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상 최강이자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괴물.
‘프레데터’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사냥감의 신체 일부를 빼앗아 와 자신의 능력으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먹잇감의 피와 살을 취해 에너지를 확보하면 그만인 보통의 포식자와는 궤를 달리하는 성장법.
그러나.
이 무지막지한 진화에도 빈틈은 있다.
그 무엇도.
설사 신(神)일지언정 완전무결하지 않다던 누군가의 주장처럼. 내가 느끼기에 ‘프레데터’의 최대 맹점은 단연 ‘인간성’이다.
인간과 괴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하나로 섞이며 발생하게 된 이 영원한 싸움은,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는 즉시 자아와 이성을 상실하는 최악의 매치는 매번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가급적이면 늘상 ‘인간성’ 100%를 유지해 두었고, 만일 ‘포식의 땅’과 ‘성장의 땅’에 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설령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해 여태껏 그 부분으로 말썽이 생긴 적은 없었다.
하여.
앞으로도 이 페이스대로만 간다면 별다른 이변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싶었다.
그랬는데.
“동화.”
《동화》
- 설명 : 상대의 모든 걸 취해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유일무이한 종족(種族) ‘프레데터’.
대상의 육신을 넘어 기억까지, 강해질 수만 있다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며 진화를 거듭하는 그 괴물을 막아설 방법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 여겼으나, 전혀 예견하지 못한 의외의 대목에서 발목을 붙잡혔다.
빼앗은 능력을 더욱 수월히 사용하기 위하여 집어삼킨 기억이 족쇄가 된 것이다. 이른바 ‘기억의 무게’라 칭해지는 ‘동화’의 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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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사》
- 설명 : 드넓은 바다를 유영하며 살아가는 종족 「머메른」.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항상 ‘물’이 함께한다. 물이 곧 부모이자 친구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평생의 동반자였으니까.
그래서 육지에 발을 들인 「머메른」들은 잦은 갈증을 느끼고, 수분 고갈이 심각해지면 피부가 메마른 대지처럼 갈라져 출혈이 생기거나 무기력증에 빠지는 등 갖가지 병마로 위험해진다.
“…….”
쭉 이어지는 ‘동화’의 설명에 나는 ‘인간성’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위중한 제약에 직면했음을 직감했다.
잦은 갈증과 수분 고갈로 인한 증상 발병이라니.
‘잦다’라는 표현이 기간적으로 얼마나 짧은 주기를 얘기하는진 알 수 없으나, 뭐가 됐든 간에 앞으로 물을 달고 살아야 처지에 봉착했다는 것이 묵직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목이 말라 오는 기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더니…….’
문득 유명한 대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딱 들어맞는 문구는 아니었지만, ‘책임’과 ‘제약’이라는 단어만 바꾸면 현재의 내 심정을 대변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문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속이 답답해지기도 했으나.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적인 상념은 털어 내고, 되도록 긍정적인 측면을 보고자 애를 썼다. 심리적으로 진정이 잘되진 않았지만, 이번 ‘기억 포식’은 낙관적인 면모도 분명 많았다.
당장.
‘기술’이든 ‘특성’이든 습득 가능한 항목이 전부 공개된 상태로 고를 수 있게 됐다는 점만 봐도 그러했다.
어차피 하나밖에 익히지 못하는데 무어가 메리트인가 싶지만, ‘무작위’라는 설정으로 상성에 맞지도 않은 걸 억지로 배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써먹지 않는 ‘투르바의 포효’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낫다.
그 덕분에.
어린갑(魚鱗甲), 공식적으로는 ‘머메른의 갑주’라 명명된 기술을 갖게 됐지 않은가.
좋은 점은 또 있다.
바로.
‘수신일체···는 수중에서 10분 이상 있을 시에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특성이고, 집단 지력은 동일한 무기를 착용한 아군의 수가 많을수록 기술 위력이 상승하는 부류군.’
데이터 확보의 기능이다.
커멘드급 이하의 머메른들이 어떤 기술을 쓰고, 해당 기술의 위력은 어느 정도이며, 특성의 효과와 과제는 어떠한지.
커멘드급의 특수성인가.
생전의 능력과 비례하는 건진 몰라도, 세포에 남은 기억의 질이 워낙 선명한 데다 이식된 피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기술이라는 점이 시너지를 발휘해 꼭 ‘기억 포식’이 아니더라도 어린갑에 대한 자료를 획득하는 재미난 광경도 있었지만.
본디 정보 콘텐츠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채택된 기술 혹은 특성 외에 나머지는 죄다 미공개로 삭제 처리되니까.
헌데.
‘수류격, 이게 아까 그 기술이었군.’
이런 식으로 감춰졌던 비밀을 엿보고 나면, 훗날 또 다른 머메른과 싸우거나 머메른의 능력을 습득한 생존자와의 결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지만.
간혹.
사전에 내정된 결정을 바꾸는 계기로 적용할 수도 있겠고.
‘여기까지가 커멘드급을 포식했을 시의 장단점, 오케이.’
나는 거기까지 사색을 마치고는, 잠시 시간을 들여 새롭게 얻은 정보를 한 차례 가다듬은 후 뇌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홀로그램 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알아야 할 건 다 알았으니.
툭―
[‘기억의 갈래 : 기술’을 선택했습니다.]
[해당 갈래와 관련된 ‘기억’의 포식을 시작합니다.]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
* * *
“으음.”
스윽―
긴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되돌아오는 정신.
따스한 기온과 바스락거리는 잡초의 촉감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약간 멍했던 게 가라앉고 나니 자연스레 신(新)기술에 관한 정보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기술 : 머메른의 갑주》
- 등급 : 원본(原本)
- 단계 : 1/5
- 설명 : 행성 ‘구르케스(Gurkes)’의 지배종 「머메른」만이 개화 가능한 기술이다. 주변의 물을 끌어와 몸에 둘러 갑옷처럼 활용하는 형식으로, 자그마한 비늘 수백, 수천 개가 오밀조밀하게 뭉쳐져 평범한 공격으로는 쉽게 뚫지 못하는 방호력을 자랑한다.
투자하는 물의 양과 비례하여 갑옷의 형태 및 방어력과 마력 소모량이 달라진다.
[머메른의 갑주]
우우우웅!
촤르르르륵!!
정확한 마력 소모량 체크를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둘러보니.
주위에 물이 없는 탓에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보다 더욱 많은 마력이 빨려 나간다. 어인 놈이 함부로 쓰지 못한 이유를 똑똑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거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모양새네.”
마구잡이로 쓰다가는 마력 고갈로 허덕일 양날의 검이었다.
그 밖에 생성 속도나.
카아앙!
퍽!
몸소 체감해 본 방어력은 나쁘지 않았다.
이따가 수분을 충전해서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단 종합 평가를 하자면 10점 만점에 8~9점은 충분히 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퇴장.”
[〈인스턴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서 퇴장합니다.]
나는 몇 번 더 검증을 해 보다 갑옷을 해제하고서 인스턴스 던전을 나왔다.
“오빠!”
“오셨습니까, 형님.”
거점으로 복귀하자 통로 근처에서 대기하던 한세정들이 나를 맞았다.
그런데.
다들 하나같이 허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
답은 뻔했다.
‘안전지대’가 박살 난 영향으로 그간 머무르며 정들었던 거점이 처참하게 파괴된 탓이었다.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날뛰었던 공간.
1층이고 2층이고 모조리 짓밟혀 말짱한 게 없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고는 ‘차원 상점’이 유일했다.
정말이지.
저거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어쩌죠? 정리는 대충 해 뒀는데 주변이 이 모양이라…….”
폐허가 돼 버린 거주지를 보고 허탈해하는 한세정의 말에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불현듯 뇌리를 자극하는 번뜩임에 곁에서 쉬던 신지유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어리둥절한 눈빛의 신지유에게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의 실현성을 물어봤다.
딱히 화려하거나 휘황찬란하지 않아도 좋으니.
“집, 건설할 수 있겠어?”
“…네?”
우리가 살 집을 건축해 주겠느냐고.
드라이어드는 초목의 정령이니.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 목조 주택을 지어 보면 어떨까 했다. 인근에 빈집이 한가득인데 굳이 이곳을 고수하려는 까닭은 당연하게도 ‘차원 상점’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상점은 침실만큼이나 중요한 포인트.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윤택한 삶이 보장되기에 이왕이면 떠나기보단 머무르길 원했다.
이에.
“어… 한번 해 볼게요.”
설마 주택 건축이라는 임무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신지유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금세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라이어드와 골렘들을 동원해 작업에 들어갔다.
상점의 중요성은 신지유도 나 못지않게 잘 알았으니까.
해서 틀만 남아 있던 농자재 백화점을 깔끔하게 밀어 버리고, 흉측했던 지반을 다지며 상점을 기준으로 목책을 세워 나가는데.
쿠우웅!
쿵!
쿠구구구구궁―!
시끌벅적한 공사를 지켜보고 있자니 대략 1~20분이면 끝날 거로 보였다.
애초에 단출해도 좋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일.
미흡한 구석은 차차 보강하기로 했으니 오래 걸리는 게 이상했다. 그렇게 정령과 골렘으로 꾸려진 인부들이 지휘 반장 신지유의 지시를 따르며 노동해 주는 동안.
“으아……. 많아도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러게……. 이거 다 하려면 한 시간도 더 걸리겠다.”
우린 모여서 근원석 분류에 돌입했다.
3등급 세 개를 필두로.
2등급 7천여 개와 1등급 2천여 개를 각 등급과 상승용 스탯별로 구별해야 하는 탓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어쩔 수 있나.
강해지려면 필수였다.
다만.
도저히 여섯 명이서 감당할 분량이 아니었던지라.
“네?”
“등급별로 1등급은 왼쪽, 2등급은 오른쪽에 두시고… 기본 스탯 상승용, 아, 기본 스탯은…….”
놀고 있던 원앙 부대를 고용했다.
무제한적인 지원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는 전투 이외에 잡다한 업무도 포함돼 있었다. 물론 양이 양이기에 무보수로 굴려 먹지는 않을 예정이다.
인당 백 개씩 해서 총 1등급 6백 개.
대강 그 정도면 저들에게도 괜찮은 거래가 되리라.
“다, 당장 하죠! 이놈들아! 다 붙어!”
“5백 개! 5백 개다!”
생각대로 원앙 부대는 내 제안이 전해지기 무섭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정부 소속 부대라 일반 생존자에 비해서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1등급 6백 개에 저리 독기가 오른 걸 보면 평소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이회건이나 신(新)한국의 주요 인사들이 아랫사람에게 인색한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라면… 자금 대부분을 본인들이 꿀꺽했을 테니, 신체 능력이든 장비든 주의해 둬야겠어.’
나는 원앙 부대의 열정을 토대로 언젠가 마주하게 될 정부 인사들을 상상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근원석을 쥐었다.
바쁘게 굴러가는 인간 컨베이어벨트.
남들 다 일하고 있는데, 리더가 돼서 농땡이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