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제일 먼저 가슴을 채운 기분은 난감함이었다.
혹은.
막막함.
한 마리만으로도 이 전쟁의 흐름이 뒤바뀔 터인데, 한꺼번에 셋이나 난입하니 골이 지끈거렸다.
그다음으로는 관찰.
당장의 심정과는 별개로 어쨌든 부딪쳐야 할 대상이었기에 자동 반사처럼 스캔에 들어갔다.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커멘더들은 각기 인간형 하나와 짐승형 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개중 유난히 내 이목을 끄는 건 최초로 이 공간에 진입해 순서상 ‘커멘더 A’라고 네이밍을 붙인 놈이었다.
웨어 타이거인 티그리스나 하마 인간 포타우스 등.
여태껏 반인반수(半人半獸)를 비롯해 많은 괴물을 만나 보았으나, 툭 불거진 눈에 눌려 있기는 해도 또렷한 콧구멍과 굳게 닫힌 입 아래로 우람하고 탄탄한 근육질의 신체까지.
사타구니 부근이 매끈한 피부로 막혀 있어 성별 분간이 안 되는 걸 빼면 그 어떤 개체보다도 더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손엔 ‘무기’를 쥐고 있었다.
만년 설산의 눈을 베이스로 제작한 듯 전체가 순백색 빛깔로 길이는 3m에 다다르고 굵기도 3~4cm는 되어 보이는 초대형 창을 들었다. 외형만 인간과 비슷할 뿐 아니라 도구를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이는 곧 문명화가 됐다는 의미.
“Я з'ем цяб, солач!!”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하울링 대신 명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만 봐도 일반적인 반인반수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이만하면 엘프나 드워프 같은 ‘유사 인종’으로 봐야 하는 레벨이었다.
해서.
커멘더 A의 종(種)이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했다.
추측 가는 게 있기는 하다.
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물갈퀴?’
개구리나 오리의 다리에서 볼 법한 막이 붙어 있는 게 보였으니까.
이 점을 고려해.
나는 커멘더 A의 실체가 해저 깊숙한 곳에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어인(魚人)’의 한 부류가 아닐까 추정했다.
100%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지언정 생김새가 다분히 그러하기에 능력 또한 물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예상하며 나머지 두 마리도 꼼꼼하게 스캔해 봤다.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긴 했으나.
가죽에 철갑을 두른 사자 형태의 커멘더 B와 악어는 악어인데 등딱지엔 세 장의 작은 날개가 달려 있는 데다가 두 발로 우뚝 선 이족 보행형의 커멘더 C도 결코 평범한 타입은 아니겠거니 하고 약 10여 초 만에 체크를 끝낸 나는 이윽고 지체 없이 명령했다.
즉시.
“퇴각!”
물러나라고.
개미지옥 작전을 구상하며 전투에 돌입했을 땐, 될 수 있다면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상층에서 하부를 공략하는 구조상.
지형적 이점만 잘 사수해도 사상자 발생 여지가 확 줄어들기에. 최대한 고정된 전장에서 싸우길 원했다.
허나.
설계가 틀어질 수도 있음을 상정해야 했던 바. 따라서 위기를 대비해 플랜 B를 계획해 놓았고, 그걸 위해 나는 한세정들과 원앙 부대원들에게 얼른 ‘서쪽’으로 달릴 것을 주문했다.
단지 방향 지시였지만.
“아! 거기로요?! 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일행은, 조이령이 한세정을 업고 곽재우가 신지유를 업으며 골렘들을 이끌고 후다닥 서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당황해하는 원앙 부대는 신지운이 안내를 맡았다.
그동안 홀로 남은 나는 마력을 끌어모아 마침내 ‘통로’를 지나 구덩이로 떨어지는 커멘더들에게 권격을 날렸다.
[스트랭스]
[강격]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우욱!
콰아아아앙!!
연속적으로 근력을 강화해 내려친 주먹이 거센 폭풍을 동반하며 벽을 타고 올라오려던 놈들을 덮친다.
꽤나 파괴적인 일격이었으나 외려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음……!”
육감이 내게 말한 탓이었다.
나이트급도 가볍게 분쇄시키던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아무도 쳐 죽이지 못했다고.
짐작은 했지만, 예견한 것 이상의 방어력이었다.
“гэта балюча дзяр!!”
“그워어억!!”
“키에엑!”
중갑 기마를 떠올리게 하는 커멘더 B나 견고할 게 분명한 커멘더 C는 그렇다 쳐도 사람의 살결처럼 매끈매끈한 형상이던 커멘더 A까지 아무렇지 않다니.
충격에 의해 먼지가 일어난 바람에 어찌 방어해 냈는진 모르겠지만.
심히 어이없는 결과에 인상을 찡그린 난 이내 등을 홱 돌리며 한세정들이 떠나간 인스턴스 던전의 서부로 몸을 날렸다.
마음 같아선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을 포함해 온갖 기술을 죄다 떨궈서 커멘드고 뭐고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었으나, 마력 양이 애매하다.
커멘드들이 낙하하며 빈 ‘통로’로 다시금 나이트들이 우다다 나오고 있는 터라.
기껏 호랑이를 잡아 놓고도 기진맥진해서 늑대에게 뜯어먹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미련을 버릴 줄도 알아야 했다.
[돌진]
탓―
쿠웅!
* * *
개미지옥을 버리고 나아가길 1분여.
쿵―
쿵―
쿵―
저 멀리 골렘들의 뒷모습이 보이더니.
“형!”
이내 꼬리 쪽에서 원앙 부대원들을 다그치던 신지운이 마침 후방을 돌아보다 날 발견하고서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팔을 흔든다.
헤어진 지 3분도 채 안 됐건만.
누가 보면 3일이라도 떨어져 있었던 기색으로 반겨 주는 인사에 피식 웃은 나는 속력을 올리며 그대로 선두에 합류했다.
“둘은 어때?”
뜀박질을 멈추지 않으며 묻는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한세정과 신지유.
“15%에서 20%는 회복됐어요!”
“저도, 저도요!”
2할에 약간 못 미치는 양이라.
‘아슬아슬한가.’
귓가를 파고드는 답변에 나는 허공을 바라봤다.
[현재 나의 공적치 : 57,918(산술법 확인▼)]
내가 확인한 건 공적치였다.
‘지도’를 얻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6천 대 후반이었던 수치가 어느새 5만 대 후만으로 치닫고 있었다.
20여 분 만에 나이트를 5천 마리 넘게 사냥했다는 산출 값에 얼얼해지던 멘탈을 관리하며 공적치를 토대로 괴물들이 몇이나 남았을지 따져 봤다.
‘13인으로 진행했을 때 솔져가 대략 1,500에 나이트는 680마리였다. 그렇다면…….’
인원 판정이 다섯 배로 늘어났음을 감안해 최소 5천에서 3천5백.
맥시멈으로는 솔져가 7~8천, 나이트가 4~5천쯤 될 거다. 만일 비율 조정을 의식한다면, 솔져는 2~3천으로 줄어들고 나이트가 8천에서 1만으로 늘어났겠지.
다시 말해.
앞으로 처리해야 할 나이트의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5천이 안 된다는 소리.
“한세정! 신지유! 공적치 몇이야!”
“저, 저요? 저는…….”
“전!”
더욱 확실한 계산을 위하여 두 여인의 공적치도 전달받았다.
내 옆에서 고군분투하던 한세정과 신지유가 획득한 공적치는 14,000가량. 나이트로 환산하면 다시 천사백 마리 분량이 감소해 3천5백 남짓으로 내려간다.
‘좋아.’
솔져를 철저히 배제한 무식한 연산이라 정밀함은 다소 부족하지만, 전쟁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도출 값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다고 하기는 뭐해도.
그 정도 규모는 2차 전장으로 지정한 무대라면 너끈히 파훼할 거라 믿었으니까.
바로 저곳.
“호리병이다!”
신지운의 외침처럼 일명 ‘호리병’으로 불리는 장소라면 말이다.
* * *
인스턴스 던전은 특이한 세계다.
음.
그보다는 신기하다고 해야 맞을 거다.
사실 ‘점령의 구슬’을 드랍한 던전을 본떠 창조되는 가상의 공간이니 내부도 다르지 않아야 정상인데.
‘점령의 구슬’을 획득한 ‘던전’과 동일한 규격의 인스턴스 던전이 구축된다, 라는 규정이 있음에도 300m~500m로 조막만 한 진짜 던전에 비해 이 땅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넓이를 자랑했다.
필시 아이템 설명 창에서 말하는 ‘규격’에 면적은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그 까닭에 대해서는 제작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다.
구태여 가늠해 보자면.
인스턴스 던전의 생성 의의가 어디까지나 성장 어드바이스에 있는 만큼, 입장하자마자 백여 마리의 괴물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끔 특별히 범위를 키워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광활해진 영향으로 기존의 던전에서는 마주하지 못하는 지형이 생겨났고.
그중 하나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호리병 구간’이었다.
마치 호리병을 눕혀 놓은 듯.
폭이 5m에 간신히 닿는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불룩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러한 구조가 세 번이나 반복되는 독특한 구역이었다.
내가 이쪽으로 일행을 데려온 연유는 명백했다.
“안쪽에서 진을 치고 머리를 들이미는 족족 사냥한다.”
비좁은 진입로를 틀어막고 농성에 임하면, 능히 또 하나의 개미지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로에서 가로로 전환된 개미지옥을.
물론.
커멘드들이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뚫고 통과하면 되레 벌어진 구멍으로 밀려 들어오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익사해 버리는 암담한 꼴이 돼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커멘드들은 내가 데려간다.”
“네?”
“세 번째 방에서 처리할 거니 유인해서 끌고 갈 때까지 대기해.”
나는 결심했다.
커멘드들만 따로 빼내 홀로 상대하기로. 난관이 될 게 뻔했지만, 십이지신을 활용한다면 마냥 어렵지만도 않을 듯했다.
네이밍이 붙은 유일 등급의 골렘 세트.
커멘더라도 절대 무시할 전력은 아니리라 여겼다.
“올라가.”
이로써 순식간에 회의를 마친 후 한세정들을 입구 위쪽으로 올려보냈다.
벽면의 높이가 30m를 훌쩍 넘었지만, 골렘 엘리베이터에 한세정의 공간 이동이 더해지니 등반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즈음.
“заб?ваць людзей!!”
쿵!
쿠웅!
쿵!
어인을 위시한 커멘더들이 멀찍이서 얼굴을 드러냈고, 뒤이어 수천 마리의 괴물 군단도 앞다투어 달려오는 게 시야에 잡혔다.
[감각 증폭 : 시력]
-후욱
시력을 극대화시켜 자세히 살펴본 바.
커멘더와 군단의 간격은 대충 500m.
애를 쓰고 유인하지 않아도 이미 분리가 되어 있는지라 나는 적당히 마중을 나가 기다리다가 최선두인 철갑 사자와의 거리가 100m 안팎으로 줄어들었을 때 슬그머니 호리병 구간의 심처로 물러났다.
[발록의 투기]
[투르바의 포효]
[강격]
후우웅―
쾅!
“спын?ць чалавека!!”
“그워어어어어!!”
“키에에엑!!”
중간중간 적절하게 건드려 주며 후퇴하니 놈들은 뒤를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내 뒤꽁무니만 쫓아왔다.
그래도 제법 지능적인 개체로 간주했던 어인이라면 유인책을 의심하거나 함정임을 간파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여 줄 수도 있겠다 걱정했거늘.
“봉인 해제!”
“봉인 해제! 재우 씨! 벽 세워! 지유야!”
쿵―
쿠구구구구구궁!
뒤늦게 뛰쳐나온 한세정들이 입구를 봉쇄하든 말든 오로지 나만 노려보며 뛰고 또 뛴다.
그 덕택에.
타닷―
탁―
“후.”
난 무척 손쉽게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 대 삼.
아니.
촤아아아악!
“봉인 해제.”
우웅우우웅!!
“어디 한번 즐겨 보자.”
콰아아앙!
콰아앙!
십삼 대 삼의 대난투 결전 스테이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