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개미지옥 】
탁―
풀숲에 발을 내딛자 훅 하고 전신을 휘감는 온기.
혹한기의 최절정으로 가고 있는 한국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온난한 기후에 비로소 다른 차원에 도착했음을 자각했다.
[‘칭호 : 점령하는 자’가 발동합니다.]
[현재 〈인스턴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 존재하는 적의 숫자가 표시됩니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 71시간 59분 42초]
[2등급 : 8]
[1등급 : 89]
시야 한쪽에 자리 잡은 현황판을 잠깐 우측으로 밀어 두고서 몸을 돌리자 두 부류로 나뉜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인스턴스 던전이, 또 ‘쌍수 증량의 폭력’이 상당히 친숙한 한세정 외 4인과, 던전은 경험했으나 인스턴스 던전에 대해서는 지식이 부족한 듯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원앙 부대 7인을.
“오빠.”
한세정은 신지운을 보내 당혹스러워하는 원앙 부대원들에게 인스턴스 던전에 관한 설명을 부탁하곤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오빠.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만, 두 글자 안에 내포된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겠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수많은 난관과 고비를 돌파하며 신뢰를 쌓아 온 세월의 힘이 작용한 모양이었다.
표정만 봐도 얼추 속내를 읽을 수 있게끔.
하여.
그녀가 듣고 싶었을 대답을 해 주었다.
“우린 지금부터 이곳을 개미지옥으로 만든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무얼 해야 되는지.
처음 ‘점령의 구슬’을 사용해 이세계로 건너가야겠다 결정하고서 계획을 실행하며 머릿속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순간적인 기지로 눈앞의 열세를 회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결국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기에 반드시 다음 스텝이 필요했다. 해서 미친 듯이 뇌를 굴렸고, 고심을 반복한 결과 마침내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으니 그것이 바로 ‘작전명 : 개미지옥’이었다.
본디 ‘개미지옥’이란.
명주잠자릿과의 유충인 개미귀신이 절구 형태로 파 놓은 땅을 말하는데, 한번 빠지면 미끄러운 벽면 때문에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모습이 지옥에 떨어진 것 같다 하여 붙여진 명칭.
난 그 천연의 늪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구현해 낼 작정이었다.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곽재우, 신지유.”
“예, 형님.”
“네?”
“저 균열을 가운데 두고 50m 정도 거리를 벌려서 성벽을 쌓아.”
먼저 지구와 인스턴스 던전을 연결해 주는 ‘통로’를 중심에 놓고 적당한 간격에서 벽을 세운다.
이 성벽의 건설 이유는 저지선.
혹여라도 개미지옥을 벗어날 놈들을 대비해 방패를 설치하는 거다.
그 목적을 알려 주자.
“제가 안쪽으로 할게요.”
“알겠다.”
“드라이어드.”
“철혈의 술.”
우우우우웅―!!
쿠구구구궁!
촤르르르르륵!!
신지유와 곽재우가 대략적인 구도를 잡으며 막대한 양의 마력을 투자해 목책과 혈벽으로 이루어진 두 겹의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두 번째 지시를 내렸다.
“십이지신, 구덩이를 파라. 최대한 깊숙하게.”
“으워어어어!!”
“으워어어!!”
‘통로’ 아래로.
개미귀신의 사냥터와 똑 닮은, 직경 50m에 깊이는 따로 정하지 않은 초거대 구덩이를 파 내는 것이었다.
실상 이 부분이 제일 중요했는데.
최소 수천 단위의 괴물들을 처넣으려면 웬만한 수준으로는 턱도 없기 때문이었다만, 전문 인력의 능력은 엄청났다.
후우우우욱―
쾅!
수도(手刀)를 대지에 꽂아 넣고서 힘을 주어 걷어 올릴 때마다 지반이 한 움큼씩 사라지는 광경은 굴착기 저리 가라였다.
아니.
현대 문명인 굴삭기 따위와는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레벨이었다.
[‘혹한의 방벽’이 파괴되었습니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중에 방벽이 붕괴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즉시 나는 골렘들을 빼냈다.
아직 만족할 만한 깊이는 아니었지만, 저러다 괴물들과 뒤엉키기라도 하면 아예 회수 자체를 못 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저게 어떤 아이템인데.
“너희는 여기서 대기하다 넘어오는 놈이 있으면 죽여라.”
한발 후퇴시킨 골렘들은 착공이 마무리된 성벽 군데군데에 늘어놓아 저지력 강화에 투입하고서 우리도 부대를 나눴다.
“조이령, 곽재우, 신지운.”
“네?”
“네?”
“네?”
“너희는 외곽에서 포타우스들이 몰려오는 걸 처리해.”
여긴 엄연히 던전 내부다.
전방도 전방이지만, 후방 경계를 늦췄다가는 이 공간의 지배자인 포타우스들에게 두들겨 맞을 터이니.
근접전 위주의 세 명에게 그쪽을 맡겼다.
수호병을 대동했기에 100여 마리가 죄다 몰려와도 너끈하게 막아 낼 거다. 그래서 단단히 주의시켰다.
“명심해. 한 마리는 무조건 생포해 둬.”
다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가 던전이 클리어돼 밖으로 나가면 애써 마련한 것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확답을 하고 떠나가는 세 사람.
뒷모습을 보며 배웅해 줄 새 없이 이번엔 원앙 부대를 불렀다.
“당신들이 할 일은 하나야.”
“어, 어떤…….”
“우리 곁에 붙어 있다가 내가 지시하면 지체하지 말고 물러날 것.”
이들도 무력이 있다.
암살자로 파견된 전투 부대이니 전투력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다만.
난 이들을 전사로 쓸 마음이 없다.
믿음의 부재.
한 명, 한 명과의 호흡과 조화가 최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전장에서 불신은 독보다 더한 비수다.
그러니.
괜히 안 맞는 부품 하나를 어거지로 끼워 맞췄다가 전체가 박살 나는 꼴을 볼 바엔 애초부터 배제하는 게 나았다.
“아, 알겠습니다.”
저쪽도 그편을 반겼다.
“올라가자.”
난 후다닥 뒷걸음질 치는 원앙 부대원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한세정과 신지유를 데리고 추가 시공된 10m짜리 높이의 단상으로 이동했다.
됐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남은 건 전쟁뿐. 긴장감이 뭉쳐 빚어낸 전운을 느끼며 착 가라앉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와중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괴물들은 저 ‘통로’를 못 넘어오지 않을까. 인스턴스 던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장을 어드바이스하려 제작된 아이템이니, 인간 이외의 대상의 간섭은 불가하다는 설정이 구축돼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만약 정말로 그러하다면.
‘통로’를 오가며 닭 쫓던 개처럼 멀뚱거리고 있을 괴물들을 찢어발겨 줄 요량이었다.
허나.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차원 : 테라’를 침공한 ‘침략군’ 역시 우주의 법칙, 곧 시스템의 영향력 아래에서 움직이는 존재.
그러므로.
[오직 인간만이 출입 가능합니다.]
이런 메시지가 뜨지 않는 이상은 인간에게 허락됐다면 괴물에게도 허락됐을 공산이 컸다.
그리고 이 추측은.
파직―
파지직―
현실이 되었다.
쿠궁―
“키에에에에에에엑!!”
“크아아아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괴물들이 그 풍채를 드러낸 것이다.
‘각인’이었던가.
이마에서 적광을 쏘아 내던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필시.
‘혹한의 방벽’을 두들기는 과정에서 괴물들에게 분쇄된 게 분명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해 참으로 아쉬웠으나, 이내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마력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온다.”
본격적으로 개미지옥을 가동할 때가 도래했노라고.
우우우우웅!!
우우웅!!
내 신호에 맞춰 호응하는 한세정과 신지유.
스타트는.
“쌍독사.”
보랏빛과 진녹색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두 마리의 커다란 뱀이었다.
용독술과 더불어 마스터 단계로 향상시켜 놓은 기술로.
어느새 작은 아나콘다와 비견될 정도로 성장한 뱀들은 유유히 하늘을 비행해 지옥으로 낙하하던 괴물들에게 몸을 부딪쳤다.
“사아아아아악!!”
“사아아악!!”
콰아아앙!!
공중 폭격이라고 해야 할까.
폭격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지면과 충돌해 무지막지한 폭발을 일으키는 듯한 광경을 연출한 쌍독사의 위력은 실로 살벌했다.
뭣도 모르고 진입했다 추락해 미처 제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경황 중에 직격당한 탓이었다.
더군다나.
휘화하하하하학!!
후화하하학!!
‘쌍독사’의 특징은 폭발 직후 독무를 뿜어낸다는 것.
버섯구름처럼 솟구쳐 오른 보랏빛 구름은 한데 뭉쳐 버둥거리는 괴물들을 공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백 점짜리 공격이었다.
“쌍독사, 쌍독사, 쌍독사.”
우우우웅!!
우웅!
한세정도 그걸 잘 알기에 쉬지 않고 쌍독사를 불러내 투척하는 데 주력했다.
마스터 구간이기는 해도 여전히 사본(寫本) 등급.
나이트급 개체들에게는 대미지가 모자랄 수 있으니 경과를 보고 공세를 이어 가는 등의 느긋함은 금물이었다.
그렇게.
전력을 다한 한세정이 일차적으로 군단을 막는 동안.
딸깍―
딸깍―
나와 신지유는 바닥에 내려놓은 뭔가를 주물거렸다.
화려한 색채로 칠해져 있는 알루미늄 캔, ‘부탄가스’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밖에서 챙겨 온 몇 안 되는 물건으로.
개미지옥 작전을 설계했을 때 한세정의 쌍독사 폭격과 더불어 효과적인 전술로 이만한 게 또 없을 거라 확신했던 공략법을 이행하고자 그간 수색을 다니며 수거해 두었던 쉰 개 남짓한 부탄가스를 모조리 개봉한 후.
“던져.”
휘이이익!
남김없이 구덩이를 향해 내던졌다.
“도깨비불.”
화르르륵―!
신지유의 두 번째 파트너 ‘도깨비불’이 전면으로 나선 건 그즈음이었다.
“불태워 줘.”
화륵!
소녀의 주문을 전달받은 불꽃이 기운을 쏟아 낸다.
‘인라치 플렌츠’에 투여하려던 ‘단계 향상의 돌’을 도깨비불 강화에 쓰도록 말해 두었었는데, 그 덕택에 ‘작은 불꽃’이라는 이명(異明)과 어울리지 않는 진홍색 물결이 일대를 휩쓸며 부탄가스와 마주했고.
툭―
콰아아아아아앙!!
우린 지옥이 ‘연옥(煉獄)’으로 바뀌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보유했던 물자를 아낌없이 소모한 보람이 느껴지는 리턴값. 신지유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드라이어드를 같이 불러 연계기를 시전했다.
“드라이어드! 목책을 제외한 주변의 초목을 전부 끌고 와 줘!”
우우우웅!
다소 흥분한 어조로 고함을 지르는 소녀의 명령에 나무의 정령이 식물의 파도를 이끌고 오자.
“인라지 플렌츠!”
그 녹색 너울에 마법을 더하는 신지유.
화룡점정은 도깨비불이다.
“태워!”
화르르르륵!!
이미 살갗을 태우고 뼈조차 녹여 버리는 화마(火魔)가 날뛰고 있거늘. 소녀는 더 뜨겁게, 더 거칠게 타오르도록 초대형 장작 무더기를 얹어 주었다.
단 한 마리의 괴물도 온전히 빠져나올 수 없도록.
나는 한세정과 신지유가 차례대로 선보인 장면을 감상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
잠시 뒤면 내 순서였다.
고로.
나 또한 두 여인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선사해 주고자 화면 하나를 가져왔다. 어서 선택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현재 결합 가능한 특성 : 불굴 : 다대일
‘한계 돌파 : 체화’의 스크린을.
[‘특성 : 다대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꾹―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술 ‘오르그의 파괴 본능’과 특성 ‘다대일’이 결합합니다.]
[스스로의 길을 찾은 그대에게 「오리지널 기술 : 군단을 파괴하는 본능」을 부여합니다.]
[2차 과제가 해금되었습니다.]
[과제 : 1. 특성 결합(완료) / 2. 적 ‘10,000’개체 파괴]
[2차 과제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