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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104화 (104/232)

104화

* * *

푹푹 빠지는 눈밭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동쪽으로 가는 길.

대충 1km쯤 지나왔을까 할 무렵.

찌릿―

찌릿―

기감을 자극하는 신호가 뇌리를 울렸다.

‘살기?’

살갗을 찌르는 날카로운 기운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도 계속해서 쭉쭉 전진했다.

일부러 허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떤 놈이 날 공격하려고 하는지 알아보고자.

근래에 주변에서 사람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니 괴물일 확률이 농후하다만, 혹여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염두하에 천천히.

‘세 시 방향.’

찌릿!

찌릿!

허술한 생존자인 척 가면을 쓰고 살기가 삐져나오는 발생지에 근접하던 찰나.

퍽!

우측 방면에 한가득 쌓여 있던 눈더미가 폭발하며 그 안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괴물.

뱀의 몸체에 고양이의 상체 두 개가 절묘하게 교접된 괴물 한 마리가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쌍두사?’

아니.

쌍두묘?

무어라 명확하게 명명해야 할지 모를 괴생명체의 등장에 난 흥미로운 눈으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형태 변화]

[마력 권갑화]

우우우웅―!

푸른빛의 완갑이 씌워진 팔뚝이 짧게 선을 그으며 쌍두 묘사의 왼쪽 머리통을 두들긴다.

후우우욱!

콰직!

괴력을 버티지 못하고 으깨지는 두개골.

진녹색 핏물이 퍽 하고 터져 박살 나는 사이 가슴 언저리까지 무사히 날아온 오른쪽 머리가 기다란 송곳니를 쩍 벌리며 내 목덜미를 노린다.

내.

[순간 회귀 : 스랄레오의 골갑]

우우우우우―

촤아아악!

콱!

갑옷을.

“크으에에에엑!!”

참 가엽게도 상반신을 감싼 백색의 갑주는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놈은 그 현실이 분한지 안간힘을 쓰며 턱을 다물어 보려 했으나, 117의 ‘내구’가 빚어낸 골갑(骨甲)은 굳건했다.

터업!

“크에엑―”

우득!

그게 끝이었다.

쇄골 언저리에 매달려 아등바등거리는 걸 발록의 왼팔로 으깨 근원석으로 변환하고서 찐뜩하게 엉겨 붙은 피와 살점을 닦아 내길 잠시.

멈췄던 걸음을 재촉하려던 나는 외려 뒤로 물러나야 했다.

사방에서.

퍼억!

퍽!

퍽!

“키에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이런.”

족히 쉰 마리 이상의 괴물들이 하늘로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쌍두 묘사 떼였다.

[‘복수의 피’가 묻은 상태입니다.]

원인은 피.

다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핏방울 몇 점이 저놈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그득하게 누적된 눈을 보며 오늘 수색이 순탄치 않겠구나 예상은 했거늘.

“후.”

꾸우우욱―

콰앙!

사태 파악이 끝남과 한숨을 내쉰 나는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반동을 발판 삼아 힘차게 튀어 올랐다.

지축을 뒤흔들며 도약하는 내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애꿎은 지면을 헤집는 쌍두 묘사들.

파바바바바박―!!

그 여파로 난장판이 된 지상.

[스트랭스]

[오르그의 파괴 본능]

난 그 중심으로 되돌아가며 파괴력을 증폭시킨 오른팔을 내리찍었다.

후우우우욱―

콰아앙!!

한바탕 일어나는 폭발.

전 방위로 퍼져 나간 마력이 태풍을 동반하며 괴물이고 지형이고 가리지 않고 일대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다.

그 흔한 비명도 없었다.

20m에 약간 못 미치는 크레이터만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을 뿐이라.

“…….”

도리어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쉰 마리였다.

50.

웬만한 생존자들이었다면 마주친 즉시 도망만이 정답이라 외쳤을 정도의 군세가 고작 주먹질 한 번에 소멸되다니.

성십자가 클랜과의 전쟁 막바지에서도 그랬지만…….

확실히 초인(超人)의 단계에 들어선 이후로 ‘선’이라는 게 흐릿해진 느낌.

“…이래서야 2등급이 떼로 몰려와도 상관없겠어.”

나는 당혹스러울 지경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근원석을 수거했다.

본래 ‘추출 작업’이란 사냥한 대상의 시체에 주문을 걸어 근원석으로 교환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그런 규칙이 정해진 까닭은 시체를 활용하는 능력 때문이다.

가령.

황 노인의 키메라 재료 확보라든가 하는 것들. 하지만 때때로 전투를 치르다 보면 광범위한 폭발이나 대상을 소각해 버리는 화염 계열 따위에 의해 살점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경우도 파다하다.

그래서인지 시스템적으로 상대가 사멸해 버리면 별도의 추출 작업을 거치지 않더라도 근원석이 드랍되도록 설정된 터라.

덕분에 난 괴물들이 모조리 소멸했음에도 별문제 없이 51개의 근원석을 주머니에 챙길 수 있었다.

“쉰한 개, 애들이 좋아하겠어.”

그 기분 좋은 성과에 신씨 남매를 떠올리며 두툼해진 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단 나는 헝클어진 옷매무시를 정리하고서 중단되었던 여행길을 재개했다.

* * *

‘울티루스’라는 이름의 쌍두 묘사들을 처리하고 쭉쭉 나아가는 탐색.

이 근방은 울티루스들의 영역이었을까?

크게 전투를 벌이고 나니 고요해진 주위. 이렇다 할 흔적이나 수상한 낌새는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툭―

투둑―

설상가상으로 스멀스멀 눈이 내리며 기상마저 악화하는 중.

“오늘도 꽝인가.”

다른 건 몰라도.

날씨가 안 받쳐 주면 수색이 어려워지는 탓에 나는 일단 추이를 좀 살필 겸 근처 건물로 들어갔다.

10여 분 정도 대기해 보고 더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복귀할 요량이었다.

칙―

치익―

칙!

화르르르륵!

“땔감으로 쓸 만한 게… 아. 저기 있네.”

주인 없는 상가에 자리를 잡고서 피우는 모닥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무 책상을 부숴 정(井)자로 쌓고 공처럼 꾸긴 종이에 불을 붙이자 오래지 않아 자그만 캠프파이어가 완성됐다.

문이 꼭 닫혀 있어 내부가 젖지 않은 덕택이었다.

타닥―

탁―

불씨로 몸을 녹이며 창밖으로 구경하는 풍경.

휘이이이이이잉―!!

좋지 않다.

그새 바람까지 거세져 연신 덜컹거리는 창문. 깨질 것처럼 들썩이는 유리를 응시하던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켜보기로 마음먹길 이제 겨우 2분여.

헌데.

감이 썩 별로였다.

왜인지.

이대로 몇 분만 더 흐르면 대설 특보라도 발령될 것 같은―

“…이 아니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인상을 찌푸리고 채 10여 초 만에 온 세계가 휘몰아치는 대설로 인해 하얗게 물들어 간다. 맑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폭설이라니.

“쓰읍.”

세차게 내리치는 눈 폭풍에 혀를 찬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대강 먼지를 털어 낸 의자에 등을 기대 앉았다.

일단 기다려 본다.

소나기눈이라 금세 그칠 가능성이 있으니 우선은 대기해 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으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포션에 스랄레오 냉동 고기와 렌티아 열매, 심지어 라이터도 두 개나 가져온 바. 이만하면 어디를 가든, 설령 외딴곳에 고립된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은 거뜬할 터였다.

“으흠.”

나는 불구덩이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넉넉잡아 한 시간.

적당히 쉬면서 다음 경로나 짜고 있으면 되리라. 딱 그러한 기색으로 여유롭게 시간을 흘려보내려 했다.

띵―

“……?!”

느닷없이 종소리에 더하여.

[축하합니다.]

급작스러운 메시지 출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건……!”

난데없이 시야를 채우는 문구에 나는 벌떡 허리를 세우며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즘과 같은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뜬금포로 메시지가 출력된다는 건.

[‘2등급 침략군’ 666개체가 처치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벤트 : ?’의 발동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충족된 조건 : 1. ‘던전 전용 기술’ 44회 발동 / 2. 2단계 기적의 조각 출현 / 3. ‘2등급 침략군’ 666개체 처치]

[모든 요구 조건이 수료됨에 따라 현시점에서 「66분」 후 ‘이벤트 : ?’이 개최됩니다.]

[남은 시간 : 65분 59초]

‘이벤트 : ?’이 발발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이런…….”

내심 아니길 바랐던 나는 연달아 올라오는 문장의 물결에 입을 다물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이벤트가 시작될 줄이야.

코앞까지 다가왔음이야 저명한 사실이니 놀랍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하필’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이벤트 : ?이 개최되기 전까지 모든 생존자는 ‘현 위치(허용 범위 : 가로 10m, 세로 5m)’에 고정됩니다.]

“위치가… 고정돼?”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이벤트 개최 소식에 황급히 의자를 박차며 문을 향해 달려가던 나는 가장 밝게 빛나는 마지막 문구에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복귀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허.”

철컥―

끼이이이이익!

쿵!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어 보자 어느 기점에서 벽에 막힌 듯 꼼짝하지 않는다.

직접 나가서 손을 뻗으니.

탁!

정면, 측면, 공중 어느 한 곳 할 것 없이 투명한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스트랭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우웅―!

“흐읍!”

후우우욱!

콰아아아앙!!

버프고 마력이고 양껏 투자해 전력으로 가격해도 티끌만 한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미친 듯이 내리는 눈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되는 괴상한 방벽이.

“…젠장.”

이 엿 같은 상황에 욕이 절로 내뱉어졌다.

위험도를 알 수 없기에 가급적이면 한세정들과 거점에서 맞이하길 바랐는데, 허나 어찌하랴.

이미 갇혀 버린걸.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거라고는 한 가지뿐이다. 66분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 수 있게끔 준비하는 것.

물론.

그 역시도 무척 어려울 거란 직감이 팍팍 들었다.

“66분, 66분…….”

시간 낭비할 거 없이 곧장 스타트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구태여 반나절이나 발을 묶었다.

1~20분도 아니고 꼬박 한 시간을.

이만하면 대놓고 온갖 수작질을 해 둘 테니 기대하라고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다.

“…쉽지 않겠어.”

가슴이 답답해진 난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의자를 바로 해 다시 주저앉았다.

66분.

이제 64분으로 줄어든 시계가 0을 가리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무난하게 파훼할 수 있도록 쉬어 두고자 모닥불의 온기로 추위로 얼어 가던 육체를 녹이고 또 녹였다.

그렇게 한 시간 6분.

TV도, 인터넷도, 휴대폰에 신문이나 책을 넘어 대화할 이조차 한 명 없는 공간 속에서 홀로 버티길 마침내.

[남은 시간 : 0분 0초]

[지금부터 ‘7일간’ 「이벤트 : 절망의 파도」를 개최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신체 능력이 15%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기술 위력이 10% 상승합니다.]

[〈차원 : 테라〉에 진입한 모든 「침략군」의 특성 효력이 5% 상승합니다.]

[위 효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중첩됩니다.]

매서웠던 눈보라가 그치며 훗날 생존자들의 입에서 ‘몬스터 웨이브’라 불리는 재앙급 이벤트, 공식 명칭 ‘절망의 파도’가 지구를 무대로 공연의 신호탄을 쏘았다.

[당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1km 내’에 존재하는 생존자를 탐색합니다.]

[…완료!]

[검색된 인원 : 한 명]

[다음 검색까지 남은 시간 : 180분]

또한.

[파악된 인원수에 걸맞은 크기의 파도가 들이닥칩니다.]

[견디고 또 견뎌 내십시오.]

[고난과 시련은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 테니.]

그것은 내게 있어서 반드시 활약해야 할 스테이지이기도 했다.

[「이벤트 : 절망의 파도」가 진행되는 동안 ‘공적치’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각 생존자는 달성한 ‘공적치’에 비례하여 보상을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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