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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26화 (126/232)

126화

“으으… 으ㅠㄴ……!!”

“…….”

앙다물어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억눌린 분노.

나는 정도윤의 뭉개진 발음을 들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벌써 십 분을 두들겼으나,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아파할지언정 굴복하지 않았고, 쓰러질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마치 좀비.

이성을 상실한, 그저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좀비와 다름없는… 그래. 성풍 아파트 단지에 처음 들렀을 때 ‘포타스’에게 감염된 괴인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후화학!

후욱!

“으으으으!!”

미간에서 이글거리는 적광(赤光)이 아니었다면 실은 포타스에게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곽재우.”

“예.”

“적당한 곳에 처박아 둬.”

“알겠습니다.”

원만한 대담이 불가한 터라 짐승인 양 으르렁대는 정도윤을 곽재우와 골렘들에게 일임해 두고 신지운에게 최홍진을 데려오게 했다.

귀찮게 못 하도록 원앙 부대원들과 단체로 격리시켜 둔 그는, 정도윤이 두들겨 맞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혹여라도 내가 조절에 실패하면 어떡하나 안절부절못하던 참이었다.

그로 인해.

“부르셨습니까!”

최홍진은 사단장에게 지목된 이등병처럼 각 잡힌 자세로 날 대했다. 여기서 잘해야 정도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거겠지.

안타깝지만 잘못 짚었다.

정도윤의 생사여탈권을 쥔 건 한세정이기에. 내가 입김을 넣으면 한세정도 따라올 테니 엔딩을 바꾸는 것도 되기는 하겠지만, 당연히 개입하지 않을 거다.

본디.

피해 입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행해야 옳은 법일지니. 그러나 진실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굴어 주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있나.

“말해 봐.”

철저하게 이용해 주겠단 심산으로 신지유가 만들어 준 의자에 앉아 물었다.

‘각인’이란 게 무엇이길래 정도윤이 저리된 거냐고.

“저는 후보자도 아니었기에 정확하겐 모릅니다만, 본래는 신(新)한국에 속한 모든 이들이 바라는… 과거로 치면 일종의 장관 임명권입니다.”

“계속.”

“오로지 국왕 이회건의 직접 선발로만 하사되는 영구적인 버프로, 모든 신체 능력이 무려 10%나 상승한다고 합니다.”

“…10%?”

“그렇습니다. 게다가 스탯 증가 외에도 각인이 새겨진 기간에 따라 추가적으로 기술 위력이 향상된다거나 아이템의 효율이 올라가는 등 여러 이점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스탯 상승률도 늘어나고요. 그러다 보니 각인을 받았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발휘하는 힘의 총량이 달라지는 탓에 너도나도 제일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최홍진에데 듣게 된 ‘각인’은 한세정이나 신지운, 또는 나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사기적인 타입이었다.

영구 버프만으로도 놀라운데, 기간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니.

심지어.

“정원이요? 모르겠습니다. 도윤 형님이 지정되실 때만 하더라도 왕국 귀족들과 각 부대의 대장들 등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인원수 제한 폭도 굉장히 넓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최홍진이 열거한 인물만 해도 족히 삽십여 명. 거기에 우릴 노렸던 이들을 포함하면 거의 아흔 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단발성 버프로도 버거울 걸 영구성 버퍼 혼자서 감당한다고?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운 설명에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으나, 최홍진의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

하기야.

제 상급자의 생사가 달려 있는데 장난을 치진 않을 터. 그렇다면 모두 진짜라는 의미인데.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얘기를 다 하고 한껏 긴장한 기색으로 서 있는 최홍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믿어 달라니 믿어 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반적인 레벨을 가뿐히 상회하는 능력이라, 솔직히 말해서 선뜻 신뢰하기가 꺼려졌다.

허나.

우선은 최홍진의 정보를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교차 검증이 불가한지라 신빙성을 논하긴 힘든 자료. 따라서 나중에 수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은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저… 그럼 형님은 어떻게…….”

홀로 상념에 빠져 있자.

바짝 얼어 대기하던 최홍진이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정도윤을 무탈하게 인도해 달라 읍소한다.

이에.

사색에서 깨어난 나는 그를 세워 두고 한세정에게 가서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

바라는 대로 해 주리라고 뒷말을 이으며.

‘급속 회복’과 중급 포션 두 병에 마력 탈진을 감내하면서까지 애를 써 준 곽재우 덕에 상태가 제법 양호해진 그녀는 내 말에 진지하게 고심하다 이렇게 답했다.

정도윤을.

“저는, 살려 두고 싶어요.”

죽이길 원치 않는다고.

한세정이 그리 결정한 연유는 간단했다.

“우리에겐 아직 5일이나 남았잖아요?”

향후에 치러야 할 절망의 파도를 염두에 둔 것.

한순간의 복수심으로 정도윤이 죽게 되면 자연스레 동행의 목적이 소실된 원앙 부대도 떠나가게 되는 바.

즉.

우리의 공적치 경쟁에 크나큰 변수가 생긴다.

방금 전의 전투로 어마어마한 수치를 쌓아 당분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였다.

집단을 이끄는 자들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3등급을 몰아서 사냥한다면 1~2만 단위의 공적치를 확보하는 건 금방이었으니까.

고로.

한세정은 기왕이면 13인 판정을 유지해 작금의 우위를 꾸준하게 가져가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야.

“신한국, 성십자가 클랜. 둘 다 가만히 둘 수 없잖아요.”

진정한 복수극을 이룰 수 있기에 화가 나더라도 견뎌 보려는 것이다. 나는 한세정의 결심에 존중을 표하며 최홍진을 불렀다.

그러고는.

분명하게 알렸다.

“우리끼리 회의해 본 결과, 세정이는 당신네들의 대장을 살리기로 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용서하기로 한 건 전적으로 세정의 권한이었으니 감사를 전하려면 내가 아니라 세정이에게 해. 물론 그 전에 사과를 먼저 해야겠지.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다지만, 당신네들이 치료를 부탁했다가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한세정 씨, 대장을 살려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도윤의 생존은 오로지 한세정의 너그러운 마음씨 덕분이었으니 제대로 잘못을 빌고 사과받도록.

이리해 둬야.

한세정의 가슴에 남았을지 모를 자그마한 분노도 완전하게 털어 낼 수 있다.

막상 덮어 줬더니 애먼 사람에게 고맙다고 주절거리면, 관용을 베풀려다가도 싫어지기 마련이기에.

그 절차를 선행한 다음에 요구 사항을 열거했다.

“무, 무얼…….”

“우리가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다. 절망의 파도 이벤트 기간에 전심전력으로 우리를 도울 것.”

여태껏 해 왔던 것과 달리 이제부터는 무제한적인 지원에 임하라고.

이를 거절한다면.

정도윤의 생환도 무르겠다고.

“알겠습니다.”

최홍진은 이 제안에 의외로 흔쾌히 동의했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일이 꼬였지만, 어쨌든 정도윤이 독에서 해방되었음은 틀림없는 만큼.

첫 만남에서 내뱉었던.

대장을 치료해 준다면 뭐든 하겠다, 라는 약속은 무조건 지키겠다는 게 그의 의지였다.

“좋아.”

이로써 협상은 타결됐고.

동행하는 동안 정도윤은 또다시 날뛰지 못하게 ‘구속구’를 채운 뒤에 깨어날 때마다 수면제를 투여해 재워 놓기로 합의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골렘도 한 기 붙여 둘 작정이었다. 구속구와 수면제에 골렘이라면,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리라.

“곽재우.”

“예, 형님.”

“얘기는 다 됐으니 근원석 수거하고, 편하게 휴식 취해.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알겠습니다. 여긴 제게 맡기시고 다녀오십시오.”

원앙 부대와의 교섭을 마무리 지은 나는 곽재우에게 나머지 정리를 부탁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내가 목적지로 삼은 장소는 호리병 구간의 심처, 커멘더들의 사체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곳이었다.

여길 다시 찾은 까닭은 명백하다.

커멘더라는 무척 훌륭한 먹잇감을.

[프레데터의 중위 진화론]

[‘기술 : 프레데터의 중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진화에 사용될 제물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포식하기 위함이었다.

[흡수 이식]

[「흡수 이식」을 선택하셨습니다. ]

[흡수할 신체 부위를 선택해 주십시오.]

커멘더급 개체를 대면한 순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까는 한세정들을 도와야 해 사냥을 하고도 어쩔 수 없이 미뤄 두었지만, 당면한 문제를 다 해결한 지금, 그 과실을 따 먹을 차례가 되었으니.

“어느 게 좋으려나.”

나는 세 구의 시체를 가지런히 모아 두고 행복한 선택의 시간을 가졌다.

무얼 먹을까.

금번 이식에서 취할 육체는 ‘피부’.

아무래도 어인이나 철갑 사자, 이족 보행형 악어 세 개체 전부 단단한 외피가 특징이라 이쪽을 흡수할 요량이었는데.

다들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고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건 패스.”

일순위로 ‘이족 보행형 악어’를 옆으로 치웠다.

손수 두들겨 패 본 경험상.

이 녀석의 방어력이 제일 약했기 탓이었다. 등은 그나마 좀 나았지만, 배가 훤히 드러나 있는 통에 반쪽짜리 방패라 영 별로였다.

“남은 건 이 둘인데…….”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철갑 사자와 어인.

저 두 녀석의 가죽은 전신 갑주를 연상케 한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철갑 사자의 갑옷은 평상시에도 늘 활성화돼 있는 패시브 형태라는 것이고, 어인의 갑옷은 소모 값을 내줘야만 튀어나오는 액티브 형식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전자는 상관없으나.

후자는 자칫하면 신체가 아닌 기술의 영역이라는 설정으로 갑옷을 획득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여 몇 분이 걸리든 철저하게 고민한 끝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이걸로 하자.”

장장 한 시간여에 걸쳐 이모저모를 따지고서야 고른 나의 첫 번째 커멘더는.

[대상 「머메른 : 3등급」의 ‘가죽’을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신체 최적화’가 자동 진행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우득―

우드드득―

어린갑(魚鱗甲, Scale armour)의 주인이었다.

철갑 사자를 두고 어인으로 방향을 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머메른이라는 종(種)의 갑옷을 가질 수 있다면, ‘스랄레오의 골갑’처럼 평소에는 숨겨 두었다가 적의 방심을 유도한 후에 갑자기 꺼내 드는 식의 활용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미끼 작전으로 가하는 카운터의 위력은 가히 어마어마하니 말이다.

둘째.

어인(魚人)은 곧 물속을 마음대로 활보하는 생명체.

인간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세계를 권역으로 둔 그들의 장점을 가져온다면 이전 날 아라운다과 같이 수중형 괴물들을 상대로 전전긍긍해야 했던 과거를 떨쳐 낼 수 있으리란 대목이 나를 움직였다.

이것으로.

지상과 수중, 두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존재로 거듭나리라. 나는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찾아오는 고통을 향해 반갑게 손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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