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84위 : 곽재우]
나를 포함해 우리가 화면으로 곽재우의 이름을 보았을 때.
“됐다!”
“와아아아!”
여기저기서 축하와 환호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가 84위에 랭크됨으로써 확실하게 보장됐으니까.
우리 일행 내에…….
적어도 세 명의 ‘랭커’가 존재한다는 게.
앞서 공표된 공적치 439의 곽재우와 두 번째로 공적치가 높은 671의 한세정.
마지막으로.
[현재 나의 공적치 : 1,726(산술법 확인▼)]
나.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1,700을 넘은 나야 랭킹에 들어가는 게 제법 당연시되었으나, 한세정과 곽재우까지 성공할 줄은 몰랐기에.
특히 10분 타임 어택 히든 피스를 먹어서야 겨우 400대로 올라온 곽재우는 90위 후반도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헌데.
84위라.
‘…다른 사람들의 공적치가 내 생각보다 낮은 건가.’
신기하네.
백 명 단위로만 집단을 꾸렸어도 파도가 한 차례 몰아칠 때마다 기본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공격해 왔을 것이고, 거기서 적절하게만 활약해 줘도 5~6백쯤은 무난히 달성했을진대.
아니.
오히려 모여 있으면 공적치 확보하기가 더 어려워지려나.
처음이야 어찌어찌 버틴다 한들 ‘안전지대’ 혹은 그에 준하는 방어 수단이 없다면… 결국, 세 번에 걸친 파도에 잡아먹혀 버렸을 테니.
필시 그런 곳도 나왔을 것이다.
하도 많이 몰려온 탓에 이전 파도를 미처 다 막지 못했는데 다음 파도가 시작되어 이중, 삼중으로 파도가 겹쳐 해일이 돼 버린 최악의 전장이.
또는.
반대 집단 규모가 큰 덕에 전황은 좋았을지언정 그만큼 공적치를 나눠 가지면서 외려 평균값이 낮아지기도 했을 터.
즉.
‘인원’, ‘안전지대’, ‘무력’.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춰야만 순위에 드는 게 가능하단 소리였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 보고 나서야 비로소 한세정과 곽재우가 비교적 적은 공적치에도 랭킹에 오를 수 있었는지 납득한 나는 한결 홀가분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홀로 사색에 빠져 있는 사이 60위권에 진입한 발표식.
[69위 : 김동국]
[68위 : 이겨울]
[67위 : 선미리내]
전 세계가 일시에 치르는 이벤트이지만, 랭킹 시스템은 국가별로 개별 진행되는지 계속해서 한국인들만 등장하는 스크린.
일종의 서버 개념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하던 찰나.
[63위 : 한세정]
“아!”
우리의 면전에 마침내 한세정의 방명이 나타났다.
무척 아쉽게도 그녀의 성적은 63위였다.
곽재우 이후로 꽤 흘렀음에도 나오지 않기에 최대한 늦게 나오길… 기왕이면 50위, 40위까지 돌파해 줬으면 하고 기원하는 중이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애당초 내가 공적치 1등을 노리려고 출몰했던 80여 마리의 나이트급을 독식해 버린 터라 한세정으로서는 63위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매우 대단한 성과였다.
때문에.
“축하― 축하한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그 외에 기묘한 감정이 뒤섞여 뭐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겸연쩍은 인사를 주고받은 후 벌써 30위권으로 돌입한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34위 : 고휘]
[33위 : 천주용]
[32위 : 김사일]
[21위 : 최성호]
지나고, 또 지나 기어이 20위권에 당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명되지 않는 나.
이쯤 되니 차츰차츰 조여 오는 긴장감에 몸이 뻣뻣해졌다. 덤덤하게 있으려 해 보지만, 내 의사와는 관계없는 무의식적인 신체 반응이었다.
하여.
스으윽―
스윽―
괜스레 어깨를 돌리거나 목 근육을 주무르며 굳은 육체를 풀어 주는데.
[17위 : 황선아]
‘황선아?’
[15위 : 유하늘]
문득 익숙한 성함이 보였다.
황선아와 유하늘.
성십자가 클랜의 간부진이었다.
전쟁 당시 제대로 통성명을 한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저 둘만큼은 정세가 불리해질 무렵 클랜원들이 ‘선아야!’, ‘하늘아!’ 따위를 남발했던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악에 받쳐서 되돌아가던 뒷모습까지도.
‘동료도 내팽개치고 도망치더니, 수련을 했나 보네.’
나란히 최상위 등수에 오른 걸 보니.
허면.
저 언저리엔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도 있겠구나.
끝끝내 ‘마스터’라고만 불려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 불구 신세를 면했다면 실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못해도 10위권에는 안착했으리라.
그나저나.
[11위 : 장한중]
[10위 : 정하연]
[9위 : 송무식]
‘벌써 9위인데…….’
아직도 없다.
내 이름이.
[8위 : 김주형]
8위에도.
[7위 : 양위강]
7위에도.
6위, 5위, 4위.
심지어.
[3위 : 홍주석]
3위에도.
시스템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단 두 자리.
꿀꺽―
옆에서 누군가 날 대신해 침을 삼킨다.
꽈아아아아악!!
두 손을 모아 꽉 쥔 채로 반투명한 순위 창을 뚫어지게 노려보는… 한세정이었다.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아씨 성의 윤이라는 외자를 가진 남자의 함자가 가장 늦게 공개되기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제발!”
[축하합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의 1일 차 순위 발표식을 종료합니다.]
[각자 등수에 맞는 특별한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이를 발판 삼아 앞으로의 시련 또한 훌륭히 이겨 내시길 기원하며.]
[끝으로…….]
그 간절함 덕택인지.
[2위 : 최요셉]
[다시 한번 순위 발표식에서 「1위」에 오르신 〈생존자 : 아윤〉 님의 업적에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나는 정상의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 * *
“까 보겠습니다.”
곽재우가 나름 숨을 크게 내쉬며 사람 머리통만 한 상자의 포장지를 뜯는다.
금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거리는 끈과 제주도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르른 종이를 벗겨 내자.
후화하하하학!!
빛에 휘감기는 박스.
그 찬란한 광휘가 사그라졌을 때.
턱―
바닥에 자그마한 뭔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략 10cm 남짓한 신장을 지닌.
“로봇?”
“…골렘, 이라고 하는데요.”
“골렘?”
‘골렘’이었다.
《골렘 84호》
- 등급 : 특별
- 분류 : 소환수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8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보상입니다. 평소에는 소형화 상태로 되어 있으며, 정해진 주문을 외울 시 주인을 수호하는 ‘수호병’으로서의 진정한 면모가 발현됩니다.
- 옵션 : 주문 ‘봉인 해제’ 사용 가능 / 신체 능력치 7% 상승 / 소환 +15(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 주인 각인
“…….”
이 조그마한 게 골렘이라니.
어린애들 장난감 로봇같이 생겨서 영 미덥지 못한 형상이라 무려 ‘특별’ 등급임에도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주인인 곽재우 본인도 그러한 듯.
“…한번 써 보겠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골렘 84호’를 쥐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거점 밖으로 나간다. 하도 미심쩍으니 바로 시험해 보려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곽재우의 뒤를 쫓았다.
등급이 등급인 만큼 분명 뛰어날 터이니, 그 실체가 어떠할지 구경해 보고 싶었기에. 해서 막 문을 지나치던 순간.
“봉인 해제.”
곽재우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리더니.
번쩍!
이내 공중에서 화려한 섬광과 함께.
쿠우우우웅!
쿠구구구구구궁!
“……?!”
“뭐, 뭐야?”
“지진? 지진 난 거 아냐?!”
“지운아! 엎드려!”
“으아아아아!”
조이령의 말처럼 지진이라도 발생한 양 느닷없이 지축이 뒤흔들렸다.
물론.
진짜 지진은 아니었다.
그저.
쿠우웅!
쿵!
“그어어어어어어!!”
콰아아아앙!!
우리 앞에 수백 개의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족히 10m에 달하는 참된 거인의 본모습이 드러났을 뿐이니까.
“와아…….”
신지운에게서 억눌린 탄성이 튀어나온다.
세상이 떠나가라 거칠게 포효하고서 곽재우의 옆으로 걸어와 척 하고 한쪽 무릎을 꿇는데, 그 장면이 주는 골렘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한참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으니.
“…전투태세.”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띤 곽재우가 팔을 쭉 뻗으며 지시를 내린다.
마치.
더 재미난 볼거리를 선사해 주겠다는 듯이.
“그어어어어어어!”
쿵―
명령이 떨어지자 벌떡 기립해 양발을 어깨너비만치 빼서 대각으로 벌리고 왼손은 턱 밑에, 오른손은 관자놀이에 착 붙이는 골렘.
“…복싱?”
그래.
골렘이 취한 자세는 딱 복서가 싸우기 전에 하는 준비 동작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무지막지한 무게감으로 상대를 짓뭉개는 게 전부일 거라 여겼던 골렘은 정형화된 무술을 구사할 줄 아는 지성적인 녀석이었다.
그것도.
후우우욱―
후우욱!
매우 재빠른 몸놀림으로.
이 황당하면서도 경이로운 결과에 한세정이 그대로 주저앉아 ‘63위 보상 선물 상자’를 개봉한다.
“저, 저도 열어 볼게요……!”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 듯했다.
84위보다 20계단이나 높은 63위의 보상품은 얼마나 위대할는지.
푸화하하하하학!!
턱!
“아아!”
흥분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뜯어 재낀 안쪽에는 곽재우와 같은 골렘이 들어 있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얘, 얘는 무장이 되어 있어요!”
“무장 상태라고?”
한세정의 골렘은 갑옷에 검을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수호 기사! 수호 기사래요!”
한세정에게 주어진 골렘은 수호‘병(兵)’이 아니라 수호‘기사(騎士)’였다.
* * *
“으음…….”
스윽―
스윽―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다시 모인 자리.
한세정들의 눈길이 내 손에 집중된다.
‘1위 보상 선물 상자’.
겉포장부터가 각종 보석을 박아 넣어 사치스러움의 끝을 달리는 이 박스를 얼른 개봉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당장 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찢어발길 기세.
이에.
“크흠, 열어 보자.”
나는 조심스럽게 밀봉된 포장지를 끌렀다.
스르르륵―
푸화하하하학!!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는 빛무리.
그 휘광이 번뜩였다 사라졌을 때.
[‘1위 보상 선물 상자’를 개봉합니다.]
[축하합니다.]
[‘골렘 : No_십이지신’을 습득합니다.]
《골렘 : No_십이지신》
- 등급 : 유일
- 분류 : 소환수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 순위 발표식에서 누구보다 높은 성적을 기록한 당신에게 지급된, 유일하게 네이밍이 부여된 골렘 세트입니다.
평소에는 각자의 모티브가 되는 동물의 상태로 소형화되어 있으며, 정해진 주문을 외울 시 저마다의 능력으로 주인을 수호하고 적을 참살하는 ‘열두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서의 진정한 면모가 발현됩니다.
- 옵션 : 주문 ‘봉인 해제’ 사용 가능 / 신체 능력치 17% 상승 / 소환 +33(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 협동 +25(해당 능력치 미보유 시, 아이템을 소유하는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 /주인 각인
열두 마리의 동물.
아니.
열둘의 ‘신(神)’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