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 *
[188]
이것이 설명하는 바는 간단하다.
살인한 횟수.
태어난 그날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 내에 총 몇 명의 인간을 살해했는가, 이를 알려 주는 수치였다.
‘악마.’
그런 점에 있어서 눈앞의 저 남자는 악마(惡魔)의 화신이었다.
괴물들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던 사람들을 구해 주며 각성한 ‘고유 능력 : 구원자’의 부차적인 기능,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타인의 범죄 전과를 알아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을 뜨게 된 이래로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숫자였으니까.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100인째 구출에 성공하던 시절에 보상으로 주어진 펫 ‘호크 아이’와 공유된 시야로 살펴본 것이었기에 충분히 착각할 법도 했다.
그래서 열 번도 넘게 보고 또 봤다.
부디.
나의 착오였길 바라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조철영이라는 자가 저 남자를 두고 희대의 살인마라 주장했으나, 그저 남을 음해하려는 헛짓거리이기를 기원했거늘.
[188]
개탄스럽게도 오판은 없었다.
백 번, 천 번, 만 번을 체크해 봐도 188이란 숫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
분노에 찬 탄식이 나오는 동시에 막아야 한다는 계시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래.
그건 계시였다.
‘방금 전, 출력된 퀘스트 창을 보고 알았을 거다. 너도, 나도 ‘기적의 조각’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
‘그래서 말인데. 교환했으면 한다. 여기 이 녀석의 목숨과 네가 가진 조각을.’
무자비한 살겁을 저지르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고귀한 생명을 물건 취급하며 본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악마를 내버려 두었다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변모하리니.
‘내가, 막아야 한다!!’
나는 맹세했다.
‘신(神)’이 주신 삶의 이유이자 성십자가 클랜의 존재 의의를 실현하겠다고. 더는 나와 같은 이들이 나타나지… 으음.
여하튼.
마침 좋은 미끼도 있었다.
어찌 저런 악마에게 ‘기적의 조각’이 흘러들어 가게 됐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만, 어쨌든 그 덕택에 아주 치명적인 덫이 완성된 바.
‘교환하겠다! 교환하겠으니 송 조장을 놓아주길 바란다.’
나는 운명을 비틀어 희대의 악마를 처단할 기회를 선사해 준 마석(魔石)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낚싯줄을 던졌다.
‘여기 던질 테니 받아서 확인하는 대로 송 조장을 풀어 줬으면 한다.’
후욱―
툭―
데구루루―
품을 떠나 하늘을 날다 딱 적당한 곳에서 돌부리에 걸려 멈추는 ‘기적의 조각’.
모조품이었다.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거 없다던 성십자가 클랜의 부마스터 황선아의 조언을 토대로 정교하게 제작해 두었던.
‘제발…….’
나는 악마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위조품이 존재한다는 건 클랜 내부에서도 나와 선아를 비롯해 극소수만이 아는 정보. 그러니 틀림없이 걸려들 터.
초조하게 기다리길 잠깐.
저벅―
저벅―
마침내 악마가 움직였다.
수백 명을 학살한 살인마답게 끝까지 인질을 놓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며.
헌데.
놈은 알까?
‘10m, 8m, 6m……. 지금!’
이 거리는.
우우우우웅―!!
나의 영역이라는 걸.
[구원]
카앙!
‘구원!!’
사정거리가 닿는다 싶은 찰나에 발동한 기술.
특이하게도 근원석 복용 없이 ‘인명 구출’로 스탯을 올리고 스킬을 습득하는 구원자.
그 특징 덕에 50번째 인명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발현되어 추가된 원거리 보호 스킬 ‘구원’이 정상적으로 송 조장의 전신을 감싸며 악마의 손길을 떼어 낸다.
됐다.
‘이익!!’
카앙!
악마가 당황한 듯 송 조장에게 단검 같은 걸 휘둘렀지만, 그 정도로는 기껏해야 흠집이 나는 게 고작.
‘수백에 달하는 인명을 학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또 한 번 고귀한 생명을 미끼로 삼은 네놈을 처벌하리라.’
나는 허둥지둥하는 악마의 초라한 몰골을 비웃으며 마침내 속으로만 외워 왔던 선언문을 크게 낭독하곤 칼을 들었다.
바야흐로 단죄의 시간이었다.
간악한 악마에게 희생당한 자들의 대리로서, 인류를 수호할 구원자로서 철퇴를 휘두를 때가 도래했다.
‘으아아아아아!!’
여기서 끝장을 내고.
나아가.
일생일대의 목표로 정한 ‘기적’을 이룰 두 번째 씨앗을 맞이하리라.
[수호의 검]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 원대한 꿈에 호응하듯 검신이 진동했다.
* * *
후우우우우우우욱!
사선으로 내리그어진 칼날이 세상을 갈라 버릴 듯 대각의 참격을 날린다.
서걱!
참으로 간결한 소음.
허나 그 위력은 결코 간결하지 않았다. 놈의 거검이 휩쓴 대지 위로 거의 5m에 인접하는 감성이 새겨졌기 때문이었다.
‘…….’
자세가 무너져 있던 탓에 대응보단 ‘플뤼의 탄성 일격’을 거듭 발동해 몸을 피했던 나는 전장에 펼쳐진 장면을 지켜보며 생각이 옳았음을 인지했다.
단순히 감성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불곰파 수백 명.
여기에 착호 부대 군인 사십여 명과 조철영 무리, 그 외에 괴물 수백 마리까지.
지금껏 능히 시산혈해(屍山血海)란 표현을 써도 좋을 과거를 지나오며 터득한 ‘위기 감지 본능’으로 도출한 이성적 판단이었다.
찌릿―!
찌릿―!
멀찍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살갗의 솜털을 바짝 세우게 하는 여파.
단언할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
저놈은 강자였다.
여태 경험해 왔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따라서 놈을 상대하려면 나도 가진 걸 죄다 꺼내 놓아야 했다.
“하아아앗!”
그러한 위험성을 느끼는 사이 어느새 목전까지 치고 들어온 백색의 거검이 다시금 횡으로 휘어지며 내 허리춤을 노렸다.
후욱!
슈화하하학!
몇 걸음 후진하기 무섭게 대기를 도륙 내며 한 끗 차이로 되돌아가는 칼날.
난 그 두 번의 공세에서 직감했다.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음을.
속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모를까. 추격전에서 보았듯이 스피드도 비등비등한 상태였기에 한 번 거리를 내 줘 버린 이상 맞붙든지 베이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리라는 점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싸워야 했다.
‘기적의 조각’을 얻어 보려 부렸던 욕심의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었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웅!
“흐읍!”
“하아!”
콰아아앙!!
결심을 하자마자 뻗은 주먹.
뒤로 젖혀졌던 상체를 앞쪽으로 밀며 내지른 권격과 세 번째 검로에 들어선 검격이 요란한 폭발음을 토해 내며 부딪쳤다.
그 격돌의 여운은.
쿵―
쿠구구구구궁!!
가히 굉장했다.
손끝을 타고 묵직한 무게감이 전달되며 비산한 마력의 파편이 사방을 박살 내 지면에 거미줄과 같은 상처를 남겼다.
나와 청년은.
“흡!”
“하아아아!!”
쿵!
쿵!
한순간에 참혹하게 변해 버린 땅을 박차고 재차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돌진]
[스트랭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체내를 순환하던 마력을 뭉텅이로 가공해 근력을 키우고, 가속을 더하며 꽂아 넣은 스트레이트.
육체를 휘감은 푸른 빛줄기가 일직선으로 쇄도해 복부를 노린다.
이에.
“어딜!”
청년은 제 명치로 날아드는 주먹에 얼른 칼을 회수해 검면으로 방어해 냈다.
대체 무슨 ‘고유 능력’인지.
계속해서 유지되는 백색의 거검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일반적인 카이드 쉴드조차 가볍게 상회하는 장벽으로 탈바꿈된다.
후화하학!
툭―
콰아아아앙!!
모든 걸 막아 내는 방패와 모든 걸 뚫어 내는 창이 충돌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벌이는 공방.
일 합, 이 합.
무척 투박하나 실전으로 다져진 각자의 투로(鬪路)를 밟아 나간다.
‘빨리 끝내야 한다.’
쿵!
나는 그 투쟁 속에서 단기 결전을 목표로 잡았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성십자가 클랜의 클랜원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기라도 하면 전세가 급격하게 불리해질 테니.
불상사가 생기지 않으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결말을 지어야 했다.
어떻게?
내가 고른 방법은.
[오르그의 파괴 본능]
[돌진]
[베어 내기]
[플뤼의 탄성 일격]
후우우욱―
콰앙!
서거걱!
일부로 공개된 동일한 기술만을 펼치는 것.
일명 ‘기술 숨기기’.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최악의 기술 습득률을 활용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단지.
“죽어라!”
푸화하학!!
서걱!
‘큽!’
이 같은 책략을 써먹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몇 분 전에도 체감했듯이.
놈의 실력은 나와 비교해도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종(異種)의 신체를 이식하고, 세포에 각인된 기억을 포식해 그야말로 미친듯이 성장 가능한 ‘프레데터’의 특성을 이용한 나와 말이다.
때문에 가진 패를 다 퍼부어도 부족할 판에 무려 세 개의 기술을 감춘 데다가.
심지어.
“으아아아아아아!!”
우우우웅!!
슈화하학!
후욱!
적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니 전황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참고 버텼다.
[베어 내기]
카아앙!!
‘틈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굳게 믿으며.
【 위치 】
의외로.
“지옥으로 떨어져라!!”
후우우우욱!
찬스는 빨리 다가왔다.
놈의 공격이.
서걱!
‘약해, 졌다?’
무뎌지면서.
확신은 불가하나, 선혈이 낭자한 접전을 지속하며 잔뜩 예민해진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분명.
약해졌다고.
어째서?
“하아아!!”
전투에 돌입한 지 벌써 3분여.
누군가에는 한없이 짧은 순간일 터이나, 저놈에게는 달랐다. 그 180초 내내 백색의 거검을 휘둘렀으니까.
고로 마력 잔여량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한 집단의 수장씩이나 되는 작자가 마력 관리에 실패한다는 게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영 웃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초전에는 승기를 잡느라 과감하게 투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뒤로는 내가 작정하고 맞아 줘 몰아붙이는 맛이 나니 포기할 수 없겠지.
여하튼.
‘하자.’
나는 반격의 계기가 갖춰졌음에 각오를 다졌다.
슬슬 감 춰두었던 카드를 뒤집기로.
동일하게 흘러간 3분은 놈의 마력을 빨아 먹는데도 크나큰 역할을 한 만큼, 반대로 추격자들이 당도할 여유도 마련해 줬다.
다시 말해.
바로 도전해야 했다.
“크아아아아아아!!”
온다.
우우우우우웅―!!
위력이 줄어들었든 말든 드높게 솟은 백색의 거검을 쥐고 보폭을 넓히며 파죽지세로 돌격을 시전하는 놈에게 대항해.
[돌진]
[오르그의 파괴 본능]
나는 똑같은 대응을 보여 주는 척 정권을 찔러 넣으며.
콰아아앙!!
탁―
폭발이 이는 타이밍에 맞춰.
디딤발로 1번 카드를 기습적으로 오픈했다.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콰직―
쿠구구구국구구궁!!
“……?!”
땅이 흔들린다.
물경 15m에 이르는 지진에 놈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나는 그 얼빠진 면전에 비웃음을 날리며 발가락을 세워 앞으로 도약했다.
쿠웅!
“흡!”
그러자 황급히 폭발에 밀려 공중으로 떠올랐던 칼을 억지로 내려치는 놈.
지축이 흔들리는 와중이라 동작은 상당히 불안했으나, 별개로 검속은 매서웠다. 마력으로 겉을 키웠을 뿐, 본질은 평범한 검에 불과했기에 선보일 수 있는 기예였다.
촤아아악!!
자칫하면 어깻죽지가 잘릴지도, 심하면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조각날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하아아!!”
무시했다.
이제야 공개하는 두 장의 카드.
[마력 방패]
우우우우웅!!
원하는 어디든 설치되는 푸른색 장막과.
[순간 회귀 : 스랄레오의 골갑]
우득―
우드드득―
촤좌좌좌좍!!
목덜미와 쇄골 부근에 돌출된 뼛조각을 기점으로 일시에 상반신을 모두 커버하는 백색의 갑주로 변모한 골갑을 믿고서 오로지 한 점만 응시했다.
이윽고.
후우우우우욱!
콰아앙!!
양측의 노림수가 한데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