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이벤트 : ??? 】
10월.
갑작스러운 외계 생명체들의 침공으로 인류는 종말의 위기에 처한다.
하루아침에 수억 명이 죽어 나갔고.
고작 일주일이 흐르기도 전에 80억에 육박하던 숫자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그 파멸적인 재앙에 모두가 외쳤다.
종극에 인류는 멸절을 맞이할 것이고, 지구는 침략자들의 발아래에 짓밟혀 풀뿌리 하나 남지 않을 거라고.
허나.
인류는 버텨 냈다.
‘고유 능력’, ‘기술’, ‘아이템’ 등……. 제 몸을 지키고 나아가 적의 목을 베어 낼 반격의 무기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그 신묘한 힘에.
종말을 넘어 멸종을 운운하던 사람들의 입에선 점차 희망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얼굴엔 점점 활기를 띠어 갔다.
12월의 칼바람도, 겨울의 한기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어어어어어어!!”
그게 싫었나 보다.
콰직!
겨우 켜 놓은 등불을 향해 집채만 한 절망의 파도가 들이닥치는 걸 보면 말이다.
[축하합니다.]
[‘이벤트 : ?’의 모든 요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빌어먹을, 축하 같은 소리―’
털썩―
―어느 생존자의 일기장 中 발췌
* * *
[축하합니다!]
[〈던전 : 쌍수 증량의 폭력〉에 입장하셨습니다.]
“쌍수 증량의 폭력.”
바스락―
눈길을 헤치며 숲에 발을 들인 한세정이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던전 명칭과 던전 전용 퀘스트를 설명해 주는 홀로그램 화면을 보고 있는 듯 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정독을 마쳤는지 왼손으로 허리춤의 검집을 쥐며 날 바라봤다.
사냥을 시작하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
스윽―
척―
척―
잘해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생긋 웃으며 화이팅 포즈를 취한 한세정이 이내 미소를 지우고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수신호를 보내며 던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뒤를 따라 각자의 포지션을 잡아 가는 네 사람.
검게 물든 흑골 갑주에 대검을 틀어쥐고 전위에 선 곽재우, 백업 및 보조 탱커에 신지운, 중장거리 딜러 역을 맡은 조이령, 원거리 딜러이자 유틸리티형의 서포터인 신지유.
열흘 가까이 인스턴스 던전을 공략하며 팀 합을 갈고닦은 다섯 명의 사냥꾼은.
“크라라라라!!”
“크라라라라!!”
“전방에 적 출현, 숫자는 열둘에서 셋으로 추정, 2등급 한 개체 포함.”
“나무 지대로 이동, 거리 좁혀지면 바인딩 걸고 당황하는 사이에 단숨에 처리합니다. 2등급은 재우 씨가 맡고 나머지는 1등급에 올인하세요.”
처음 보는 괴물들의 등장에도 전혀 당황치 않고 사전에 미리 봐 두었던 지형으로 이동하며 전투를 개시했다.
첫 스타트는 신지유의 정령이었다.
“드라이어드.”
우우우웅―!!
기술서를 통해 본격적으로 정령 마법을 익히게 된 신지유는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정령술을 전개하며 주변 나무들을 움직이는 데 주력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인딩.
“지금이야! 발을 묶어!”
촤아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악!!
‘쌍수 증량의 폭력’ 내부에 즐비한 렌티아 나무를 활용한 발 묶기였다.
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던전의 균열이 뿜어내는 온기로 쌩쌩하게 잘 자라는 초목은 도리어 여느 족쇄보다도 훌륭한 통제 수단이었다.
물론.
아직 마력 수치가 낮고, 또 정령 마법을 배운 지도 얼마 되지 않아 2등급 개체까지 포함된 십여 마리의 괴물들을 한꺼번에 봉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신지유의 역할은 흔들기에 불과하니까. 급작스러운 발목 공격으로 스텝이 뒤엉켜 쓰러지거나 휘청거리게만 만들면 되는.
“하아!”
“하!”
“으아아아아!!”
슈화하하하학―!
콰득!
서걱!
자세가 무너진 다음에는 대기 중이던 곽재우와 조이령, 신지운이 알아서 처리해 주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투웅!
콰직!
“후.”
신지유 본인도 정령으로 한차례 활약을 하고 쉬는 게 아니라 곧바로 활시위를 당겨 괴물들의 머리통에 화살을 박아 넣었고.
그렇게 십여 마리가 단숨에 학살당하는 사이.
한세정은 2등급 개체와 일대일로 붙어 데이터를 확보했다.
“크라라라라라!!”
후우우욱―
후우욱―
콰앙!
“속도는 이 정도면……”
파괴력, 속도, 맷집, 기술 등.
그녀는 2등급 프라구스를 상대로 놈이 가진 모든 걸 끌어내 일종의 ‘공략법’을 구축해 나갔다.
정보는 곧 무기와 같다.
한세정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만간 점령할 수 있겠어.”
나는 포타우스를 상대로 수월하게 사냥해 나가는 한세정들을 잠시 지켜보다 슬쩍 던전 중심부로 시선을 옮겼다.
최심처에 자리한 목책으로.
하마의 대가리이긴 해도 목 아래로는 인간형이라 그런가. 놈들은 신기하게도 거점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설치해 둔 상태였다.
이전에 공략했던 던전과는 다른 양상.
그다지 단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만, 저런 종(種)도 있는 걸 감안하면 나중에는 성채나 기계화된 문명도 튀어나오는 건 아닌가 싶었다.
지금까지야 본능에 충실한 괴물체가 대부분이었으나, 넓고 넓은 우주에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지능적으로 뛰어난 지성체가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다 보면 엘프나, 드워프 같은 걸 만날지도 모르겠어.”
고블린도, 발록도 존재하는 세상.
여기에 티그리스 같은 웨어 타이거도 있으니, 지구 어딘가에 이미 엘프나 드워프를 필두로 한 아인종들이 돌아다닐 가능성도 충분하지.
침략군으로서 지구를 지배하고자 침략해 왔다면.
“그것들을 잡아먹으면 어떤 걸 줄지 궁금하네.”
‘프레데터’로 살고 있으니 평범했던 상념도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구나.
나는 점점 기이하게 연결되는 상상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울타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리를 뻗었다.
한세정들이 포타우스들의 이목을 끌어 준 터라 뻥 뚫린 길.
누구의 제지도 없이 여유롭게 목책까지 도착한 나는 감각을 예민하게 세워 건너편을 살폈다.
찌릿―
찌릿―
‘하나, 둘, 셋… 열, 열둘. 열두 마리. 등급은 2등급이 셋인가.’
어느덧 7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바람에 실린 기운을 감지하는 것만으로 내부의 위험 요소를 샅샅이 짚어 내는 감각.
나는 더 진입하진 않고 입수한 정보만 머릿속에 담아 둔 채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번 던전은 기본적인 사냥부터 완전한 점령까지 온전히 한세정들에게 맡기기로 한 상황.
하여.
내가 나서야 할 정도로 위급한 사태가 아니고는 뒷짐 지고 지켜보기만 할 요량이라, 단지 변수가 될 만한 게 있을까 체크해 보기만 할 요량으로 방문해 본 것이다.
본래라면 이런 것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얼마 전.
더 정확하게는 성십자가 클랜과의 결전이 있던 날, 그들의 마스터가 지닌 ‘기적의 조각’을 빼앗아 융합하고 나자.
[축하합니다.]
[2단계 ‘기적의 조각’이 출현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벤트 : ?’의 발동 조건 일부가 충족되었습니다.]
[현재 충족된 조건 : 1. ‘던전 전용 기술’ 44회 발동 / 2. 2단계 기적의 조각 출현]
[이벤트 개시 필요 조건 : 3. ?]
[위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순간 ‘이벤트 : ?’가 개시됩니다.]
이게 나와 버린 탓에 조심성이 생겼다.
첫 번째 조건이 충족된 뒤로 시간이 상당히 오래 지난지라 슬슬 2차, 3차 요건과 관련된 메시지가 출력될 거라 짐작은 했다.
그게 ‘기적의 조각’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는 예견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이제 하나의 조건만 더 채워지면 ‘이벤트 ?’가 발발하게 되는 바. 그러니 위협적으로 작용할 만한 건수는 일찌감치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내가 조사한 자료는 한세정들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방관자로서의 스탠스는 유지돼야 하기에.
* * *
[축하합니다!]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적을 처치하고 ‘거점’을 점령했습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보상으로 ‘점령의 구슬’을 습득합니다.]
던전 공략에 돌입하고서 사흘.
착실하게 포타우스들을 척살해 가던 한세정들은 기어코 단 3일 만에 던전의 중심에 점령의 깃발을 꽂았다.
능력을 개방한 지 얼마 안 된 신씨 남매가 끼어 있음을 고려하면 굉장히 속도감 있는 진행이었다.
심지어.
이는 중간에 포타우스 전용 ‘특수 퀘스트 : 버티거나 피하거나’를 진행하면서 이뤄 낸 고무적인 성과였다.
확실히 인스턴스 던전에서 산 게 한세정들에게 적잖은 힘을 안겨 준 것 같았다.
인스턴스 던전에서 드랍되는 근원석은 일반 침략군을 사냥해 얻는 보통의 근원석 성능의 10%밖에 안 되는 단점을 따져 보더라도, 1등급을 기준으로 최소 수백 개 분량은 먹어 치웠으니까.
거기다 장비도, 기술도 빵빵하니.
‘던전 하나 정도만 더 털면 이벤트든 뭐든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내 마음에도 조금씩 한세정들에 대한 확신이 생겨 갔다.
그들의 실력에 관하여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 정예’의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는 걸.
“오빠! 다 끝났어요!”
“수고했어. 많이 늘었네.”
“그쵸? 예전엔 괴물 몇 마리만 잡아도 힘들었는데… 이젠 던전 하나를 클리어해도 힘이 남네요. 진짜 많이 성장했나 봐요. 지유랑 지운이도 잘 따라오고 있고.”
“오빠도 긴장하셔야겠어요. 이러다 조만간 저희가 오빠 따라잡을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오빠는 못 잡지. 오빠가 누군가.”
“에? 지금 아윤 오빠 편드는 거야? 이거… 요새 좀 조용하다 싶더― 악!”
“하하, 이령아, 오늘 저녁 뭐라고 했더라?”
“이년아 허리―”
“맞아, 렌티아 열매도 먹어야 하는데.”
피식―
‘점령의 구슬’을 챙기고 돌아가는 길.
큰 전투를 치렀음에도 여유가 생겨 투닥투닥 장난도 치며 느긋하게 거점으로 복귀한 우린 저녁을 간단히 하고 후식으로 렌티아 열매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3일간 가열 차게 달려왔으니.
내일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계획이었다.
‘쌍수 증량의 폭력’에서 무력 부족으로 허덕였다면 모를까, 실력적으로 증명도 했으니 그에 걸맞은 휴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신.
그래도 완전히 퍼질러지게 둘 수는 없는 만큼 한 가지 미션을 줬다.
다름 아닌.
“…기술이요?”
“회복이나 해독, 그 밖에 은신 등 보조적인 기술을 좀 더 습득했으면 하는데.”
“하긴… 매번 포션을 구매하기도 힘들긴 하죠.”
“그러니 각자 고민해서 하나 정도 구매해. 내일 쉬는 동안 천천히 연습해 보면 될 테니까.”
“네!”
“네!”
“네!”
“네!”
새로운 ‘기술 습득’이었다.
공격형이나 방어형같이 전투 기술 말고 좀 더 생존에 특화된, 일명 유틸리티형 기술을 습득케 하고 싶었다.
포션이 없는 위급 시에도 마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끔.
성십자가 클랜과 전쟁을 치르며 유틸적인 능력의 차이가 전황을 비트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령.
교환술이라든가, 각종 디버프라든가.
기술서로 배우는 거라 한계는 있을지언정, 한두 개라도 익혀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