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세 시.’
[돌진]
쿠웅!
기감이 짚어 주는 대로 네 방향 중 제일 덜 위협적인 경로를 찾아 걸음을 뗐다.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파사삭 깨져 나가는 대지.
저 흔적을 통해 내가 어디로 도주했는지 금방 알아챌 테지만 개의치 않는다. 괴물이라면 족흔보단 후각에 의존해 추적해 올 것이고, 사람이라면 어차피 각종 추격 능력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돌진]
[돌진]
[돌진]
쿠우웅!!
그러니 족적이 남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가속에 가속을 더하며 오로지 이 자리를 탈출하는 데 주력했다.
덕분에.
약 2분이 지나지 전에 날 감싼 어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온다!”
“결계부터 쳐!”
분주하게 길을 막아서는 일단의 ‘인간’들을.
역시나.
또 사람이었다.
‘젠장.’
사방에서 밀려 들려오는 인간의 언어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인간과 마주하는 게 몇 배는 더 귀찮고, 더 위험한 터라 이왕이면 괴물이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허나 어쩌랴.
이미 정해진 결과는 바뀌지 않는 법.
‘열, 열다섯, 스물.’
금세 잡념을 털어 내고 저들의 전력을 파악하는 데 몰두했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간극 속에서 최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온 건 저지선을 구성 중인 이들의 숫자였다.
대략 스물.
포위 전술을 구사하고 있음에도 한쪽 방면에 이만한 인원을 댈 수 있다니. 도대체 전체는 얼마나 많다는 건지.
게다가.
눈에 띄는 건 또 있다.
장비.
전원이 기본적으로 창칼 등의 무기를 소지했거니와 갑옷도 한두 피스를 착용한 상태였다.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몇몇은 아예 완전 무장이 되어 있었고.
그 화려한 자태에 자연스레 긴장감이 감돌았다.
‘…쉽지 않겠어.’
난 분명 ‘제일 덜 위협적인’ 방면을 돌파하고자 했다.
헌데.
애써 고른 쪽이 숫자에서부터 장비까지 저 정도로 출중하다면, 다른 쪽은 얼마나 대단하다는 걸까.
물론 본능에 의지해 달려온 선택이었기에 위험도 측정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돌아야 한다.’
그런 탓에 나는 도주로를 꺾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거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규모와 그 무장 정도를 고려했을 때, 자칫하다간 ‘안전지대’가 파괴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신지유가 있으니 더 이상 농자재 백화점에 목을 맬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지킬 수 있다면 지키는 게 좋았다.
과연 적들을 따돌리고 안전하게 거점으로 복귀가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30미터! 결계 가동!”
“결계 가동!”
지이이이잉!!
빠릿빠릿하게 두뇌를 회전하는 사이 전방에 황금빛 벽이 생성된다.
파직!
파지직!
상대를 감전시키는 게 주목적인 듯 매섭게 튀는 전류.
‘뚫는다.’
판단은 빨랐다.
저항 스탯도 20을 넘었다.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마력 방패’를 두르고 밀어붙이면 충분히 뚫어 내리라.
[마력 방패]
[돌진]
우우우웅―!!
콰앙!
내 직감을 믿고 전면에 방패를 세우며 15m 남짓한 지점에서 지체 없이 도약했다.
여태껏 증폭되었던 속도에 한 겹의 바람을 추가하며 날아오르기 무섭게 가까워지는 금색 벽.
“어딜!”
아래쪽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저 결계를 구축한 당사자인 듯, 내가 자신의 장막을 뚫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욱!
쿠웅!
실상은.
[‘봉쇄자의 결계’에 닿았습니다.]
[당신의 츅게―]
콰아아아아아앙!!
[‘봉쇄자의 결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상태 이상’ 효과가 해제됩니다.]
“…어?”
내 머리카락 한 올조차 가두지 못했지만.
탁.
“어… 어…….”
와장창 박살 나 비산하는 결계 조각 더미를 치우며 착지한 나는 넋을 잃은 채 입만 뻐금거리는 이들을 뒤로하고 재차 발을 놀렸다.
[돌진]
쿵!
“자, 잡아!”
“막아!”
거의 땅을 밟음과 동시에 이루어진 연결 동작에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서둘러 쫓아온다.
그 중심에는 아이템 세팅이 완벽한 지휘관급의 둘이 있었다.
후우우욱―
후우욱―
쌍둥이인지 얼굴이 똑 닮은 두 명의 남자는 각기 좌수와 우수에 칼을 꼬나쥐고서 발을 굴렀는데,
가속 능력이라도 있는 듯.
10여 미터나 벌어져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이에.
‘잘됐네.’
나는 작정하고 속력을 낼까 하다가 일부러 일정한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불현듯.
작금의 전황을 속도전 양상으로 끌고 가 저 둘을 본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아무튼 사람들로부터 떼어 낸 후 생포해서 날 왜 공격하는지 그 이유와 구성원의 수준 등을 캐내야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적당히 속도 경쟁을 해 주며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연기했다. 대놓고 판 함정이라 걸려들까 미심쩍었으나, 의외로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타닷―
타닷―
방금 전 전류가 튀던 결계를 기억해 중간마다 다리를 절뚝거려 준 게 유효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 없이 극복해 냈으나, 그건 본인 외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으니까.
그 점을 바탕으로.
‘지금.’
“젠장……!”
두 남자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을 즈음 발을 헛디디는 모션을 하며 덫을 쫙 벌렸고.
“다 따라잡았다!!”
“하아!”
3m.
엎어져도 코가 닿을 정도로 지척에 다다르자마자 두 남자가 미끼를 콱 물었다.
쐐애애애액!!
쐐애액!
양측에서 상체와 하체를 노리며 쇄도해 오는 칼날.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복부와 허벅지를 점찍으며 가해진 공세에 순간적으로 오른발을 축 삼아 홱 반전했다.
“아?”
“어?”
균형을 잃은 듯하다가 멀쩡하게 몸을 돌려 시선을 맞대자 당황해하는 둘의 표정이 고스란히 내 눈동자에 담긴다.
난 그 어리둥절한 낯빛을 비웃으며 원심력이 가미된 손톱을 내질렀다.
[베어 내기]
슈화하하학!
카앙!
캉!
“크읍!”
“윽!”
대각선으로 올려 치는 반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둘.
개중 좌수 검의 칼날을 붙잡고 힘껏 당겼다.
[스트랭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형태 변화]
[마력 권갑화]
우우우우웅―
텁!
후화학!
“어, 어…….”
근력 강화 버프에 마력까지 집약된 손길이 인력을 행사하자 허무하리만치 쉽게 끌려오는 남자의 육체.
후우욱―
콰직!
“커헉!”
목전에 도달한 놈의 복부를 가격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대미지가 상당했는지 쿵 하고 떨어져서 도통 일어나질 못하는 남자.
그 위에 턱 밟을 올리니.
“송주영!”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결말에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던 이가 황망하게 내 아래에 깔린 동료의 이름을 울부짖는다.
칼을 고쳐 쥐었으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꾸우우우욱―
“끄으으으으!!”
“주, 주영아!”
제 동료가 죽으리란 걸 인식했기에.
“…….”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송주영이라는 이름의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서 천천히 물러났다.
동료애인지 가족애인지.
홀로 남은 이는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탁―
으슥한 건물 내부.
한참을 이동해 대강 구석진 장소를 찾은 나는 어느새 기절해 버린 송주영이란 남자의 뺨을 후려쳐 억지로 잠에서 깨웠다.
빡!
“컥!”
‘착’이 아니라 ‘빡’ 하고 골이 울리도록 갈기자 단박에 기상해 주는 남자.
꽤나 고통스러운 듯 혼비백산해서 발버둥 치는 놈의 볼을 한 대 더 두들기자 그제야 허둥지둥 정면을 주시하는 녀석.
공포에 질린 눈과 덜덜 떠는 턱을 보아하니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명확하게 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일례로.
“이름.”
“소, 송주영입니다.”
대답이 무척 빨랐다.
죽고 싶지는 않은 듯.
그 덕에.
“소속.”
“성십자가 클랜입니다.”
아주 재미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성십자가?”
“예, 그렇습니다.”
“설명해 봐.”
“예? 아… 예. 그게, 성십자가 클랜은 제 견장에 있는 것처럼 ‘십자가’ 문양을 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목적은.”
“악인 토벌과 인류 구원입니다.”
대놓고 히어로를 표방하는 단체의 존재를.
“초, 총인원은 150여 명으로 보통은 다섯 개 부대로 나뉘어 있습니다. 마스터와 부마스터가 이끄시는 친위대를 시작으로 1대대, 2대대 순입니다.”
송주영.
이 녀석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소속된 단체의 기밀쯤이야 털어놓아도 된다고 여기는지 내가 묻는 모든 걸 거리낌 없이 설명해 주었다.
“마, 마스터의 지시입니다. 임무 수행 중에 붙잡히거나 했을 경우 어떻게든 사는 쪽으로 행동하라는…….”
이렇게 가벼이 구는 게 클랜의 방침이라는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며.
“저, 정말입니다! 마스터는 저희 같은 조직원들의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됐고.”
“…….”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지만, 바득바득 주장하니 넘어갔다.
성십자간지 뭔지 하는 그들의 내부 규칙 따위가 어떻든 간에 내가 관여할 바 아니기에 다 차치하고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날 잡으려 한 이유는?”
툭―
조금이라도 머리 굴리는 낌새가 보인다면 가차 없이 죽일 거라는 무언의 압박을 담은 물음에 송주영은 애처롭게 제 목젖에 닿은 손톱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떠듬떠듬 얘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우연이 겹치고 겹쳐 탄생한 기막힌 스토리였다.
“…그러니까, 도망친 놈들을 쫓아와 처리한 장소에서 조철영을 만났고, 그놈이 ‘식물 재배 능력자’를 탐낸 내게 공격받아 동료들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음을 주장하며 날 죽여 달라 의뢰했다?”
“예……. 그렇습니다.”
“헌데, 막상 찾고 보니 내가 수백 명을 학살한 살인마임을 알게 되어 당연히 악인일 거라 규정하고 생포하려 했다?”
“…예.”
성십자가 클랜이 악인들을 놓쳐 이 부근으로 오게 된 우연, 내가 조철영을 놓쳐 그들과 접촉하게 한 우연.
거기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불곰파와의 전쟁에서 벌인 학살극이 한데 섞여 나와 성십자가 클랜이 조우하는 운명을 만들어 냈다라…….
정말이지.
신지운이 예지몽을 꾸었다고 외치던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누군가 손수 설계하지 않고서야 이런 연출이 가당키는 할까 싶을 만큼.
그때였다.
“끼요우우우우우!!”
멀리서 익숙한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아까 전의 그 새였다.
“호크 아이!”
“호크 아이?”
송주영은 그것을 ‘호크 아이’라고 칭했다.
매의 눈?
그게 뭐냐고 묻고 팠으나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녀석의 반응에서 저 새가 추격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후우욱―
빡!
“컥!”
즉시 송주영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급박한 와중이었으나 녀석은 챙겨 가야 했다. 성십자가 클랜이 보이는 투철한 동료애. 그건 방패막이로써 활용도가 높았으니까.
덥썩―
송주영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건물 밖으로 나서자 후방에서 거대한 군세가 한 움큼 들이닥친다.
끽해야 50m에서 100m.
대담을 나누는 동안 코앞까지 접근한 모양이라 망설일 것 없이 전속력으로 공간을 갈랐다.
[돌진]
콰아앙!!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다시금 멀어지는 적들의 기운.
이대로라면 무리없이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여기던 순간.
“조자아앙!!”
우렁찬 고함과 함께 하나의 형체가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내 뒤를 따라붙었다.
20대 중반의 미청년.
“송 조장!!”
쿠웅!
쿵!
송주영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자.
“마, 마스터!!”
성십자가 클랜의 주인이며.
더불어.
띵―
[축하합니다!]
[「기적의 조각」이 설계한 ‘운명의 고리’가 실현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수 퀘스트 : 선택’이 부여됩니다.]
‘……!’
또다른 ‘조각’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