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퍼석―
‘지도’에 가져간 순간 퍽 하고 부서져 빨려 들어가는 근원석.
[현재 복구율 : 51%]
[현재 복구율 : 52%]
[현재 복구율 : 53%]
발치에 수북하게 쌓인 것들을 하나둘 먹여 나가자, 현물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만큼 복구율이 쭉쭉 올라간다.
도중에 몇 개를 먹였던가 세다가 놓쳤는데, 다행히 별문제는 없었다.
세던 걸 놓쳤다는 구실로 정해진 수량보다 더 투입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1등급 근원석’ 흡수 완료]
라는 메시지가 뜨더니 ‘지도’가 근원석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퍼석―
[복구율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도 조각’이 「완전한 지도」로 성장합니다.]
* * *
“오빠!”
“오셨어요?”
문을 열고 거점에 입성하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나를 반기는 한세정과 조이령.
“상황은 어때?”
장포에 묻은 피와 살점 따위의 찌꺼기가 집에 묻지 않도록 접어 빨래통에 담으며 질문하자, 주어가 빠져 있음에도 원앙 부대 얘기라는 걸 눈치챈 한세정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등급이 등급이라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유혈 사태 없이 대화로 부드럽게 해결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조이령이 추가로 근원석 분류 작업도 거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복귀하고 곧장 일을 진행한 터라 80%는 마쳤다고.
“오빠 것도 주세요. 같이 해 놓을 테니.”
나는 스스로 노동을 자처하는 한세정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2층으로 향해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열두 개의 타임 어택 특전을 확인했다.
누가 뭘 얻었는지 알아보기 쉽도록 맨 왼쪽부터 차례대로 한세정, 조이령, 곽재우, 신지유, 신지운에 원앙 부대 대장, 부대장, 부대원 순으로 정돈되어 있었는데.
“장비가 대다수인가.”
기술서나 장신구 등 다양하게 지급되었던 1일 차와 달리 2일 차 특전은 대체로 무기 혹은 방어구였다.
게다가.
“이건.”
무척 낯익은 아이템들이었다.
[특전 목록]
「한세정 : 흑묘살의 날렵한 가죽 상의」
「조이령 : 칼론드 일반 기사용 장창」
「곽재우 : 단단한 백골 갑주―하의 」
「신지유 : 천년목의 나뭇가지 지팡이」
「신지운 : 용병 길드 주문 제작―상의」
신지유의 지팡이를 제외하면 전부 각자 세트 아이템으로 구매한 장비였으니까.
아무래도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웬만한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보니 더이상 그쪽보다는 무장 보강에 신경 써 주는 듯했다.
“안 그래도 슬슬 교체해 주려고 했는데, 잘됐네.”
돈을 아낀 데다가 세트 효과가 유지되면서도 고급형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기에 흡족하게 주억거린 나는 신지유의 특전만 들어서 설명 창을 열었다.
《천년목의 나뭇가지 지팡이》
- 등급 : 비범
- 분류 : 무기
- 설명 : 정령사이자 대장장이를 겸했던 기인이 자신의 손녀를 위해 직접 제작한 지팡이. 유난히 나무 정령과 친밀함을 보였던 손녀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무려 천 년을 살아온 거목을 설득해 정기가 가장 강하게 축적된 나뭇가지를 받아 와 빚어낸 작품이다.
- 옵션 : ‘초목’과 관련된 모든 기술 위력 15% 상승 / ‘초목’과 관련된 모든 기술 마력 소모량 11% 감소 / 교감 +9%(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호.”
시야 한쪽에 출력된 홀로그램 화면을 찬찬히 읽어 본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명칭에서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신지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아이템이었다.
이미 활을 지닌 탓에 매번 스위칭해서 써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겠으나, 어디든 편법이란 게 있다.
가령.
등에 묶어 두고 정령술을 발동할 때만 손을 빼서 지팡이를 붙잡는 식으로.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그나저나.”
상념을 마친 나는 신지유의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원앙 부대가 습득한 특전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들에게서 환수해 온 일곱 점의 물품의 첫 칸에는 특이하게도 ‘포션’이 나열돼 있었다.
“환자…라서인가?”
원앙 부대 대장인 정도윤은 현재 강력한 중독 증세로 내내 누워만 있는 중상자.
따라서.
현 시점에서 그에게 제일 필요한 건 포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독약 한 개만 띡 던져 주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중급 물약 세트》
체력용, 해독용, 저주용, 상태 이상용(화상, 빙결, 마비)이 각기 세 병씩 든 열두 병짜리 묶음 상자가 배달됐다.
숫제 만병통치약 조합.
일반적인 비범 등급 아이템보다 훨씬 비쌀 터인데 이런 걸 선뜻 내주다니. 환자일 경우엔 보너스라도 적용되는 건가.
뭐.
자세한 내막이야 어떻든 간에.
턱―
“한 번은 더 벌어야겠어.”
난 상자 뚜껑을 닫으며 포션 세트를 뒤로 뺐다. 정도윤에게 쓸 치료제를 구했지만, 당장은 쓸 마음이 없었다.
상당한 가치를 지닌 세트이니.
병세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 3일 차에도 동일한 특전을 얻게끔 시도해 볼 요량이었다. 또 줄지는 불확실하지만, 한세정이 독기가 퍼지지 못하게 제어하고 있어 죽을 일은 없기에 하루쯤 시간을 끈다고 생사가 바뀌진 않으리라.
정 위급하다면 그때 가서 투약해도 된다.
그리 결론을 내리고 연달아 놓여 있는 세 권의 책자를 잡았다.
“기술서군.”
각기 공격, 방어.
《카운터》
《마력 분사막》
그리고.
《계약서 : 도깨비불》
“…계약서?”
소환 타입이었다.
《계약서 : 도깨비불》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환계(幻界)의 수많은 존재들 중 ‘화염’ 속성의 작은 불꽃 「도깨비불」과 인연을 맺어 주는 계약서. 신체 능력 ‘소환’과 ‘교감’에 따라 소환수의 힘이 달라진다.
- 옵션 : 탐독 시 사본(寫本) 등급 기술 ‘도깨비불 소환’ 습득
상점에서도 팔지 않는 소환 타입의 기술서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더군다나.
화염 속성이다.
“드라이어드 때문이네.”
하루 온종일 초목의 정령에게 감시당하는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상극 속성의 소환수 계약서가 드랍된 것 같았다.
호재였다.
이로써 신지유의 약점이 보완됐으니 말이다.
‘고유 능력’을 비롯해 모든 기술이 나무와 관련되어 있는 탓에 상성이 불리한 화염이나 냉기 등에 어찌 대항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얻어걸리는군.”
뿐만 아니라 다른 두 권의 기술서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반격 시에 파워가 1.2배로 향상되는 ‘카운터’는 미래를 잃고 대응하는 신지운에게, 손바닥 중앙으로 마력을 분사해 장막을 만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마력 분사막’은 근접전 위주의 스타일을 구사하면서도 변변찮은 방어술이 없는 조이령에게.
따로 맞춘 것처럼 뽑힌 뽑기에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마지막은… 목걸이에 반지 두 개.”
한바탕 만족스럽게 웃은 나는 나머지 세 개의 장신구를 열었다.
《펜슬러의 질주》
- 등급 : 비범
- 분류 : 장신구
- 설명 : 행성 ‘페루스(Ferus)’의 지배종 「펜슬러」의 근원석을 가공하여 제작한 목걸이. 들판을 질주하는 바람의 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 옵션 : 기술 ‘질주’ 사용 가능 / 순발력 +11% / ‘동작 : 질주’ 시 이동 속도 8% 향상 / ‘동작 : 질주’ 시 피로 누적 속도 6% 감소
《은밀한 안개》
- 등급 : 비범
- 분류 : 장신구
- 설명 : 행성 ‘네블라스(Nebulas)’의 지배종 「아에르」의 근원석을 재료로 삼아 가공한 반지. 마력을 주입하면 사방으로 ‘안개’를 흩뿌려 당신의 기척을 감춰 버린다.
- 옵션 : 기술 ‘아에르의 안개’ 사용 가능 / 동화 +13(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 ‘환경 : 안개’ 속에서 시야에 제한이 걸리지 않음
《사막의 신기루》
- 등급 : 비범
- 분류 : 장신구
- 설명 : 수십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법사의 전공을 기리고자 탄생한 반지. 특히나 기습 작전에 강했던 그는 자신의 오리지널 마법 ‘사막의 신기루’를 통해 적군으로 하여금 아군의 위치를 혼동시킨 후 습격해 승리를 거머쥐는 전술로, 「신기루의 악몽」이란 이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옵션 : 기술 ‘사막의 신기루’ 사용 가능 / 기만 +17(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 마력 +7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 겨우 목숨만 건졌던 과거가 반영된 것인지.
아니면.
시스템은 저들이 내게 ‘감금’되어 있다고 보는 건지 재밌게도 죄다 도주에 특화된 아이템들.
아마.
허튼 짓거리를 한다 싶으면 일절 용서 없이 목을 칠 거라는 내 각오가 하늘에도 전해졌나 보다.
그러나저러나.
“이건 오랜만이네.”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은밀한 안개’라는 반지 중심에 보석을 대신해 박혀 있는 근원석의 주인 ‘아에르’.
저 종족명을 어디서 보았는가.
이전 날.
불곰파와의 전쟁 당시 박대길이 이끄는 부대를 사냥할 때 썼던 타이머형 안개 생성 구슬에서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과거 중 하나라 똑똑히 기억한다.
급작스럽게 펼쳐진 안개에 휘말려 허둥지둥거리다 찢기고 터져 죽던 놈들의 얼굴과 비명 소리를.
‘한 놈이라도 놓칠까 봐 걱정이었지.’
그날을 회상하던 나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아이템들을 챙겨 일어섰다.
누구에게 무얼 나눠 줘야 할지 얼추 결정했기에 가서 분배해 주고, 분류가 끝난 근원석들까지 처리하고서.
“…으음.”
“……?”
어디선가 들린 신음에 고개가 돌아갔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병상.
정확하게는 그 위에 누워 있던 정도윤이었다.
‘깨어났나?’
어제 부하들을 살리려 날뛰다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아직까지 의식 불명이었던 그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해독약을 먹이기 전까지는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 예상 중이었는데.
물론.
단순 발작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는지라 계단으로 한세정과 곽재우를 부르며 정도윤에게 다가갔다.
“으으, 으……!”
점차 격해지는 몸부림.
타다닷―
“오빠!”
“부르셨습니까.”
거리를 좁혀 병상 옆에 서자 타이밍 맞게 올라왔던 한세정과 곽재우가 내 눈짓에 정도윤에게 관심을 둔다.
의사나 간호사같이 의료 업계에 종사한 이들이 아니기에 대단한 조처를 하진 않았지만, 용독술로 체내의 독기가 폭주 중인지 체크하며 치유 마법으로 체력을 북돋아 주자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버둥거리던 정도윤이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그러다 아예 잠잠해지는 그.
‘그냥 발작기였나.’
중급 해독 물약을 써야 하나 고심하던 차에 평정을 되찾은 정도윤을 바라보며 안도한 나는 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래저래 할 게 많아 애꿎은 데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서 보지 못했다.
후화하학!
우리가 사라지고 채 30초도 안 되어 정도윤의 이마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던 것을.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천장에 닿은 적광은 아주 잠깐 번뜩이다 금세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하여.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