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103화 (103/232)

103화

* * *

“다들 생각은 좀 해 봤어?”

시곗바늘이 두 시를 가리키는 오후.

눈이 내리려는지 영 어두컴컴한 풍경 아래, 일일 휴가를 받아 늦게까지 잠을 자거나 하며 각자 나름대로 휴식을 즐기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윤으로부터 하달된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내가 먼저 말해 보자면, 회복 하나에 디버프 방어나 해제가 둘, 그리고 나머지 둘은 해독과 탐색 계열이었으면 해.”

한세정은 다섯 명이 모두 둘러앉자 늘 그래 왔듯 주도적으로 회의의 물꼬를 텄다.

그러자.

“내 생각도 세정이 너와 비슷해. 다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디버프… 자주 안 쓰는 단어라 좀 어색하네. 아무튼 디버프 해제 관련 기술은 하나로 줄이고, 탐색을 방어하는 쪽에 투자하면 어떨까 싶어.”

“탐색을 방어한다?”

“응. 그동안 불곰파나 착호 부대하고 싸우면서 어딜 움직일 때마다 추적당해서 쫓겨야 했잖아. 그러니 적의 추격을 막거나 혼동시키는 기술을 배워 보면 어떨까 해.”

자연스레 연결해 가는 조이령.

그녀는 한세정에게 동의하면서도 추가적으로 ‘추격’에 관한 방어 수단을 갖고자 했다.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전부가 추격전이라면 치를 떠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조이령의 얘기에 진심으로 주억거린 한세정은 가져온 종이에 펜으로 ‘추격 방지 기술’이라는 글귀를 적으며 곽재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공격적인 디버프 기술을 배웠으면 합니다.”

“공격적인 디버프?”

“예.”

조이령에게서 배턴을 넘겨받은 곽재우는 또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형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방어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었지만, 폭넓게 숙고해 보라고.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관점으로 고심하다 보니 최근 포타우스들을 사냥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포타우스 사냥이라면.”

“지유의 바인딩, 적의 발을 묶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전투에 있어서 큰 이점을 깔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좀 더 극대화하면 어떨까 합니다.”

“으음.”

“지운이도 알겠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디버프를 볼 수 있습니다. 발을 묶는 바인딩부터 시야를 가리거나, 소리를 차단하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저주를 걸기도 하죠.”

한쪽에 치중되기보단 기왕이면 공방 양면을 같이 강화하는 건 어떠냐고.

전투든 전쟁이든 결국에는 적을 쓰러뜨려야 승리하는 법이니. 방패를 들되 칼자루도 하나 챙겨 두자는 것이 곽재우의 주장이었다.

이 역시 타당한 견해였기에.

슥―

슥―

“좋아. 재우 씨 얘기도 잘 들었어. 그럼… 이번에는 지유. 지유 너는 어때?”

한세정은 수고했다며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신지유를 바라봤다.

따로 정한 건 아니나 나이순으로 이어지는 대화.

“저도, 디버프 같은 건 익숙하지 않아서… 그치만 이런 건 하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어떤 거?”

“물을 만드는 능력이요.”

“물?”

“네. 당장은 눈이 내리고 있어서 그걸 녹여 마시면 되지만… 사실 눈이 깨끗한지도 확실치 않고, 계절이 지나 눈이 내리지 않으면 식수 구하기가 어려워질 테니 이참에 물을 생성해 내는 능력을 확보해 두는 게 우선이지 않나 했어요.”

“아아.”

이건 또 특이한 발언이었다.

공격도, 방어도 아닌.

오로지 실생활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된 발상이라니. 한세정은 신지유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탄성을 내뱉었다.

비록 아윤이 원하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른 결의 답변이긴 해도 그 중요성은 조이령이나 곽재우의 사견과 비교해 결코 꿇리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어차피 최종 결정권자는 아윤이다. 한세정은 그저 모든 이의 이야기를 취합해서 전달하면 될 뿐이었다.

슥슥―

탁!

고로.

한 자, 한 자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후.

“지유도 고민 많이 했네. 지운이는 어때?”

끝으로 신지운에게 물었다.

“전 속성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속성 기술?”

“네! 그 게임을 하다 보면 무기에 속성 같은 걸 부여해서 몬스터한테 화상을 입히거나 빙결 상태로 만들기도 하거든요. 저희에게도 그런 게 있으면, 아윤 형이 말한 디버프도 걸면서 사냥도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

신지운은 곽재우와 맥락적으로 일치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명확하게 구분하자면 좀 더 공격 지향적인 타입이랄까.

여하튼.

이로써 자기 피력을 끝맺자 한세정은 각자의 이름 아래에 적힌 다섯 개의 요점을 토대로 결론을 내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다들 오랜 시간 궁리해서 내놓은 것들이니만큼 어떤 걸 빼고 어떤 걸 넣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설사 하루 종일이라도 대화할 기세로 토론을 시작했다.

* * *

“…해서 이렇게 배워 볼까 하는데, 오빠가 보시기엔 어떠세요?”

어느덧 해가 저물고 달과 별을 머금은 어둠이 잔뜩 몰려든 저녁.

장장 세 시간여에 걸쳐 의논을 마친 한세정들이 한 페이지로 깔끔하게 정리된 요약본을 내게 내밀었다.

수색 겸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와 언 몸을 녹이던 나는 그네들이 건넨 회의록을 쭉 확인해 본 뒤.

“음, 좋네.”

별 이의 없이 결재를 해 주었다.

열띤 담론을 거쳐 나온 판단이라 그런가 딱히 수정할 구석이 없었다.

다만 하나 걱정되는 게 있다면.

“그런데.”

“……?”

“이것들 다 구매할 수는 있는 거고?”

이들이 고안한 것들이 ‘기술서 판매처’에서 판매되고 있냐는 점.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토의를 나눠 놓고 막상 상점에서 구할 수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해서 어쩌나 싶었는데 기우였다.

“네! 확인해 봤는데 다 있더라고요.”

“그래?”

다행히 찾는 물건은 다 구비되어 있었다.

애초에 대조해 보며 구상해온 것이었다.

허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지.

“잘됐네. 가서 사 와.”

“네!”

기술서를 구입했을 때 누가 어떤 기술을 습득하면 좋을지도 다 짜 놓은 터라 바로 근원석을 내어 주자 한세정들이 활기차게 상점으로 뛰어간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의견이 온전하게 채택되어 기분이 좋은 듯했다.

피식―

그 광경이 퍽 재미나 넌지시 웃은 나는 한세정들이 돌아올 동안 종이 안에 담긴 내용을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동료가 얻게 될 새로운 능력에 관해 확실하게 기억하고자.

[기술 습득안]

1. 한세정

- 습득 기술 : 기초 용독술

- 설명 : 무(武)를 숭상하는 차원의 기인이 집필한 수많은 무공서 중 특히 ‘독(毒)’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편찬된 책의 한 갈래. 독에 관한 기초 지식부터 하독 및 해독 방법이 담겨 있다.

2. 조이령

- 습득 기술 : 인첸트―저주 방어

- 설명 : 10분간 지정 대상의 ‘저주’ 저항력을 소폭 향상시킨다.

3. 곽재우

- 습득 기술 : 마법(치유)

- 설명 : 마력을 소모해 대상의 상처를 치유하고 소모된 체력을 회복시킨다.

4. 신지유

- 습득 기술 : 매직 트랩

- 설명 : 지정된 위치에 최대 30분간 마력으로 이루어진 덫을 설치한다. 해당 덫은 하위 등급의 ‘인식 장애 주문’이 걸려 있으며, 발동 시 폭발하며 상대에게 ‘마비’, ‘둔화’, ‘출혈’ 중 한 가지를 부여한다.

설치된 덫이 세 개를 초과할 경우, 가장 먼저 설치된 덫부터 자동 소멸한다.

5. 신지운

- 습득 기술 : 탐색

- 설명 : 시전자를 중심으로 최대 50m 내외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찾아낸다.

“음…….”

재차 검토해 봐도 훌륭했다.

내가 고대했던 것 이상의 선택이랄까.

게다가.

매칭도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

공간 이동으로 기습에 능통한 한세정에게 독을 쥐여 주는 거나, ‘고유 능력 : 천강홍의장군’으로 생명력을 사용해야 하는 곽재우가 치유 마법을 배운 점이나.

중요성과 더불어 필요성도 챙겼다는 게 특히 고무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가진 자본의 대부분을 소비했음에도 별로 아쉽지가 않았다.

치유 마법 같은 게 유난히 비싼 탓에 신지유와 신지운의 부족한 방어구를 채워 주지 못한 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돈이야 다시 벌면 된다.”

근처에 던전도 하나 있으니, 텅 빈 주머니는 금방 채워지리라.

나는 그리 단정 지으며 상점을 빠져나와 새로 배운 기술을 연습하려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한세정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우우웅―

우웅―

휴일임을 망각한 이들에 의해 곳곳에서 마력이 꿈틀거렸다.

* * *

어느새 12월 중순.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점령의 구슬’을 사용합니다.]

[〈인스턴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이 생성되었습니다.]

[해당 던전은 내부에 존재한 모든 적을 섬멸할 시 귀환과 함께 소멸하며, 생성 후 ‘3일’이 초과해도 자동 소멸합니다.]

[‘칭호 : 점령하는 자’가 발동합니다.]

[현재 〈인스턴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 존재하는 적의 숫자가 표시됩니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 72시간 58분 48초]

[2등급 : 7]

[1등급 : 81]

반복적이고도 지속적인 사냥.

“오늘도 잘해 봐요! 아자 아자!”

“아자!!”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자 아자!!”

지칠 만도 하건만.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곧 닥쳐올 ‘이벤트 : ?’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아니, 되도록이면 상처 하나 없게끔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나갔다 올게.”

“오늘은 어디로 가시게요?”

“동쪽으로.”

한세정들이 ‘쌍수 증량의 폭력’을 점령하고 획득한 인스턴스 던전에서 살았다면, 나는 반대로 거점 인근을 매일같이 떠도는 중이었다.

피부와 내장 기관 이식용 재료를 찾고자.

“동쪽, 동쪽……. 네! 아시죠? 위험하다 싶으시면 신호기 꼭 눌러 주세요. 이번에도 두 시간 단위로 한 번씩 나올 테니까.”

“알겠어.”

“꼭이에요. 꼭!”

“그래.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넵! 여긴 걱정 마세요!”

떠나가는 날 향해 ‘고주파 신호기’를 들어 보이는 한세정.

일전에 성십자가 클랜과의 마찰로 내가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도망쳤음에도 지원은커녕 아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생긴 버릇이다.

딱히 본인이 잘못한 구석이 없음에도 강박증에 가까운 습관이 생겨 버린 터라.

나는 한세정에게 확실하게 확답을 얹어 주고서야 밖으로 나와 분신이 된 장포를 두르며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이이익―!

“…….”

기름칠 덜 된 소음을 내며 활짝 개방되는 입구.

그 너머로 뼈를 시리게 만드는 한풍과 함께 무지막지하게 쌓여 있는 눈더미가 날 맞이한다. 며칠째 쉬지 않고 펑펑 내리더니 평균 높이가 50cm를 가뿐히 넘기는 새하얀 장벽.

저걸 가르며 탐사를 가야 된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달달 떨린다.

‘내구’ 스탯이 100을 돌파했고, ‘저항’도 60에 다다르고 있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

“…가 보자.”

자꾸만 머뭇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눈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