰다.
준비해 준 사람의 정상을 위해서라도, 내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라도 뺄 이유가 없지.
[「혈액」을 흡수했습니다.]
[‘상태 이상 : 분노 조절 장애’가 사라집니다.]
몇 개의 메시지가 뜨고 지워지길 반복하더니 곧 ‘분노 조절 장애’의 소멸을 알리는 문구가 나타났다.
그걸 지우던 나는.
‘…한번 봐 보기나 할까.’
불현듯 마침 자본도 풍성해졌으니 이참에 상점을 뒤지며 한참 고민했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이나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전사 모드를 연상케 하는 ‘분노 조절 장애’를 일종의 버프처럼.
일순간 감정이 폭발돼 끌어낸 괴물의 힘을 이용해 신체 능력은 신체 능력대로 향상시키면서도 이성을 온전하게 유지하여 폭증한 전투력을 전장에 고스란히 투입할 방책을.
그게 가능하기만 하면 진정 비장의 무기이자 최강의 무기가 탄생할 터이니 한 번쯤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평소에는 100%로 관리하다가도.
‘특수 퀘스트’의 단초를 제공하는 기술 ‘비밀 엿보기’를 활용하면, 2회라는 제한 조건이 존재하긴 해도 원하는 시점에 맥시멈 10%까지 깎을 수 있으니까.
아마.
신지운이 가진 ‘평정의 목걸이’와 대등하거나 상위 버전의 아이템이면 어떻게 비벼 볼 만하지 않으려나 싶기는 한데.
‘정 안 되면 파도 방어 특전 때 빌어야 하나.’
어째, 상점보단 오히려 그쪽이 당첨될 공산이 더욱 커 보인다.
무작위 드랍이기는 하나 분명 ‘필요한 것’을 지급하는 시스템이니, 적어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나는 그러한 상념을 하며 입술에 묻은 핏물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고는 한세정들과 시선을 마주하고 2등급 근원석 상자 무더기를 내밀었다.
정확히 7,154개.
이 무지막지한 자금 중 무려 3분의 1이나 꺼낸 나는 일행에게 두 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무장 교체해.”
일반 등급과 비범 등급이 뒤섞인 장비를 모조리 비범 등급으로 바꿔 오라고.
흑묘살이나 백골갑처럼 기존의 세트를 보강해도 좋고.
혹여 개인의 판단에 의해 대대적인 개편이 요구된다면 몇 푼이 들든 상관없으니 절대 아끼지 말고 구매해 오도록 일렀다. 생사와 직결되는 안건을 처리하는데 비용에 구애받을 리가 있나.
더군다나.
스스로 목숨을 걸고 벌어 온 돈이었다. 비중이야 내가 제일 크다지만, 노력의 가치는 동등할지니.
“마음껏 써.”
선 따위는 두지 않았다.
“와! 바로 갔다 올게요!”
“뭘 사야 하지?”
“감사합니다, 형님.”
“누나는 뭐 살 거야?”
“나? 모르겠네……. 가서 봐야지.”
한세정들은 이런 결정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지체 없이 상점으로 향했다.
다녀왔을 때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만히 사색을 즐겼다.
남은 4천여 개의 2등급 근원석을 어디에 써야 좋을지.
이번과 같이 거점이 파괴될 수 있음을 상정해 둬야 하기에 가급적이면 최대한 털어 낼 심산이라, 그 사용처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던 찰나.
벌컥―
드디어 상점 문이 열리더니 마치 패션쇼를 하듯 한세정들이 차례대로 한 사람씩 걸어 나온다.
“오빠!”
일번은 늘 그렇듯 한세정.
본디 암살자용에 가깝던 야행복 ‘흑야의 이빨’을 착용했던 그녀의 외형은 살짝 바뀌어 있었다. ‘단거리 공간 이동’을 필두로 한 근접 공격 위주에서 독이 더해진 중단거리로 변한 스타일에 맞춘 듯했다.
“여기.”
[구매 목록]
- 한세정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두건》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상의》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하발》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장갑》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신발》
《베놈케벨의 이급 살수용 독살검 묶음》
[세트 효과(6)―독살하는 뱀 : 순발력 +18 / 마력 +14 / 재주(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9 / ‘속성 : 독’과 관련된 공격 시 위력 13% 상승 / ‘속성 : 독’과 관련된 공격 시 마력 소모량 11% 감소 / 상대를 중독시킬 시 1% 확률로 ‘상태 이상 : 산공독’ 발동 / 중독시킨 상대 사망 시 체력 및 마력 1% 회복]
* 산공독 : 체내의 마력을 5분간 사용불능으로 만드는 독
베놈 케벨(Venom Kebel).
이름 모를 차원에서 독으로 유명하다는 살수 집단의 무복을 빼입은 한세정의 선택에 나는 적절한 초이스였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까.
최근 들어 너무 독에만 치중되어 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나, 하루도 빠짐없이 검술 훈련을 실시하고 있거니와 무기 자체가 투척용으로도 쓸 수 있는 복합형이라 내가 터치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잘해 내 가리라 싶었다.
“저는 큰 변경은 없어요.”
턴을 하며 자랑을 마치고서 옆으로 비켜서자 이번으로 등장하는 조이령.
그녀의 차림새는 전과 거의 동일했다.
다른 부분을 꼽으라면.
‘견습 기사’라는 명칭에 걸맞게 살짝 낙후되어 보이던 퀼리티가 깔끔하게 재정비되었다는 점이었다.
[구매 목록]
- 조이령
《칼론드 일반 기사용 강철 투구》
《칼론드 일반 기사용 강철 갑옷―상의》
《칼론드 일반 기사용 강철 갑옷―하의》
《칼론드 일반 기사용 강철 건틀릿》
《칼론드 일반 기사용 강철 군화》
《칼론드 일반 기사용 장창》
[세트 효과(6)―칼론드 정식 기사 : 근력 +21 / 순발력 +17 / 체력 +14 / 내구 +11 / 전투 시 ‘지속형 기술 : 용맹’ 발동 / ‘결과 : 승전’ 시 체력 및 피로 회복 / ‘칼론드 기사단’ 관련 기술 사용 시 위력 9% 상승]
*지속형 기술―용맹 : 각종 정신 공격의 효과를 최대 50%로 절감
이렇게.
반면.
“저는 전부 바꿨습니다.”
삼번인 곽재우는 트레이드마크였던 백골갑을 벗어 던지고 180도 달라진 외견을 선보였다.
[구매 목록]
- 곽재우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투구》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전신 갑주》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완갑》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컴뱃 부츠》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철퇴―분쇄》
《철혈사자단 4번대 대장의 방패―철벽》
[세트 효과(6)―철탑의 방벽 : 내구 +28 / 체력 +17 / 마력 +14 / 기술 ‘철혈의 술’의 방어력 19% 증가 / 기술 ‘철혈의 술’의 마력 소묘량 11% 감소 / 하루에 세 번 ‘철혈의 술’ 전용 혈액 소환]
“아, 이래서였나.”
나는 그가 적어 온 구매 목록을 읽고 나서야 어째서 전면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인지 바로 납득했다
‘칼론드 기사단 기본 창술’을 익히고 무장 역시 칼론드 기사단 전용으로 맞춰 시너지 효과를 본 조이령처럼, 메인 기술인 ‘철혈의 술’과 장비를 결합해 추가적인 이점을 가져가겠단 의도라는 걸.
단지.
조금 놀라운 포인트는.
“···분쇄와 철벽?”
그 과정에서 대검을 쥐었던 곽재우가 칼을 버리고 철퇴와 방패를 택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선물을 해 줬기 때문이었나.
불곰파에 잡혀 있다 구원받은 뒤로 꾸준히 대검을 쓰던 그였다. 헌데 철퇴에 심지어 방패를 같이 드는 쌍수형이라니.
꽤나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자 곽재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부가 설명을 얹었다.
“기왕이면 대검을 계속 쓰고 싶었는데, ‘철탑의 방벽’ 세트 효과를 받으려면 바꾸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였나.
전쟁이 코앞이라 이왕이면 손에 익은 병기를 계속 쓰도록 권장하고 싶지만, 탱커인 곽재우의 방어력이 더 단단해진다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 순번인 신지유, 신지운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저도 싹다 교체했어요.”
“저는 업그레이드요!”
두 남매의 세팅은 낯섦과 낯익음의 조합이었다.
[구매 목록]
- 신지유
《중급 소환사의 고깔모자》
《중급 소환사의 가죽 상의》
《중급 소환사의 가죽 하의》
《중급 소환사의 장갑》
《중급 소환사의 신발》
《중급 소환사의 로브》
[세트 효과(6)―친밀한 소환사 : 소환 +24 / 마력 +16 / 소환된 모든 개체의 능력치 14% 상승 / 소환 시 소모되는 마력 소모량 11% 감소 / 소환된 모든 개체와 친밀감 형성 / 하루 한 번 마법 ‘더블링’ 사용 가능]
*더블링 : 소환수의 숫자를 두 배로 증가시킨다.
- 신지운
《용병 길드 주문 제작―머리 보호대》
《용병 길드 주문 제작―사슬 갑옷 상의》
《용병 길드 주문 제작―사슬 삽옷 하의》
《용병 길드 주문 제작―건틀릿》
《용병 길드 주문 제작―워 부츠》
《용병 길드 주문 제작―특등검》
[세트 효과(6)―숙련된 용병 : 모든 신체 능력치 +17 / 전투 시 지속형 기술 ‘예리한 감각’ 발동 / 전투 시 지속형 기술 ‘칼끝 승부’ 발동 / 전투 종료 시 체력 및 마력, 피로 회복 속도 11% 상승]
*지속형 기술―예리한 감각 : 오감(五感)이 날카로워진다.
*지속형 기술―칼끝 승부 : 자신의 체력이 50% 미만으로 줄어들었을 때 ‘크리티컬 대미지’ 발동 확률이 10% 향상된다.
주 무기인 정령의 힘이 약해 활에 의지해야 했던 과거를 완전히 갈아 엎고 오직 소환수에 집중하는 신지유.
반대로.
초기나 지금이나 전투 방식이 흡사해 난잡한 변동보다는 품질 개선에 주력한 신지운.
“잘 골랐네.”
둘 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잘 골라 왔다.
이렇게 해서 1차 쇼핑이 마무리됐다. 현재까지 한세정들이 소모한 금액은 대략 2,500개 정도.
비범 등급 아이템은 평균 가격이 7~80개에서 100개를 가볍게 웃도는 터라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사라져 버렸다.
물론.
이제 시작이다.
“기술과 장신구, 단계 향상의 돌에 한계 돌파 의뢰서까지. 각자에게 500개씩 할당할 테니 알아서들 쓰고 와.”
능력치, 주력 장비.
넥스트는 뭐니 뭐니 해도 기술, 이게 육성 시스템의 기본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한세정들의 뒤를 쫓아 상점에 입장했다.
나도.
[기술서 : 워터 볼]
“이거면 되려…….”
구입할 게 있었다.
앞으로 끊임없이 시달릴 ‘동화 : 마다의 기사’를 막아 줄 대응책을 구비.
그걸 위하여 들어간 건데.
“음?”
무심코 구경했던 장신구 및 포션을 판매하는 기타류 창구에서 아주 재미난 아이템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무작위형 안전지대 생성권]
[선택형 안전지대 생성권]
파괴된 ‘안전지대’를 되살릴 방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