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96화 (96/232)

96화

* * *

흔히.

너무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새하얘진다고 하던가.

“…….”

정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놀리고 뇌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

[축하합니다!]

[「기적의 조각」이 설계한 ‘운명의 고리’가 실현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수 퀘스트 : 선택’이 부여됩니다.]

이 세 줄의 문구가 날 공황에 빠트려서.

설마.

‘기적의 조각’이란 단어를 이리 뜬금없이 마주하게 될 줄이야. 전혀 상상치 못했던 대면이었다.

이 난데없는 만남이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 간다.

하지만.

눈앞에 위치한 글귀는 환상도 뭣도 아닌 진짜였다.

즉.

‘정말, 기적의 조각이라고?’

“송 조장!!”

“마스터!”

연신 송주영의 직함을 부르짖으며 맹렬하게 질주 중인 저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란 작자는 진실로 ‘기적의 조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신지유, 신지운 남매로부터 출발한 운명의 흐름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다니.

더군다나.

《특수 퀘스트 : 선택》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기적」을 실현케 하는 마석(魔石)의 그 신묘하고 기괴한 힘은 결코 조각이라고 하여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뉘었기에 때때로 더욱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의 고리’라고 명명했습니다.

본래 하나였으나 여섯 개의 조각으로 분리된 마석(魔石)이 다시 하나가 되고자 각 조각을 소유한 자들의 운명을 직접 비틀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현재 ‘또 다른 소유자’와 대면하게 된 것처럼.

따라서 이제 당신이 결정할 것은 세 가지뿐입니다. 상대의 조각을 빼앗거나, 상대에게 빼앗기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치거나. 다만 명심하십시오. 한번 맺어진 고리가 풀리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는 걸.

└본 퀘스트 진행 시 ‘양도 불가’ 금제가 일시 해제됩니다.

└퀘스트 결과에 따라 ‘보상’의 지급 및 수준이 달라집니다.

└‘도주’ 선택 시 상대로부터 ‘10km’ 이상 떨어져야 하며, ‘24시간’ 이상 발각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상대와 거리 : 0km 67m

└현재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난 시간 : 0시간 0분 0초

└도망 성공 시 동일 대상과는 100일간 ‘선택’ 퀘스트가 발동되지 않는다.

└어떤 선택지든 결과 발표 후 ‘선택’ 퀘스트는 50일간 발동되지 않는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전부 ‘기적의 조각’이 설계한 판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니.

사실 이게 제일 경악스러운 대목이었다.

남의 운명을 멋대로 비튼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제아무리 기적과 관련된 아이템이라지만……. 허나 마냥 불신하기에도 애매했다. 그저 비현실적인 농담으로 치부하고 싶어도 실지로 조철영과 성십자가 클랜의 ‘우연한 마주침’은 매우 기이한 면이 있었으니까.

해서 궁금했다.

만일 정녕 그러하다면 어디서 어디까지 개입되었는지.

신지운의 예지몽?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철영의 무리가 농자재 백화점을 털기로 결심한 시점? 조철영이 신씨 남매를 강제 동행시킨 날?

아니면.

아예 나와 저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가 ‘기적의 조각’을 손에 넣던 당시에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였나?

머릿속에 퀘스천 마크가 우후죽순으로 떠오른다.

그럴 때쯤.

“송 조―”

우뚝.

“…응?”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가 50m가량 되는 부근에서 스스로 급제동을 걸며 우뚝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공을 바라본다.

슬쩍 돌아본 청년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듯.

나와 같은 걸 목격한 것일 터.

그렇기에,

‘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동일한 퀘스트를 부여받은 상황이라 과연 저 청년은 세 가지 선택지 중 무언을 고를 것인가.

‘빼앗긴다’ 따위는 애당초 고를 리 만무하니 ‘빼앗는다’와 ‘도망친다’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터라 어느 쪽으로 결단을 내릴지.

난 그 의중을 간파하려 미간을 좁히며 나 또한 목표를 정해 갔다.

‘기회인가.’

당연히 고를 수만 있다면 저자의 조각을 빼앗길 원했다.

‘기적의 조각’은 쉽사리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당장 아이템 등급만 해도 단지 조각일 뿐인데 일반에서 신화로 구분되는 단계 중 네 번째인 ‘유일’이지 않던가.

그런 보물이 목전에 있다.

사냥꾼으로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단지.

걱정하는 건 저쪽이 다수라는 점이었다. 150명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다수. 것도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불곰파와 달리 무장도 좋거니와 실력도 출중한.

그걸 다 상대하면서 조각을 가져간다?

‘불가능해.’

음.

상식적으로 성공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임무였다. 입맛이 동하기는 하나 나는 생각을 굳혔다.

물러날 때는 확실하게 물러나야 하는 법이라며 깔끔하게 포기를 선언하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재차 지면을 박차려던 찰나.

‘아니.’

문득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이놈.

송주영을 교환 물품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급작스럽게 개시된 퀘스트를 확인하느라 추격전에 일시적인 휴면기가 찾아오긴 했으나, 그는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상사였다.

그 동료애를.

평범한 방패막이 대신 ‘기적의 조각’과 맞바꾸자 한다면 뭐라 대답을 내놓을는지. 겨우 부하 한 명의 목숨값으로 보물을 내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도해 봐도 좋을 듯했다.

‘해 보자.’

쿵―

작게 주억거린 나는 곧바로 지면을 발로 찍으며 빙그르르 뒤돌아 청년을 응시했다.

어느덧 100m가 약간 못 미치게 벌어진 간격. 거친 파열음에 청년의 두 눈이 내게로 고정된다.

“성십자가 클랜의 마스터인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그 서먹한 대치 속에서 물꼬를 튼 나는 청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해 나갔다.

“방금 전, 출력된 퀘스트 창을 보고 알았을 거다. 너도, 나도 ‘기적의 조각’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

“그래서 말인데. 교환했으면 한다. 여기 이 녀석의 목숨과 네가 가진 조각을.”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본론만 툭 제의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할 말은 끝났으니 이제 네 차례라는 의미였다.

“…….”

다만.

청년은 선뜻 답변을 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난데없이 등장한 ‘기적의 조각’과 퀘스트로 인해 혼란스러운 와중인데, 거기에 부하의 생명을 두고 거래하려 드니 꽤나 골치가 아픈 것 같았다.

그래서.

스윽―

살짝 뒷걸음질 쳤다.

무언의 경고였다.

빨리 답변을 주지 않는다면, 나아가 빨리 거래에 응하지 않는다면 난 다시 도망칠 것이고 네가 아끼는 부하의 명운도 오늘로서 마침표가 찍힐 거라는.

이쪽도 웬만하면 차분하게 물물 교환을 진행하고 싶지만, 어물쩍거리다간 고생해서 비집고 나온 그물에 도로 처박힐 판이라.

스윽―

스윽―

한 걸음, 두 걸음 점차 후퇴하며.

“아무래도 네 상사는 널 구해 주지 않을 모양인가 보군.”

송주영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도발이었다.

너도 들었을 테니 살길 바란다면 꽥꽥 짖어서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 보라는.

우득―

척주에 손톱을 대고 지그시 눌러 살갗을 가르며 중얼거린 읊조림에 송주영의 목구멍이 열렸다.

“끄아아악!! 마스터! 마스터!!”

원하던 방향으로.

만약 이 녀석이 제 삶보다 클랜과 상사인 청년을 더 중히 여겼더라면 통하지 않을 작전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송주영은 본인의 생존이 먼저였다.

“사, 살려…….”

“……!!”

공간을 울리는 처절한 발악에 흔들리는 청년의 동공.

그러길 얼마.

“교환하겠다! 교환하겠으니 송 조장을 놓아주길 바란다.”

“…….”

기어코 청년에게서 ‘기적의 조각’을 넘겨주겠다는 답변이 나왔다.

의외였다.

주요 간부도 아닌 조장급 인사.

150여 명에 달하는 인원 중 열여덟 명이나 되는, 과장 좀 보태면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는 인물. 그러니 겉으로 히어로를 표방한다고는 하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같은 흔해 빠진 대사를 내뱉으며 파투를 낼 거라 짐작했다.

헌데.

진정 영웅이라도 되는지.

“여기 던질 테니 받아서 확인하는 대로 송 조장을 풀어 줬으면 한다.”

후욱!

보물이 아무리 중하다 한들 부하의 목숨값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듯 ‘기적의 조각’을 꺼내 던지는 청년.

툭―

데구루루―

“…….”

나는 서로의 중앙 지점에 굴러떨어진 ‘기적의 조각’을 쳐다보며 내심 헛웃음을 터트렸다.

되면 좋다 여겼으나 정말로 될 줄이야.

역시 세상은 넓다.

물론.

아직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몰랐다. 설령 진품이라 해도 따로 수작을 해 두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가만히 있는 걸 추천해. 괜히 움직였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네, 네……. 으으…….”

고통스러워하는 송주영에게 단단히 주의를 해 주고 서서히 ‘기적의 조각’을 향해 다가갔다.

저벅저벅―

청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경계하며 드디어 ‘기적의 조각’ 앞에 다다라 송주영을 밀쳐 주려는 듯한 태세를 취하며 무릎을 굽히고는 손을 뻗어 보물을 주워 들려던 직전.

우우웅!!

정면이 격하게 일렁거렸다.

흡사 잔잔하던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듯 출렁거리는 주변.

‘…이 새끼가.’

나는 그 장면을 목도하자마자 왼손에 힘을 주었다. 청년이 장난질을 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허면.

저 ‘기적의 조각’도 가짜일 터.

함정이다.

일순간에 상체를 뒤로 빼며 송주영의 옷깃을 당겼다.

헌데.

카앙!

“……?!”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푹푹 파고들어 가던 손톱이 뭔가에 가로막혔다.

억지로 깨부수려 했으나 어찌나 단단한지 칼날에 비견될 정도로 날카롭다 자부하던 손톱에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구원!!”

신음을 토해 내기 바쁘던 송주영이 우렁차게 환호하며 미소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그래.

통증에 허덕여야 할 녀석이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양 기뻐하고 있었다.

‘구원(救援)’.

송주영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버린 원인이었다.

‘쯧.’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당한 듯싶었다.

[플뤼의 탄성 일격]

투웅!

파바박!

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왼팔을 던져 ‘기적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돌을 줍는 데 열중했다.

수작질에 놀아난 이상 가품일 확률이 극도로 높아졌으나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날 유혹하고자 진품을 꺼내는 초강수를 두었을 법도 하니 기술 패를 하나 까발리는 한이 있더라도 챙겨 간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는 동안.

“마, 마스터!”

“뒤로 가 있어.”

“예!”

쿵!

청년은 송주영의 안전이 확보되자 마자 느슨하게 쥐고 있던 칼날을 하늘로 세우며 엄청난 기세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수백에 달하는 인명을 학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또 한 번 고귀한 생명을 미끼로 삼은 네놈을 처벌하리라.”

그의 주둥이에선 귀가 녹아내릴 듯한 오글거리는 독백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딱히 잘 들리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뭐라고 주절대는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막대한 양의 마력을 쏟아부어 창조해 낸 초대형 칼날.

그 순백의 거검(巨劍)을 본 직후.

“…젠장!”

다른 것보다 회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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