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오른손에 응축되었던 마력이 분사되며 나와 발록을 닮은 괴물의 몸이 뒤엉켰다.
쿵!
우당탕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허나.
‘안 아파.’
바닥을 구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거의 없었다.
‘불굴’의 효능이었다.
정신적 공격과 속성력, 나아가 물리적인 타격에도 저항력이 향상된다고 하던가. 그 각성 효과가 일시적으로나마 날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난.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스트랭스]
우드득―
우득!
“흡!”
[돌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쉴 시간이 없었다.
옆은 철갑 사슴벌레가, 뒤는 성십자가 클랜이 있었으며 전방에서도 ‘투르바의 포효’를 듣고 괴물들이 몰려오는 중.
쉴 시간이 없었다.
쾅!
전신 근육을 강화시키며, 상체에 어린아이 머리통 세 개만 한 구멍이 뚫려 즉사한 발록을 닮은 괴물의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스프링처럼 굽혔던 무릎을 쫙 폈다.
펄럭이는 장포가 날개인 양 바람을 가르며 솟구치는 찰나.
“끼에에에에엑!!”
한 타임 늦은 철갑 사슴벌레의 괴성이 이어졌다.
제3자에 의해 본인의 상대를 빼앗긴 게 화가 났는지, 흥분했음을 알린 녀석은 내 뒤꽁무니를 쫓아 날카롭게 돋은 톱날의 뿔을 뻗어 댄다.
다만.
녀석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했다.
슈슈슈슈슉!
콰아앙!
쾅!
열 개를 훌쩍 넘는 디버프 세례를 퍼부은 뒤.
그 여파로 이동 중인 내가 어디쯤에서 고정될 것인가를 대략적으로 계산해 갈긴 성십자가 클랜의 포격에 휘말린 탓이었다.
정작 표적인 나는 유유히 빠져나갔지만.
참 안타까운 희생이었다.
그래도.
녀석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을 듯했다.
“끼에에에엑!!”
“끼에에엑!!”
돌산에서 건너온 수십 마리의 괴물.
방금 전 사망한 철갑 사슴벌레와 똑 닮은 괴물들이, 철갑 사슴벌레가 최후에 게워 낸 다잉 메시지를 통해 누가 동족 살해범인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괴물들이 옵니다!!”
“숫자는 서른으로 추정!”
“젠장! 저거부터 처리해!”
바야흐로.
누군가 기획한 호랑이와 늑대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 * *
쿵―
쾅!
“끼에에에엑!!”
나는 지상에서 전달된 투쟁의 증거들을 한쪽 귀로 받아 반대쪽 귀로 내보내며 5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끼이이이익―
쾅!
이식할 요량이었다.
굉장한 주의와 안전을 요하는 수술을 이런 탁 트인 외부에서 하겠다니,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선택이었으나.
철갑 사슴벌레들이 버텨 주는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찬스는 오지 않을 터.
“바로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옥상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바닥에 발록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손을 뻗으려던 그때.
띵!
[축하합니다.]
[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유 중인 ‘기적의 조각’이 「2단계」로 격상합니다.]
‘기적의 조각’이 성장했다는 알림이 시야 한쪽에 나타났다.
어느새 3분이 지나가 있었다.
물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1분 1초가 급했기에.
그러나.
오판이었다.
2단계에 오른 ‘기적의 조각’은…….
《기적의 조각 : 2단계》
- 등급 : 유일+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름 그대로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묘한 ‘마석(魔石)’의 조각이다. 본래는 하나의 차원을 온전히 발아래에 둔 지배자에게 수여되는 보물이나, 이따금씩 해당 조각처럼 주인 잃은 별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총 ‘여섯 개’를 모아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나, 단지 조각을 지닌 것만으로도 적잖은 능력을 손에 넣기도 한다.
현재 ‘두 개의 조각’이 융합된 상태이며 〈특수 퀘스트 : 선택〉을 훌륭히 완수함에 따라 「추가 옵션」이 부여되었다.
- 옵션 : 신체 능력치 19% 상승 / 체력 및 마력의 회복 속도 17% 상승 / 모든 속성 저항력 8% 상승 / 양도 불가 / 소유주 사망 시 무작위 전이
- 추가 옵션 : 특수 기능 ‘임시 안전지대’ 생성 가능
《특수 기능 : 임시 안전지대》
- 설명 : 발동 시 ‘기적의 조각’ 소유자를 중심으로 두는 폭 30m에 이르는 안전지대(Lv. 1)가 생성된다. 어디까지나 임시이기에 지속 시간은 10분이며, 생성 시마다 수식어가 무작위로 결정된다.
온/오프 주문으로 자유롭게 설치하고 해제할 수 있으나, 한번 발동 시 파괴 여부와 관계없이 일주일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진다.
“아.”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아이템이었으니까.
[‘임시 안전지대’를 발동합니다.]
[수식어 선택 중.]
[1%, 2%, 3%… 99%, 100%]
[설정 완료!]
[당신을 기준으로 폭 30m의 ‘강철의 안전지대(Lv. 1)’가 생성됩니다.]
[「강철의 장벽」이 구축됩니다.]
[‘아군 지정’ 주문을 사용해 격리된 아군을 들일 수 있습니다.]
쿠구구구구구궁―!!
쿠구구구구궁―!!
전후좌우에 상하.
거점에 설치된 ‘혹한의 방벽’과 같이 내부에서 외부를 지켜볼 수 있게끔 투시 처리가 된 정육면체의 방벽이 전방위를 차단하며 날 감싼다.
[‘강철의 안전지대’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신체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체력 및 마력 재생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나는 주변을 감도는 따사로운 기운을 느끼며 직감했다.
‘됐다.’
마음 놓고 수술대에 올라도 된다는 걸.
[프레데터의 중위 진화론]
[‘기술 : 프레데터의 중위 진화론’을 발동합니다.]
[진화에 사용될 제물이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룩할 진화 과정을 선택해 주십시오.]
[「흡수 이식」을 선택하셨습니다.]
[대상 「발록 2등급」의 ‘왼팔’을 선택하셨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우우우웅―!
콰직!
* * *
“후.”
누군가의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온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좌측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유정 언니……. 어, 어때요……?”
큰 눈망울에 물기가 서려 있는 성십자가 클랜의 부마스터 황선아가 있었다.
동네 양아치들에게 납치 감금돼 며칠 밤을 윤간당하다 마스터의 손에 구해진 소녀.
새 삶을 얻은 이후로는 ‘냉혈의 집행자’라는 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누구보다 냉정하게 악인을 처벌하던 그녀가 눈물이라니.
클랜의 최고 힐러인 이유정은 평상시와 전혀 매치되지 않는 황선아의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웃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중급 포션에 힐러 팀이 다 달라붙었더니 잘 치료됐어.”
“저, 정말요?!”
“그렇다니까. 아직 마취가 안 풀려서 그렇지. 한 1분 뒤면 멀쩡히 일어날 거야.”
산송장이나 진배없던 마스터가 완쾌된 덕분이었다.
그 바람에 힐러진 전원이 탈진하다시피 하고 심지어 보물급에 속하는 ‘중급 포션’도 두 병이나 소모해야 됐지만.
비용이야 아무래도 괜찮았다.
마스터가 일어날 수만 있으면 제 목숨이라도 내어 주겠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게 성십자가 클랜이었으니까.
“하아…….”
털썩―
개중에서도 단연 마스터를 향한 마음이 컸던 황선아는 이유정의 확언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다친 것도 아니건만, 몸이 기진맥진했다.
악마를 처단하겠다며 홀로 뛰쳐나갔던 그가 복부에 웬 괴물의 팔이 박혀 있는 채로 인질이 되었을 때부터 쌓이고 쌓인 충격감 때문이리라.
정말이지.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어떤 악인도, 어떤 괴물도 막아서지 못했던 마스터가 패배하다니.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대로 마스터의 곁에서 쉬고 싶었다.
스으윽!
하지만.
쉴 수 없다.
저기 악마가 살아 있었다.
“친위대장.”
마스터를 대신해 처단해야 한다.
크게는 인류를 위하여.
작게는.
“어, 아니, 예.”
“가자.”
“예…….”
우리의 복수를 위하여.
“친위대 전원! 날 따른다! 2대대는 괴물들을 막고, 3대대와 4대대는 사방을 둘러싸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1대대는 마스터를 보호한다.”
“옛!!”
“옛!!”
“옛!!”
“옛!!”
“옛!!”
“옛!!”
출병했다.
일사불란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클랜원들의 노력으로 단숨에 열리는 길.
“가시죠.”
괴물들이 치워진 대로를 따라 걸어 5층짜리 빌딩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멀리 도망치기라도 한 줄 알았더니만, 기껏해야 건물 옥상이라니. 황선아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악마의 발악을 조롱하며 성십자가 클랜의 최고 전력인 친위대를 따라갔다.
“함정일지도 모르니 긴장 풀지 말고, 문이 부서지는 대로 진입해 포위한다.”
“옛!”
“정우야, 파괴해. 승우는 엄호하고.”
친위대장 유하늘의 지시 아래 무기로 대형 망치를 쓰는 친위대원이 굳게 닫힌 철문 손잡이를 내려친다.
후웅!
쾅!
묵직한 파공음을 낸 망치의 공세에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진입!”
하달된 명령대로 친위대 전원이 문을 열어젖히며 옥상으로 진입―
쾅!
“크윽!”
“……?”
…해야 하는데.
선두로 내달리던 유하늘이 뭔가에 막혀 입구를 넘지 못했다.
뭐지?
의아한 황선아의 시야에 잡힌 건 은빛의 막이었다. 커다란 막이 출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이라 이건가?”
황선아는 진입로를 봉쇄한 막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 벽에서.
남 죽이는 건 가차 없으나 본인 목숨은 끔찍이도 아끼는 악인들의 구질구질한 생존 본능이 느껴진 탓이었다.
“뚫어.”
“옛!”
부숴 주마.
네놈의 구차한 발악마저 모조리.
“지상에 건물 잔해가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아예 천장과 벽을 날려 공간을 확보한다. 어디까지 설치돼 있는진 몰라도 한쪽만 노리는 것보단 낫겠지.”
황선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3분.
길어야 3분 안에 벽을 허물고 악마의 목에 칼을 채우리라고. 그녀의 예상은 틀림없이 적중했다.
정확히 2분 20여 초 만에 벽에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더니.
손목시계의 초침이 36초를 가리킬 즈음 입구를 봉쇄하던 방벽이 박살 났다.
콰앙!!
“파괴됐습니다!!”
“진입해!”
“옛! 진입하겠습니다! 1조 진입!”
“2조 진입!”
파스스스스스―
황선아는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방벽을 통과해 천천히 옥상에 발을 들였다.
악마의 표정이 궁금했다.
과연.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금, 악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공포? 두려움? 회한?
아니면.
이미 죽음이 낙점된 걸 인정하고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갈 기세로 싸움을 준비하고 있으려나?
황선아는 기왕이면 후자이길 바랐다. 그래야 마스터의 패배가 조금이라도 덜 불명예스러워질 테니.
탁―
뿌옇던 먼지구름을 피해 선 황선아는 탁 트인 시야 너머로 정면을 응시했다.
약 서른 명의 친위대가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두려움도, 공포도, 비굴함도…….
그렇다고 동귀어진의 각오로 다져진 굳은 낯빛도 아닌.
“서른둘……. 많이도 왔네. 뭐, 상관없겠지.”
무척이나 덤덤하나 한마디, 한마디에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여긴, 내 영역이니까.”
입꼬리를 비틀어 미소 지은 악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