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탁―
발걸음이 가볍다.
[모든 ‘상태 이상’ 효과가 제거되고, 소모된 체력과 마력이 전부 회복됩니다.]
최초 커멘더 처치 특전으로 주어지는 이 완전 회복 덕분에 여태 쌓이고 쌓였던 피로를 비롯해 온갖 문제가 모두 사라지자, 하늘을 날아갈 것같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특히 0에 근접해 가던 마력 통이 원상 복구됐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결과로.
더는 마력 잔여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눈치 보지 않아도 되었다.
[가속]
[돌진]
쿵―
콰아앙!
호쾌하게 전진한다.
솟아오른 바위를 발판처럼 밀어내며 점프하길 3초.
‘가속’ 효과가 제 역할을 다하고 떠나갈 즈음 커멘더 C, 이족 보행형 악어의 전면에 도착한 나는 거침없이 왼손으로 놈의 턱을 올려 쳤다.
[마력 유체]
[스트랭스]
[강격]
“하아!”
후우우욱―
쿠웅!
풀렸던 버프를 다시 덧입히며 정확하게 노린 턱주가리.
십이지신(十二支神)과 겨루며 날뛰던 악어는 시야 바깥에서 나타나 치고 들어오는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급소를 내주며, 백 텀블링을 하다 실패한 사람같이 나동그라져 한동안을 끙끙거렸다.
괴물에게도 뇌진탕이란 증상이 존재하는 건지.
하기야.
신체 구조가 100% 똑같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부류라면 인간이든 짐승이든 괴물이든 뇌가 취약점인 건 매한가지일 테니까.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웅―!
쾅!
콰드드득―!
잘됐다 싶어 골렘들을 철갑 사자 쪽으로 보내고는 악어의 목을 갈라 바람구멍을 냈다.
놈의 육체는 어인의 어린갑을 연상케 하는 딱딱한 가죽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반쪽짜리라 뚫어 내는 게 훨씬 쉬웠다.
지구의 악어가 그러하듯이.
단단한 외피 대부분이 등 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은 상대적으로 육질이 연했다.
“케헥― 켁…….”
[베어 내기]
후우우욱!
서걱!!
툭―
최후의 일격으로 절반가량 뜯겨 덜렁거리던 대가리를 단정하게 떼어 내 주자 금세 죽음을 의미하는 공적치 메시지가 출력됐다.
다만.
삑―
[‘공적치’가 100 상승합니다.]
“음.”
최초 타이틀 획득으로 단박에 10,000점이 추가됐던 방금 전과 달리 이번에 주어진 건 기존의 룰대로 고작 100점뿐.
백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격차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허나 어쩌랴.
규칙이 그러한 걸.
“그워어어어!!”
나는 못내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떨쳐 내며 온전한 세트가 된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합공에 되레 일방적으로 짓눌리는 철갑 사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적절하게 좁혀졌을 무렵.
[발록의 투기]
후우욱―
“그어억! 그워억!”
먼저 감정을 격동시켰다.
6 대 1로 치고받고 싸우며 제법 여유롭기까지 했던 전장이 12 대 1로 변해 사생결단의 투쟁이 된 탓에 멘탈이 와장창 어그러졌는지.
놈은 자그마한 흔들기에도 아주 격렬한 리액션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자체적인 디버프 저항 능력도 미흡한 듯 골렘들에게 사정없이 치이면서도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밟히고 있었다. 필시 찰갑이 아니었다면 10초도 되지 않아 끝장이 났으리라 싶을 참혹한 장면이랄까.
물론 말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괴물에게 자비는 사치.
외려.
더욱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제아무리 단단한 피부를 가졌을지언정 내부는 취약하기 마련.
따라서…….
“입을 벌려, 창 박아 넣게.”
“으워어어!!”
“그어어어어!!”
굳이 힘들게 난리 칠 거 없이 주둥아리 안쪽을 공략했다.
“걱! 거억!”
겨우겨우 의식을 되찾은 놈이 거칠게 반항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팔다리가 죄다 붙잡힌 상황.
자그마치 십이지신(十二支神) 전체가 합심한 포박은 대항하고 싶다고 대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우우우우욱―!
새하얀 눈을 닮은 창.
어인이 다루던 신묘하고 기이한 무기가 공간을 가르며 일직선상에 준비된 철갑 사자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따로 창술을 배운 적은 없다만.
애당초 섬세한 기술도, 유려한 기예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깊숙하게 찔러 넣을 근력이면 될 따름이었다.
콰직!
“거억, 걱…….”
살점, 근육, 핏물, 뼈.
걸리는 장애물을 모조리 격파하며 절반이 넘게 파고든 창대.
꾸우우욱―!
그 생생한 감각에 약간의 무게를 실어 주자 마침내 단말마의 숨결을 내뱉은 놈이 육체를 축 늘어뜨렸고.
삑―
[‘공적치’가 100 상승합니다.]
떨어지는 머리와 함께 세 번째 커멘더에게도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 * *
[가속]
[돌진]
[돌진]
쿠웅!
쿵!
전투가 끝난 자리.
호리병 구역의 심처를 벗어나 한세정들에게 합류하기 위하여 입구 지역으로 전력 질주하길 30여 초.
쾅!
화륵!
키에에에엑!!
줄어드는 거리만큼 커지는 격전의 음량.
이에 박차를 가하자.
“이쪽! 이쪽부터!”
“흐아압!!”
분전 중인 한세정들의 뒷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수호 기사와 수호병을 주축으로 오로지 통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하는 곽재우, 그의 양옆에서 혹여라도 삐져나오는 괴물들을 처리하거나 시체를 빼내 ‘철혈의 술’에 재료로 쓰이는 핏물을 수급을 담당하는 조이령과 신지운.
한세정과 신지유는 절벽 위쪽에서 독과 불을 퍼부으며 적의 중단을 끊어 일종의 교통 체증을 일으키는 데 주력히고 중이었다.
하나 의외라면.
“놀지 말고 공격해!!”
“하고 있다고요! 부대장!”
“으아아아아!!”
원앙 부대원들.
신뢰 관계 때문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내버려 두었던 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세정들을 돕고 있다.
도움을 요청한 걸까?
아니면.
핀치에 몰렸다 싶으니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각 집단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싸울 수 있기에 이루어진 협력이리라. 원앙 부대의 임무는 기어오르는 괴물들의 저지.
부족한 무력으로 감당하기에 딱 알맞은 배역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네.’
나는 일행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좌측으로 쭉 뛰어가 벽면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장벽에 다다랐을 때.
“하아!”
탓!
마치 브레이크를 제어하지 못해 담벼락을 들이받기 직전의 차량처럼 힘껏 점프해 벽에 달라붙었다.
후우우우우욱―
쾅!
속도가 속도였던지라 적잖은 충돌음이 발생했으나.
‘도검불침’을 비롯한 ‘내구’ 스탯 등으로 충격을 흡수하며 절벽 중간을 밟고 수십 미터 높이를 등반하기 시작했다.
무협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방식이었지만, 한계를 돌파한 초인의 육체는 무엇이든 가능한 영역으로 바꿔 주었다.
쿠웅―
쿵―
후화하학!!
탁!
대여섯 번의 도약만으로 등정에 성공했으니까.
나는 드넓은 대지 위에 오르자마자 쭉 직진해 나갔다.
“……? 오빠? 아윤 오빠?!”
곡선으로 휘어진 길을 전속력으로 주파하자 후방에서 전해진 폭음에 뒤를 돌아보다 날 발견하고서 소리를 지르는 한세정.
휴식없이 계속된 교전으로 그나마 2할 남짓하던 마력마저 다 끌어 썼는지 눈이 퀭한 그녀.
수고했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네며 주먹을 세웠다.
척!
이제 쉬어도 좋다는 수신호였다.
“……?”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세정.
내가 풀 컨디션이 되었음을 모르기에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신지유에게도 같은 신호를 보내고는 그대로 두 여인을 지나쳐 괴물들이 바글바글한 지상으로 몸을 던졌다.
입으로 떠들 시간이 없으니, 직접 보여 주려는 것이다.
내 상태가 어떠한지.
“오, 오빠!”
“아윤 오빠!!”
“저,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미친!”
여기저기서 질러 대는 걱정과 경악성을 배경으로 줄 없이 뛰어내리는 번지.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곧게 펴져있던 허리를 틀고 왼팔은 쭉 뻗고서 오른손을 어깨 뒤로 당긴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군단을 파괴하는 보능]
저 발 디딜 틈 없는 세상을 통째로 지워 버릴 마법 주문을.
우우우우우우우웅!!
“하아아아!!”
후욱―
콰아앙!
콰과과과과과광!!
* * *
“그어어어어어!!”
후우우웅―
콰직!
골렘의 초대형 거검에 괴물의 몸통이 갈려 나가는 걸 끝으로 고성과 포효가 난무하던 전장이 조용해진다.
[축하합니다!]
[두 번째 파도를 ‘모두’ 막아 냈습니다.]
[다음 파도가 밀려오기 전까지 공백기가 주어집니다.]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461분 19초]
근 40여 분에 달하던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나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돌아봤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여기야말로 지옥의 한 페이지가 아닌가 싶은 끔찍한 수라도가 나를 반긴다. 그 장관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한세정들에게로 향했다.
저마다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며 용맹하고 끈질기게 싸웠던 탓에 녹초가 된 일행.
관문을 수성하려 목숨을 걸었던 곽재우와 조이령, 신지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셋은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한둘쯤 죽었다 한들 이상할 게 없는 악전(惡戰)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잘 버텼다.”
그 진한 감동에 절어 있는 세 사람에게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줬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다들 곳곳이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한 터라 가만 놔두면 곯아 흉질 게 분명하기에 바로 먹고 바르게끔 일러 주고 있자니.
“오빠!”
“지운아!”
막 수호 기사의 손을 타고 내려온 한세정과 신지유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고작 10분여이긴 했어도 푹 쉰 덕택에 안색이 꽤 좋아진 두 여인. 상봉의 기쁨을 나누는 일행들을 잠깐 기다렸다가.
“세정아.”
“네? 어? 이건…….”
“해독 포션이야.”
한세정을 불러 그녀에게 ‘중급 해독 물약’을 넘겨주었다.
가서.
정도윤을 해독시켜 주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그를 치료하면 포션 세트를 다시 마주하긴 어렵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지원을 받지 않았던가.
기브 앤 테이크.
받았으면 줘야 하는 법이었다.
설령.
제 목숨을 부지하고자 발 벗고 나선 것이라 해도.
“지유 누나, 어디 안 다쳤어?”
“원앙 부대원분들이 막아 주셔서 괜찮아.”
저리 말하는데 베풀지 않는 건 불곰파 같은 몰상식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한세정이 내 의견에 끄덕이며 원앙 부대원들에게 걸어간다.
이후.
커멘드 사냥 보상으로 여러 가지 포션을 획득했는데, 그중에 나이트급의 독을 해독할 물약이 포함됐다는 구실을 만들어 안전한 장소에 뉘어 두었던 정도윤을 찾아갔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대장! 대장이!”
그녀의 뒤를 쫓는 원앙 부대원들의 표정은 굉장히 상기됐다.
지난한 싸움에서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기꺼웠는데, 여기에 대장까지 완쾌될 수 있다고 하니.
누군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참 정겨운 결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혀, 형님! 도윤 형님! 왜―”
갑작스러운 괴성과 최홍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콰직!
거기에 연결된 섬뜩한 파육음이.
“…아.”
“세정아!!”
한세정에게서 들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