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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19화 (119/232)

119화

[검색된 인원 : 69명]

“육십…구 명?”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대체 왜.

열세 명으로 표기되어야 할 인원이 다섯 배가 넘게 찍혀 있는 거지?

예상하지 못한 판정 인원에 일순간 머리가 과부하라도 걸린 듯 굳어 백색으로 물들려던 걸 간신히 제어하며 멘탈을 붙들고 냉정하게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우연?’

침착한 사고 속에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원인은 돌발적인 만남이었다.

우리가 농자재 백화점을 거점으로 삼고 이 근방에서 활동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며칠만 지나면 한 해가 넘어가니까.

하여간.

긴 나날을 보내며 주기적으로 순찰을 다닌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살지 않음을 수십 번도 넘게 체크했다.

따라서 조철영 무리처럼 씨앗 등의 물자를 노리려 했거나, 내지는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떠돌다 1km 범위에 겹친 걸 수도 있다.

충분히 타당성 있는 추론이다.

‘기수 사냥’ 때와 비슷하게 이런 시기에 장거리 이동과 떠돌이 방랑 생활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삶이란 게 어디 이론대로만 흘러가던가.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이곳을, 더 정확하게는 내 목을 노리고 찾아온 적(敵).

성십자가 클랜, 과 성십자가 클랜의 제안을 수락한 신한국 정부의 공격대일 확률이었다.

무엇이 정답일까.

아마.

답을 고른다면 우연보다는 운명으로 봐야 할 듯했다.

콰앙!

난데없이 울려 퍼진 폭음과 함께.

“가자아아아아아!!”

“공겨어어어어억!!”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살의(殺意)로 뒤범벅된 군세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키에에에에엑!!”

“크워어어어!!”

“으워어어어!!”

괴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를 이끌고서 말이다.

도망.

나는 직감했다.

저 거침없이 돌진해 오는 파도는, 아니, 절망의 해일(海溢)은 우리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가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전지대’, ‘차원 상점’, 그 밖에 여러 지리적 이점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물러나야 했다.

물론.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도주를 각오하자마자 깨달았다.

온 천지가 괴물들로 뒤덮인 이 망망대해에서 우리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걸.

“오, 오빠…….”

“아…….”

“형님!”

그 암담한 현실을 인식한 내 귓가로 다섯 사람의 절규가 들렸다.

동행을 약속한 이들.

같은 꿈을 꾸며, 같은 기적을 그리던 한세정들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날 애타게 찾고 있었다.

“…….”

젠장.

마치 ‘가속’을 발동한 양 지독하게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욕설만 지껄였다.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지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안겨 주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마.

툭―

차가운 눈송이가 내 볼에 닿지 않았더라면 평생.

살갗을 타고 전해진 냉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뺨을 쓸어내리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

라고.

겨우 한 글자, 감탄인지 탄식인지 구별도 되지 않은 짤막한 음절이었지만 참 신기하게도 그 찰나에 전신의 세포가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말짱해졌다.

죽음이 목전에 당도하면 살기 위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하던가.

내 상태가 딱 그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넋이 나간 놈처럼 늘어져 있던 신체에 생기가 치솟고 있었으니까.

흡사.

결함으로 고장 났던 기계를 깔끔하게 고친 기분이었다.

촤르르르르르륵―

그 놀라운 경험과 동시에 얼어붙었던 사고 회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며 현시점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계산해 나간다.

‘고유 능력’, ‘기술’, ‘아이템’, 그 외에 무언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두뇌는 나를 비롯해 한세정들과 더해서 조건적으로나마 의탁 중인 원앙 부대원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훑으며 방안을 강구해 나갔다.

뭔가를 구상할 때마다 ‘FAIL’이란 단어가 뒤따라왔지만.

생존 의지를 양분으로 가동된 탐색기는 갖은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활로를 찾으려 온 힘을 쏟았고,

“…아!!”

처절하다시피 한 노력 끝에 기어코 한 가지 길을 발견해 냈다.

의외로.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고 친숙한 장소를.

“날 따라와!!”

나는 그 이정표를 건네받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한세정들을 이끌고 ‘거점’으로 달렸다.

“네?”

“어, 어디로…….”

“빨리!!”

매우 급작스러운 행동에 굼뜬 대응을 보이는 한세정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억지로 따라오게 만들었다.

인간과 괴물들의 군단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늑장부릴 때가 아니었다.

쾅!

닫아 두었던 문을 확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가자 최홍진을 위시한 원앙 부대원들이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통성명을 하기는 했지만 귀담아듣질 않았던 탓에 김호정인지 김정호인지 헷갈리는 남자가 정도윤을 업은 채였다.

대장의 병세는 그대로였으나.

여기 있으면 치료고 뭐고 몰살당할 판국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달아나려던 것 같았는데, 계획을 실행키도 전에 발각당해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

“어, 어어……!”

다만.

후욱!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느닷없이 돌변해 우릴 향해 공격 의사를 내비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저들이 뭘 하든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랬는데.

번쩍!

“으, 으으! 으으으으!!”

문제는 부하의 등에 업혀 축 늘어져 있던 정도윤의 이마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까처럼 발작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어 대는 그의 미간에서 선명한 적광이.

그 덕에.

“정부, 였군.”

나는 괴물들을 이끌고 온 놈들이 신한국 정부 소속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마와 붉은 빛.

똑같은 패턴, 제삼자일 리가 없었다.

빠득―

이가 갈린다.

예측이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정부의 짓이었음이 밝혀지자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성십자가 클랜이 얼마나 귀중한 대가를 제안했기에 날 못 죽여서 안달인 것인지.

“이, 이건!”

“각인! 각인이에요!”

“대장님이 언제 각인을 받으신 거지……?”

진득하게 피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금 계단을 오르는데, 원앙 부대원들의 격양된 목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각인?

낯선 단어였다.

최홍진에게 정부 측에 관해 최대한 세세하게 캐물었으나, ‘각인’이라는 단어는 내 기억에 없었다.

자기소개와 달리 자료 수집에 있어서는 종이에 기록까지 할 정도로 집중했는데도.

“각인? 그게 뭐지?”

물어야 했다.

허나.

콰앙!

쾅!

[‘혹한의 방벽’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한가로이 질의응답이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경고 문구에 나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후우우욱!

텁!

“……?!”

최홍진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거렸다.

환경이 부적합하다면, 옮기면 된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

거절한다면 강제라도 끌고 가리라.

“…….”

꿀꺽―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내비치며 속삭이는 내 말에 최홍진이 침을 삼킨다.

작심하고 토해 내는 투기에 영혼까지 짓눌린 듯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그의 동공. 자신에게 거부권이 없음을 알아차렸는지 힘겹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제야 옷깃을 놓아준 난 다시금 멈췄던 걸음을 움직였다.

뚜벅뚜벅 전진해 도달한 목적지는 넓게 펼쳐진 공간 속에서 각종 중요 물품을 보관해 두는 구역으로. 씨앗이 든 모종 박스나 의류와 식량에 물약류처럼 당장 쓰지 않는 아이템들도 널려 있는 일종의 보물 창고였다.

이 급박한 와중에 내가 여길 들른 까닭은.

툭―

당연하게도 본능이 알려 준 활로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 손에 쥐어진 ‘구슬’.

이것이.

콰직!

전후좌우가 물 샐 틈 없이 빽빽하게 가로막힌 전장.

날개가 없어 하늘로도 갈 수 없고, 지하 통로가 없어 땅으로도 갈 수 없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유일한 탈출구였다.

쩌어어어어어억!!

[‘점령의 구슬’을 사용합니다.]

[〈인스턴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이 생성되었습니다.]

[해당 던전은 내부에 존재한 모든 적을 섬멸할 시 귀환과 함께 소멸하며, 생성 후 ‘3일’이 초과해도 자동 소멸합니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 71시간 58분 59초]

“가자.”

인스턴스 던전이 내가 선택한 묘수였다.

* * *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500분]

“시작됐군.”

신(新)한국의 수도 한양을 물 샐 틈 없이 수호하는 삼중 성벽의 제일 관문에 선 초대 왕 이회건은 새로운 파도가 밀려온다는 공지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신분은 국왕.

굳이 전장에 나서지 않더라도 ‘각인’이 새겨진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적을 패퇴시키고 승전고를 울려 줄 테지만.

“또 적이 몰려오는구나. 내 지팡이를 가져와라.”

“예, 전하.”

이회건은 아랫사람들의 만류에도 굽히지 않고 최전선에 섰다.

그가 내세우는 왕도(王道)란 ‘옆에 서는 자’.

제 역량 이상으로 무리하다 쓰러지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요, 능력이 있음에도 목숨 보전에 급급해 뒤에 처박혀 있는 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니. 존재감을 양껏 드러내면서도 막상 위기와는 거리를 두는 아주 적절한 위치가 바로 옆이었다.

이 정치적 원칙을 꾸준히 고수한 덕분에 지지율이 최악으로 떨어질 뻔했던 악재에서도 국민들의 마음을 호의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고, 지난날 왕정제를 선포하며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광기 어린 충성심으로 무장한 군부 최고 관료들과 서로 간의 이득을 위하여 협력 관계가 되어 왕권 형성에 도움을 준 성십자가 클랜의 조력도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태도를 잘 취했던 게 컸다.

세상은 과거와 다르다.

여론이 돌아서면 무너지는 것도 금방이다.

특히.

작금의 시대같이 모든 이들이 무력을 지닌 무법천지에서 권력을 쥐고 원대한 정벌의 꿈을 성취하려면 대중을 품어야 한다.

태왕께서 정복하셨던 영토.

그 선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전역에 깃발을 세우려면, 소수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했기에.

“여깄습니다. 전하.”

“고맙네.”

“아닙니다.”

“이번에도 쓰러지지 말게.”

“예!”

“하하, 가지.”

민중의 앞에선 늘상 응원과 격려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남들과 부대끼며 무기를 든다.

그러다.

불현듯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십자가 클랜과의 협력을 생각하다 보니 저쪽도 슬슬 작전이 실행되었겠거니 싶었다.

악마라고 했던가.

성십자가 클랜과 겨루고도 모자라 심지어 신한국 내에서도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강자로 평가되는 클랜 마스터를 때려눕혔다지.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는데.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회건은 그 악마라는 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성십자가 클랜과 빚은 마찰이 돌고 돌아 자신의 지지층 확보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두 개 부대의 희생이라는 손해가 발생키는 했지만, 아무렴 좋았다. 소모품 좀 투자해서 왕위를 따냈으니 몇십 배는 남는 장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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