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군단의 습격 】
다음 날 아침.
저장해 두었던 스랄레오 냉동육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가져와 쌈 등의 채소와 곁들여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난 뒤.
“그 사람은 어때.”
나는 2층 한쪽에 꾸려 둔 병상으로 가서 한세정에게 환자 경과보고를 받았다.
뜻밖에도 정도윤의 상태는 그닥 좋지 않았다.
포션도 먹인 데다가 곽재우의 치유 마법에 한세정의 용독술이면 금방금방 쾌유하리라 예측했거늘.
“노력 중이긴 한데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얼마나?”
“모르겠어요. 용독술을 마스터 레벨로 올리면서 금방 해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예상보다 독기가 너무 강해서 막는 게 한계예요. 아무래도 나이트급에게 당한 모양이에요.”
“흐음.”
독이 말썽인가.
나이트급의 독기(毒氣)라.
“해독 포션을 사 먹여야 하나.”
“그게 제일 좋기는 할 텐데, 중위 해독 포션은 가격이…….”
“2등급으로 열 개였던가?”
“네.”
비싸다.
하급이 50개 전후였던 걸 감안하면 열 배로 뛴 금액.
구입이야 할 수는 있지만, 우리 일행도 아닌 고작 임시 동행인을 살리려 구매해 주기에는 심히 부담스러운 터라 당분간은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한세정의 말대로라면 어쨌든 독기를 저지하고 있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니까.
“저쪽은 손발 묶어 두고, 편지 남겨 둬.”
“네!”
정도윤의 치료는 자금적으로 여유로워졌을 때 재차 의논하기로 결론 짓고 1층으로 내려갔다.
슬슬.
[곧 2일 차 ‘이벤트 : 절망의 파도’가 개최됩니다.]
[남은 시간 : 1분 53초]
금일 자 ‘절망의 파도’가 밀려올 시간이었다.
“오셨어요?”
“준비는.”
“다 해 뒀어요.”
장포를 걸치며 입구 쪽으로 내려가자 신지유가 나를 반기며 수정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전반적인 그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좌우에 성벽을 세우고, 중앙으로 괴물들을 몰아 상대하는 식.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리고 ‘투척대’는 제 목책에 세워 두었으니, 이따가 거기로 이동하시면 돼요.”
오로지 저지선에 불과했던 나무 벽에 단상이 마련되었다는 것.
뭘 위한?
골렘.
열네 기나 보유한 골렘들을 전장에 흩뿌리기 위한 무대였다.
아직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체격은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수호병과 수호 기사만 봐도 10m에 이르는 초거체.
더욱이 그 육체를 구성하는 재료는 바위와 철이다.
곧.
‘무게’가 어마 무시하다는 뜻. 나는 그 무지막지한 중량을 하나의 무기로써 사용해 볼 요량이었다.
일명 ‘공중 폭격’이랄까.
열네 기를 한꺼번에 투하해 봉인 해제 주문을 외우면… 적어도 백여 마리는 단숨에 증발하리라.
‘짜릿하겠어.’
벌써부터 그려지는 참혹한 미래를 상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1분대로 들어선 시간을 체크하며 힐끔 원앙 부대원들을 바라봤다.
“부대장, 우리 진짜 괜찮은 거요?”
“무기도 빼앗기고, 갑옷도 없고……. 이러다 뚫리면 개죽음인데.”
“무기라도 돌려 달라고 해 볼까요?”
구석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섯 남자는 옷가지만 걸친 자신들의 행색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우리 실력이 어떤지 모르거니와, 이미 파도에 삼켜져 동료 대부분을 잃은 전적이 있는 탓에 일이 잘못됐을 시에 도망이라도 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비는 갖추고 싶은 듯했다.
물론 거절이다.
전투 중엔 드라이어드를 빼놓지 못하는 만큼, 마음 같아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유 능력’과 ‘기술’의 발동을 제어하는 구속구를 채우고 싶었지만 참았다.
헌데 무기를 돌려주라고?
임시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다. 몇 분만 지나면 본인들의 생각이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될 테고.
“오빠!”
“왔어? 그럼 가자.”
“네!”
“예.”
“스읍, 후. 오늘도 잘해 봐요. 우리!”
“언니도 몸조심하세요. 지운이도 항상 주변 신경 잘 쓰고.”
“난 걱정 마셔.”
한세정이 합류하자 거침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크리스마스 초읽기에 돌입한 12월 말미라 한층 날카로워진 칼바람을 뚫고서 신지유가 설치해 둔 목책 안쪽의 계단을 밟고 성벽을 올랐다.
투척 거리를 최대치로 늘리려 거의 15m쯤 되는 높이.
발을 헛디디지 말라고 배려해 둔 지지대를 잡고 도착한 정상에서 지상을 굽어보니, 모닥불에 팝콘만 있으면 싸움 구경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다.
[남은 시간 : 0분 0초]
[때가 도래했습니다.]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1km 내’에 존재하는 생존자를 탐색합니다.]
[…완료!]
[검색된 인원 : 열세 명]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300분]
자리에 안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뜨는 메시지들.
그런데.
일자가 바뀌어서인지.
[더불어 시작 전 2일 차에 적용된 「설정」에 대하여 알려 드립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에 한하여 「전체 추출」 기능이 도입됩니다.]
[파도 방어 후 「전체 추출」 기능 사용 시, 자신이 사냥한 모든 대상의 근원석을 일거에 추출하여 정면으로 소환합니다.]
[또한 ‘조건 : ?’을 통해 「지도 조각」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신체 능력이 17%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기술 위력이 13%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특성 효력이 8% 상승합니다.]
[위와 같이 변화된 항목을 참고하여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살아남으십시오.]
“음.”
쭉 읽어 본 결과 우리가 눈여겨볼 단락은 ‘전체 추출’ 정도였다.
‘지도 조각’은 충족 요건이 미공개라 현재로서는 저런 게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이고, 그 밖에 나머지는 괴물들의 능력 강화라.
[지금부터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합니다.]
“온다.”
대략적으로만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허리춤에 걸려 있던 십이지신(十二支神)을 꺼내 쥐었다.
‘순간 회귀’를 걸지 않은 평소에도 큼지막한 덕택에 한 손에 움켜쥔 골렘들.
각양각색의 형태를 지닌 녀석들을 들고 있으니 가라앉혀 두었던 기대감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쿠구구구궁―!!
“인첸트―저주 방어.”
우우우웅!
[‘저주 방어’가 적용되었습니다.]
[10분간 ‘저주’ 저항력이 소폭 향상됩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서서히 증폭되는 행진 소리에 조이령이 버프를 걸어 준다.
또 있다.
“대지의 혼.”
후우우욱―
[‘대지의 혼’이 당신의 기운을 북돋는 중입니다.]
[자연 재생 능력이 소폭 향상됩니다.]
다들 초인화 작업 과정에서 근원석을 수백 개씩 먹어 치우며 최악의 습득 확률을 뚫고 기술을 몇 개씩 획득했는데, 개중 유일하게 버프류를 배운 신지유의 작품이었다.
그 따스한 빛이 체내에 깃드는 찰나.
“크워어어어어어어!!”
거친 하울링이 울려 퍼지더니.
“크허어엉!”
“아우우우우우!!”
“그어어어어!!”
쿠우웅!
쿠구구구구궁!!
드디어 모습을 선보인 괴물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울부짖으며 거점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대지를 시커멓게 물들이는 수많은 침략자들.
“천 마리…는 훌쩍 넘겠죠?”
“아마도.”
6인이 9백 마리였으니 13인이면 2천은 될 거다.
어쩌면 3천을 넘을지도. 혹은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둬서 나이트급의 비율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을 수도 있고.
뭐.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붙어 보면 알겠지.
[스트랭스]
우득―
그러니.
“스트랭스.”
“스트랭스.”
우드득―
우득―
일단 던져 보자고.
“하나, 둘, 셋!”
후우우우우욱!!
후우욱!
“봉인 해제.”
“봉인 해제.”
“봉인 해제.”
번쩍―!!
콰아아아아아앙!!
* * *
유성이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긴 꼬리를 새기는 찬란한 연출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절로 뭉클하게 만든다.
허나.
그 아름다움은 수천, 수만 킬로미터 밖에서 감상하고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것. 막상 운석이 추락한 장소에 서면 미적 감동 따윈 일절 떠올리지 못한다.
직격당한 공간의 모든 게 불타 소멸되기 때문이다.
흡사 지금의 장면처럼.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일시에 낙하해 지면을 뒤흔들며 일어선 열네 기의 골렘 부대.
그 장엄한 등장에 전장이 송두리째 침묵으로 짓눌린다. 이 풍경을 꿈꾸며 주문을 외웠던 우리도, 폭력 앞에 무참하게 박살 난 괴물들도 모두.
설마.
[현재 나의 공적치 : 1,726(산술법 확인▼)]
삑!
현재 나의 공적치 : 2,469(산술법 확인▼)]
소환 한 번으로 공적치 700점이 들어올 거라고는 누구도도 몰랐기에.
“…….”
말이 안 나온다.
그러나.
구태여 내가 뭘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으워어어어어어어!!”
“으워어어어어!!”
쿵!
쿠우웅!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골렘들이 알아서 함성을 내지르며 투쟁을 개시했으니까.
복싱으로 괴물들을 패는 곽재우의 수호병, 갑주를 차려입고 대검을 휘두르며 돌격하는 한세정의 수호 기사.
그리고.
“별걸… 다 들고 있네.”
바람결에 흩어지는 누군가의 읊조림대로.
검, 도, 창, 활 등.
각자 다른 무구를 착용하고서 군단의 중심을 파괴하는 십이지신(十二支神).
‘프레데터’인 제 주인을 닮아서인가.
인간의 몸체에 머리와 손발이 동물의 육체로 이루어져 있어 열두 마리의 키메라로 보이기도 하는 골렘들은 굉장히 부드럽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 주며 세상을 뛰놀았다.
사방에 나이트급이 바글바글했으나 무아지경이었다.
막으면 막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휩쓸어 버리는데 이거야 원, 애들 싸움에 어른이 난입한 기분.
정말이지.
신(神)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서였을까.
“크워어어어어!!”
“키에에에엑!!”
앞만 보고 질주하던 괴물들이 돌진을 멈추고 여러 갈래로 쪼개져 골렘들부터 노렸다. 지휘관이라는 ‘커멘더’가 출현한 건가 싶을 정도로 재빠른 분산이었다.
아마.
골렘을 부수지 못하면 패배할 거란 본능이 가르쳐 준 행동이었을 것이다.
“가자.”
그 때문에 더 지켜보지 못하고 진군 명령을 내려야 했다.
골렘들이 대단한 건 맞지만, 수천 단위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으면 설령 금강석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조각조각 부서질 테니.
한 기도 잃어선 안 된다.
하나하나가 초인화된 생존자와 비견되는 무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배신할 염려가 1도 없는 충직한 병사들. 소수 정예의 취약점을 전부 커버해 주는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불태우리라.
나와 한세정들은 그러한 각오로 적진을 파고들어 갔다.
[마력 유체]
[가속]
[일기당천]
[스트랭스]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돌진]
[오르그의 파괴 본능]
[강격]
마력은 아끼지 않았다.
기왕이면.
“10분 안에 끝내 보자.”
“네!”
“네!”
“네!”
“네!”
“네!”
“네!”
“네!”
10분이 흐르기 전에 이 전쟁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다.
일자가 바뀐 덕분에 오늘 자 타임 어택 특전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후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