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불청객? 】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했다.
‘절망의 파도, 그건 정말 절망 그 자체였어. 간신히 희망을 꿈꾸며 딛고 일어선 인류를 다시금 나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으니까.’
해금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으로 기어이 발발한 ‘절망의 파도’.
그것은 정녕 항거 불능한 재앙이었다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괴물들로 죽고 다친 자가 족히 수십만은 넘어갈 테니.
헌데.
몹시 기이하게도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다수의 평가에 대해 부정적인, 나아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어쩌면 수십만, 수백만이 죽고 다쳤을지 모를 재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파도……. 글쎄, 내가 보기엔 그거야말로 희망의 불씨였어. 아니지. 희망의 불씨는 이미 피워져 있었으니, 그 자그마한 불씨를 거대하게 키워 준 장작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장담하건대 그건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이었어.’
라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절대다수의 생각과 이리도 다른 걸까. 나는 그 답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에 알게 되었다.
‘뭐? 히든 피스?’
‘그것뿐인 줄 알아? 히든 피스는 그냥 덤이야, 덤. 진정한 보물은 공적치라고.’
우리가 재앙이라고만 여겼던 파도 뒤에 감춰진 진실이 있었다는 걸.
‘100명, 고작 일백 명만이 받을 수 있는 탓에 다들 잘 모르고 있지만… 그게 진정한 보물이야. 당장 네 ‘아래’를 보라고.’
‘아래?’
‘그래, 아래.’
‘그어어어어어어어!!’
쿠우!
쿵!
‘……!! 뭐, 뭐야!’
‘워워, 너무 놀라지 말라고. 적어도 아군에게는 착한 아, 이거든. 그치? 렘아?’
‘렘……?’
‘아, 애칭이야, 애칭. 공식 명칭이 ‘골렘 87호’인데 그렇게 부르자니 너무 정이 없어 보이잖아.’
‘골렘…이라고?’
‘신기하지? 이게 바로 공적치 순위 보상 ‘수호병’이야. 혼자서도 2등급 개체 열댓 마리는 그냥 찢어 죽이는 훌륭한 병사지. 참고로 이게 겨우 87위 보상이라니 대단하지 않아?’
‘…….’
―‘절망의 파도’에 관한 인터뷰 中 발췌
* * *
“내가 왼쪽으로 간다.”
일촉즉발의 순간.
나는 한마디를 남기고 지면을 박차며 파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뉘엿뉘엿 자취를 감춰 가는 태양의 빈자리를 채우며 지상을 물들인 어둠 때문인지 유난히 밝게 빛나는 듯한 형형색색의 안광들을 마주하며 도약.
쿠웅!
휘우우우욱!!
별다른 발판이 없었음에도 단박에 7~8m를 날아올라.
“키에에에에엑!!”
“크워어어어억!!”
어서 내려와 달라 열광하는 적들의 중앙으로 선물을 들고 거침없이 낙하했다.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후우우우욱―
쿵!
쿠구구구구구구궁!!
시원스레 갈라지는 대지.
“크에에엑!!”
“끼에엑!”
쿠웅!
콰직!
콰드드득―!
손수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괴물들.
그 반응에 힘입어 더 많은 걸 꺼내놓았다.
[스트랭스]
[가속]
[마력 유체]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몸소 포장지를 뜯어서.
[돌진]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우우우웅―!!
“자.”
금가루를 대신할 푸른 빛무리를 뿌려 시원하게 쾌척했다.
탁!
콰과과과과광!!
손끝에 무언가 닿았음을 감지한 찰나에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 막대한 광휘를 흩뿌리며 반경 2~30m에 이르는 공간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킨다.
도망? 회피? 방어? 그런 자애로운 엔딩은 단언컨대 없었다.
오로지 죽음.
혹은 소멸뿐이었다.
그나마 남긴 게 있다면.
[현재 나의 공적치 : 896(산술법 확인▼)]
금세 900을 바라보는 공적치가 놈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벌써 이렇게나 많이 모였나.’
나는 시야 한쪽에 출력된 메시지를 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고작 여섯 명이서 거의 2천 마리가량 되는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어서인지 공적치 쌓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 스피드면 3차 파도를 죄다 해치울 즈음에는 1,400에서 1,500대도 노려 볼 수 있을 터.
‘100명까지만 공개한다고 했었나.’
공적치가 어마어마하게 축적될 게 확실해지자 문득 ‘순위 시스템’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랭킹 시스템을 만든 까닭이 무엇일까.
단순히 성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음.
왠지 그 정도로 그칠 것 같진 않다.
그저 추측이지만.
소요 시간 10분 미만으로 파도를 막아 냈을 시 비범 등급의 아이템을 선사하는 히든 피스까지 마련해 둔 걸 보면… 분명 순위 시스템에도 그에 걸맞은 보상이 추가적으로 숨겨져 있겠지.
‘해 봐야겠어.’
뭘 줄진 알 수 없으나.
지금 추세로 가면 100위권 내에는 너끈히 들어갈 테니 한번 먹어 보자.
기왕에 하는 사냥.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 가야지.
[베어 내기]
후우우욱!
촤아아악!!
혼자만의 미션을 가슴에 새기며 파고든 좌중간.
한세정들에게 말한 대로 왼편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투르바의 포효]
[발록의 투기]
탁―
“크아아아아!!”
[돌진]
쿠우웅!
한 차례 포효함과 동시에 투기의 발산.
이어진 돌격에 괴물들이 무더기로 쓸려 나간다.
종종 반항하는 녀석이 나오기는 했다.
2차 파도에 비해서 훨씬 강력해진 만큼 나이트(2등급 개체)급의 출몰도 기존보다 열 배 이상 증가한 터라.
“크르하!”
“무우우우우우!!”
화르르르륵―!!
후화하학!
쩌저저저적!!
사방에서 쏟아지는 온갖 기술들은 나로서도 경시할 수 없었다.
저걸 다 두들겨 맞으면…
맨살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이다.
비록 괴물의 육체를 갖다 붙였다지만, 항상 100%를 유지하는 ‘인간성’처럼 인간이길 포기한 적은 없다.
다시 말해서.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고로.
[순간 회귀 : 스랄레오의 골갑]
[마력 유체]
[마력 방패]
최르르르르륵―!
방비해야 했다.
콰아앙!
쾅!
옷 위로 골갑을 씌우고, 그 위에 마력을 덮은 후 공중에 방패까지 띄우자 치솟던 불길과 살갗을 얼리려던 얼음 따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던 것들이.
툭―
퍼석!
휘우우욱―
적장 몸에 닿자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맥없이 바스러진다.
당연히.
대미지도 없었다.
충격은 고사하고 갑옷에 흠집조차 나지 않았는데 피해가 생길 리 만무하지. 놈들의 저항은 문자 그대로 ‘반항’이었다. 희망한다면 언제든 제압 가능한 무의미한 항거.
그게 이 전장에 뛰어든 괴물들이 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앙!!
[축하합니다!]
“음?”
제 분수도 모르고 ‘프레데터’에게 거역한 놈들을 응징해 주던 차에 새로운 축하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타이밍에 뭘까 싶어 슬쩍 확인한 내용.
그 안에는.
[당신의 ‘공적치’가 「1,000」을 돌파했습니다.]
[현재 나의 공적치 : 1,026(산술법 확인▼)]
[대단한 업적을 세운 당신에게 ‘특별한 보상’을 선물합니다.]
[해당 보상은 최대 ‘999명’에게만 주어집니다.]
[‘공적치’를 쌓는 동안 당신이 선보인 〈전투 스타일〉에 맞춰 보상을 선정 중입니다.]
[…완료!]
[보상으로 ‘기술 : 일기당천’을 습득합니다.]
[투기가 10 상승합니다.]
“…기술?!”
놀랍게도 ‘기술’ 지급 내역이 적혀 있었다.
《기술 : 일기당천》
- 등급 : 특수(特殊)
- 단계 : ―
- 설명 : 「이벤트 : 절망의 파도」에 맞서 싸워 누구보다 빨리 공적치 ‘1,000’을 돌파한 전사에게 선물한 보상용 기술입니다.
당신이 선보인 〈전투 스타일〉에 맞춰 개발된 것으로, 발동 시 5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향상되어 능히 일천의 적병을 벨 장수의 육체로 변화합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에 내재된 두 번째 히든 피스의 등장이었다.
“허.”
노리고야 있었지만, 설마 이리도 빨리 보게 될 줄이야.
나는 큼지막한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씨익―
살짝쿵 웃었다.
준다는데 기분 좋게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특수 등급의 기술이라 위력이 고정된 타입이라는 게 약간 아쉽기는 하나, 어차피 공짜로 받은 거.
그런 데다가.
덕분에 한 가지 좋은 정보도 얻었다.
“999명. 그래도 1,000등 안에는 들었다는 건가.”
랭킹을 노리는 만큼 내 성적이 순위권에 인접해 있는지 궁금했는데, 시스템의 설명으로 그 궁금증이 소소하게나마 해결된 것이다.
아무리 낮아도 999등.
그 말인즉슨.
앞으로 998명만 더 제치면 목표로 두고 있는 공적치 1등을 노려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좋아.”
전신에 활기가 돋는다.
마치.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던 마라토너가 결승전을 발견한 듯한 감정으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마침 훈련용 허수아비도 많으니 지금이 신(新) 기술의 위력을 시험해 볼 적기였다.
[일기당천]
슈우우우우우욱!!
주문을 외우자 온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간다.
조이령의 ‘악의 징벌자’, 곽재우의 ‘천강홍의장군’과 흡사한.
신비로우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수가 내 어깨를 휘감고 있었다.
그 형상화가 끝났을 무렵.
[‘기술 : 일기당천’의 효과로 5분간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우득―
우드드득!
짤막한 문구와 함께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식을 통해 막 진화를 마쳤을 때나 겪을 수 있는 가히 폭발적인 기운이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며.
그 직후 나는 직감했다.
“아.”
내가 자살을 단행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패배하려야 패배할 수 없다는 걸.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 * *
“케에에에에엑!!”
“이런 X!”
콰직!
찰진 욕설을 내뱉으며 휘둘러진 칼날에 침을 뚝뚝 흘리며 엉겨 붙던 괴물이 대가리가 날아간 채로 바닥을 뒹군다.
허나.
“젠장……!”
그럼에도 유려한 검술을 선보인 남자의 표정은 변함없이 찡그려진 상태였다.
미간이 구겨진 그의 곁에는 괴물들의 시체뿐 아니라.
“형석아…….”
“종호 형, 종호 형!”
피로 물든 동료들의 시신도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니까.
그러니.
승전을 기뻐할 수도, 승리에 환호할 수도 없었다.
단지.
“…대원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여라. 화장하고 간다.”
부디 편안한 곳으로 떠나갔기를 기원하며 작게라도 추모식을 열어 주는 게 전부였다.
화르르륵―!
화르륵!
곧.
한겨울의 냉기를 몰아내는 화마가 인근을 뒤덮는다.
“…반드시 죽여 주마.”
남자는 그 애달픈 불꽃을 뇌리에 각인하며 누군가에게 피의 복수를 약속했다.
자신과.
대원들을 이곳으로 오게 한 존재, 한 갈래 만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모자랄 개자식에게.
결단코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해 주리라고.
몇 번이고 되뇌며 칼자루를 굳게 쥐고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