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지구가 멸망하기 전.
인간사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던 문장 중에는 이러한 게 있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해지고, 잘 버는 자는 계속 잘 버는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비난하고자 탄생한 표현인데.
참 신기한 건 이 물질 양극화 현상은 세상이 무너진 이후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침공이 일어나던 시기에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복돼 목숨 부지하는 데 전념해야 하는 한편, 누군가는 범죄자 주제에 유치장으로 끌려가다가 사건이 터져 되레 텅 빈 경찰서를 점거하고 총화기를 탈취해 평범한 이들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등.
인류는 지옥이 된 일상 속에서도 여전한 운명의 불공평을 겪어야 했고, 그 정점에 달한 것이 바로 ‘이벤트 : 절망의 파도’였다.
공적치 랭킹 보상.
이 짤막한 한 줄의 시스템을 경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다음 회차 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어정쩡한 가능성 제시가 아니라 100%짜리 단언이다.
삑!
[현재 나의 공적치 : 3,969(산술법 확인▼)]
“벌써 4천? 미쳤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괴랄한 공적치 증가세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참고로.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297분 31초]
개전한 지 채 3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질 수가 없겠어.”
난 이 경이로운 성과에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눈먼 공격에 맞아 죽지 않는 이상.
공적치 1등을 한 내가,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는 지고의 보물을 부리는 내가 왕좌를 빼앗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런 어드밴티지를 갖고서 패배한다면 스스로 머저리임을 입증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미친!”
그 즈음.
뒷쪽에서 원앙 부대원들의 격양된 고함이 들렸다.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온통 초조한 일색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괴물들이 코앞에 있음에도 넋을 놓고서 골렘들만 바라보는데.
표정이 마치 수십 년간 산골 오지에서 살던 촌뜨기가 문명화된 도심에 처음 방문한 모양새와 같았다.
피식―
어제의 우리가 겹쳐 보이는 모습에 작게 웃은 나는 이내 전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297분 07초]
7분여.
한가로이 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
“하아!”
쿠우웅!
* * *
끼이이이이익―
투우웅!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를 떠나 맹렬하게 날아가는 화살.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기세만으로도 충분한 살상 능력이 엿보였으나, 매서운 눈빛의 소녀는 뭐가 부족한지 아낌없이 마력을 덧입혔다.
“인라지 플렌츠!”
지정된 초목의 크기를 확대하는 주문을 외우며.
한 대의 화살과 한 번의 마법이 뒤섞이며 빚어낸 결과물은 가히 놀라웠다.
우우우웅!
소녀의 명령이 내려진 직후.
쿵!
쿠구궁!
80cm 남짓했던 평범한 화살이 공성 병기로 쓰이는 발리스타에나 어울릴 법한 3m급의 대형 화살로 변모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대미지도 엄청났다.
후우우우웅!
쿠웅!
콰드드드드득―!!
“크에에에에에엑!!”
절묘하게 적중 직전에 변칙을 준 터라.
통상적인 위력으로 상정하고 대비하려던 괴물의 방어를 간단히 뚫어 버리고는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발겼으니까.
그야말로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완벽한 축포였다.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290분 26초]
“후, 아슬아슬했나.”
골렘들을 총동원하고도 자칫 10분을 넘길 뻔했던 전투에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체 추출’ 기능을 사용하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과연 또 무얼 내줄 것인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응시하길 잠시, 기다리던 메시지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압도적인 속도로 「파도」를 방어해 냈습니다.]
[소요 시간 : 9분 34초]
[뛰어난 성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당신에게 ‘특별한 보상’을 선물합니다.]
[해당 보상은 ‘15분 이내(2일 차 기준)’로 「파도」를 방어해 낸 생존자에게만 주어집니다.]
[‘특별한 선물’은 일차 단위로 공급됩니다.]
[현재의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보상을 선정 중입니다.]
한 차례 읽어 봤던 익숙한 문장들 중간에 낯선 조항이 보인다.
“15분?”
타임 어택 충족 요건이 10분에서 15분으로 상향 조정되어 있었다.
난이도에 따른 조절인지.
왠지 실패할까 기를 쓰고 쏟아부었던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실질적으로 나쁜 건 아니다. 사상자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생사 결전같이 에너지 소모량이 극심한 운동은 1분 1초라도 일찍 마치는 게 좋지.
“아무튼, 일차별로 증가하는 거라면 내일은 조바심 가지지 않아도 되겠어.”
못해도 15분.
길면 20분까지 클리어 타임이 늘어날 테니 널널하게 사냥할 수 있을 터.
그만큼 위험도 역시 올라가겠지만, 우수수 드랍될 근원석과 히든 피스에 뭣보다 공적치 랭킹 보상을 지속적으로 수급해서 지속적인 과성장 테크 트리를 유지하다 보면 외려 첫날보다 일찍 끝날지도 모른다.
[…완료!]
번쩍―
툭―
홀로 사색에 빠져 있는 사이 적절한 상품 셀렉되었는지 빛무리가 흩날리며 허공에서 뭔가가 나타난다.
공중을 나풀나풀 비행하며 손바닥에 툭 내려앉은 물체의 정체는.
“…문서?”
고급스럽게 꾸며진 문서.
[보상으로 ‘한계 돌파 의뢰서 : 체화’를 습득합니다.]
“아!”
‘한계 돌파 의뢰서’였다.
《한계 돌파 의뢰서 : 체화》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한계에 다다른 「원본(原本)」 등급의 기술을 「체화(體化)」 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길잡이입니다. 험난하고 고된 시련이 당신을 가로막을 테지만, 진일보한 미래의 자신을 생각하며 도전하십시오.
- 옵션 : 사용 시 ‘원본(原本)’ 등급 기술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의뢰 부여.
[‘공적치’가 500 상승합니다.]
전 회차에 비해 열 배나 증가한 히든 피스 특전 공적치가 제공되었으나 그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많고 많은 아이템 중 ‘한계 돌파 의뢰서’가 지급되었다는 말은.
“개인 정보.”
[개인 정보]
*기본 사항
- 설명 : 아윤
- 종족 : 키메라 ― 프레데터
- 칭호 : 인류 최초의 키메라(대표 칭호 변경▼)
*기술
- 오르그의 파괴 본능 [원본(原本) / 체화(體化) 진행 중 : 5/5 ]
“……!”
진화의 문턱에 도달한 녀석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텁―
나는 즉시 의뢰서를 사용하기 위하여 양끝단을 잡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무슨 미션이 나올는지는 미지수이나, 어떤 형식이든 공백기에 받아 놓아야 느긋하게 살펴보며 마땅한 대응책을 구상할 수 있기에 지금이 적기였다만.
[축하합니다!]
“음?”
처리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온통 물음표로 가려져 있었던 ‘지도 조각’이 나타난 탓이었다.
[「지도 조각」 획득에 필요한 모든 조건이 달성했습니다.]
[‘지도 조각’ 획득 조건 : 1. 공적치 ‘6,666’ 돌파 / 2. 1회 이상 ‘특별한 보상’ 획득 / 3. 순위 등극]
[‘지도 조각 : 0%’를 습득합니다.]
《지도 조각 : 0%》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진행 중에 숨겨진 조건을 충족하여 습득할 수 있는 조각난 지도. 허나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먼저 온전한 상태로 복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 옵션 : 봉인
- 복구 방법 : 1. ‘이벤트 : 절망의 파도’ 기간 내에 「침략군」의 혈액 흡수(솔져 500개체, 나이트 100개체) / 2. ?
느닷없이 생성된 ‘지도 조각’에 일순 당황스러웠으나, 우선 의뢰서 위로 겹쳐진 종이 쪼가리에 눈길을 주었다.
누가 일부러 모서리만 잘라 버린 듯 얼핏 봐서는 쓰레기로 착각할 모양새.
“…….”
스르륵 흘러내려 엄지손가락에 툭 걸려 멈추는 ‘지도 조각’을 잠깐 주시하다, 의뢰서를 돌돌 말아 품에 넣고선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녀석은 좀 더 차분하게 정리된 뒤에 다시 펼치기로 하고.
마침 갓 전쟁이 종료되어 땅바닥에 솔져급이건 나이트급이건 피가 질펀하니, 이 아까운 혈액이 겨울 한기에 얼어붙기 전에 ‘지도’ 복구부터 해 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여 지면에 조각을 가져다 대자.
툭―
촤아아아아악!!
살짝 일어난 파동에 반응한 핏물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와 종이 속으로 흡수된다.
[‘지도 조각’이 「침략군」의 혈액을 흡수 중입니다.]
[현재 복구율 : 1%… 3%… 8%…….]
거짓말 약간 보태 호수라고 칭해도 넉넉한 양에 엄청난 속도로 치솟는 복구율.
그게 일정 궤도를 넘어서자.
투둑―
툭―
끄트머리에 불과하던 쪼가리가 살아 있는 생물인 양 살살 진동하며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다. 꽤나 기괴한 장면이었는데, 비위가 강한 편이라 그런가. 그저 후다닥 해치우자는 일념 외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 오빠. 그게 뭐예요?”
“피를… 먹는 거야?”
근원석을 회수해 다가오던 한세정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지만.
나는 간략하게나마 상황을 설명해 주고 먼저 거점으로 들어가 있으라 지시했다.
더 정확하게는.
“가서 원앙 부대 사람들이 받았을 보상을 회수해.”
“타임 어택 히든 피스요?”
“어. 얘기는 해 뒀으니 반발하진 않을 거야. 물론 저항한다면 폭력을 행사해도 좋아. 환자 치료를 중단할 거라 협박해도 좋고.”
임시 동행인들이 가진 보물을 탈취하라 일렀다.
우리가 고생해서 얻은 특전. 그들에게 아량을 베풀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숙식과 무상 치료 서비스면 배려는 다 해 줬지.
원앙 부대의 본질이 암살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주의시키며 한세정들을 돌려보내고 얼마 후.
[복구율이 ‘50%’에 도달했습니다.]
선혈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복원되던 ‘지도’가 돌연 핏물을 밀어내며 다른 양식을 내놓으라 아우성친다.
[「지도 조각」의 두 번째 복구 방법이 해금되었습니다.]
[복구 방법 : 1. ‘이벤트 : 절망의 파도’ 기간 내에 「침략군」의 혈액 흡수(완료) / 2. 1등급 근원석 500개, 2등급 근원석 50개]
“근원석?”
이번에 먹여야 할 재료는 ‘근원석’이었다.
그것도.
1등급 기준으로 무려 3,000개나 되는 막대한 분량을 먹여야 했다.
“미친.”
30개, 300개도 아닌 3,000개라니.
이 ‘지도’ 안에 감춰져 있는 비밀이 대체 뭐길래 이리도 과한 가격을 지불하라는 걸까. 나는 연거푸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으며 발치에 가득한 근원석을 주워 들었다.
행운이 따른다면 스트레이트로 ‘환골탈태’까지 이룰 수 있는 자원을 포기하라니 영 내키지가 않았지만.
할 때는 해야 하는 법.
“그래. 어차피 13인 판정으로 근원석은 벌 만큼 벌었다. 특전도 추가 획득했으니 이 정도는 투자해도 남는 장사다.”
눈 딱 감고 절반이나 재현된 ‘지도’에 근원석을 먹여 나갔다.
부디.
해피 엔딩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