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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92화 (92/232)

92화

“…저기.”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차에 누군가 나를 불러 깨운다.

신지유였다.

무슨 일인가 눈짓으로 묻자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소녀.

“저… 제가 씨앗 좀 키워 드릴까 해서요…….”

밥 시간이기도 하니.

받은 것도 있으니, 제 능력 안에서 상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 주고 싶은지 드라이어드를 불러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아주 반가운 결심이었다.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그걸로 야채를 재배해 먹으려면 짧아도 두 달은 더 필요한 데다 수확을 할 수 있으리란 확신도 없었던 차라 무리가 안 된다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으니까.

“곽재우.”

“예.”

“다…는 힘들겠고, 딸기, 상추, 고추 정도만 가져와.”

“예!”

한세정들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신지유가 직접 나서 주자 함박웃음을 보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곽재우와 합심해 1층을 오가며 자리를 마련해 나갔다.

그 덕택에 순식간에 차려진 텃밭에 살포시 무릎을 굽히고 앉은 신지유가 중얼거리자 이슬비가 내리듯 공중에서 빛무리가 흩뿌려진다.

“드라이어드. 힘이 닿는 데까지 키워 줄래?”

사아아아아아―

톡―

톡톡―

흡수되는 빛의 양이 늘어 갈수록 서서히 발아해 나가는 씨앗들.

조철영 무리에게서.

또 우리에게 본인을 증명하는 등 단시간 내에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한 탓인지 양이 많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소중한 결실이 하나둘 제모습을 찾아간다.

상추와 고추에 후식으로 먹을 딸기까지.

쿵―

“고기 구울게요!”

고기와 곁들이기 알맞은 채소의 등장에 우린 어느 때보다도 풍족하며 균형 잡힌, 그야말로 만찬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신지유나.

“누… 어? 고기! 고기에요?!”

“신지운! 밥상 앞에서 시끄럽―”

“괜찮아. 지운이라고 했지? 난 한세정이라고 해. 와서 같이 먹자.”

“넵!”

음식 냄새에 이끌려 나중에 합류한 신지운도 정말 오래간만에 한 포식에 꽤나 행복해 보여 여러모로 흡족한 한 끼였다.

* * *

“오빠! 여기, 커피.”

“아, 고마워.”

“네! 헤헤. 옆에 있어도 되죠?”

거나하게 챙겨 먹고 휴식 겸 창가에 앉아 밖을 구경하던 내 곁으로 다가온 한세정이 어렵사리 구한 믹스커피를 건네며 살포시 앉는다.

그새 씻고 왔는지 깔끔한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는 날 따라 별이 빽빽하게 들어선 밤하늘을 감상하며 한동안 고요한 침묵을 즐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멍하게 보내는 시간.

‘안전지대’의 회복 효과와 맞물려 뭉쳤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 없어질 즈음 한세정이 나지막하게 묻는다.

“그, 어떻게 하실 거예요……?”

주어가 빠진 문장.

다만 직감적으로 신지유와 신지운에 대한 얘기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질문자의 속내가 어떠한지도.

물론 한세정도 제 마음을 숨기진 않았다.

“음……. 오빠만 괜찮으시면 저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지유가 있으면 농사도 해결되고, 또 지운이는 예지몽이라는 특이한 힘도 있고…….”

그녀는 신지유 신지운 남매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듯싶었다.

“무엇보다 아직 아이들인데 물자만 쥐여 주고 내보낸다는 게 좀 걸려서…….”

각종 미사여구를 더했지만, 실상은 말미에 덧붙인 문장이 본심일 터. 하여 나도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나 역시도 둘의 거취를 고심 중이긴 했다.

한세정의 말대로.

일반 등급 장비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

심지어 한 명은 ‘고유 능력’조차 개방하지 않았는데 저대로 내보냈다가는 애써 구한 목숨이 바스러지기 십상이었으니.

그렇기에 원래는 착호 부대 쪽으로 데려다주는 건 어떨지 고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착호 부대 쪽 쉘터에 가 본 적이 없어서 확언은 할 수 없으나 신지유의 능력이라면 어딜 가든 환영받게 될 테고, 신지운도 또래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그쪽에 머무는 게 여기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서.

한데 아예 동행이라.

“우리끼리 얘기하긴 좀 어려운 주제 같네.”

“그럼…….”

“다 불러와 줘. 모여서 논의해 보게.”

“아! 지유랑 지운이도 불러올까요?”

“그래야지. 두 사람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네!”

전체적인 견해를, 특히 아이들의 의지가 어떠한지를 들어 봐야 할 것 같아 모두를 불러 모았다.

함께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든 터라 그런지 어느새 제법 친해진 듯 나란히 걸어오는 다섯.

한세정이나 조이령뿐 아니라 의외로 곽재우마저도 알게 모르게 남매에게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였다.

‘…동생을 떠올리는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아픈 기억을 들춰 봐야 좋을 거 하나 없기에 서로의 과거에 관하여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스물한 살인 그의 나이를 감안했을 때 불곰파에 의해 죽은 동생의 나이대가 남매와 비슷할 테니.

허면.

곽재우는 높은 확률로 합류를 희망할 거고.

‘남은 건 조이령인데…….’

“팔은 어때?”

“다 나았어요! 포션을 써 주셨다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

“에이, 뭘. 그리고 감사 인사는 나 말고 저기 아윤 오빠한테 해. 오빠가 너하고 지유 구하는 데 진짜 열심이셨거든.”

“정말요?”

“그러엄.”

슬쩍 지켜본 바로는 조이령 또한 남매를 친근하게 대하는 게 딱히 반대하진 않을 기색이었다.

물론.

앞에서 어울린다고 하여 무조건 일행으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으니, 확실하게 찬반을 피력하도록 의견을 구했다.

“…해서 모두 불러와 달라고 말했다. 너희는 어때?”

설사 반대한다 해도 상관없음을 재차 삼차 알리며 꺼낸 안건.

“저는 찬성이에요. 제가 먼저 이야기 꺼내기도 했지만, 아이들끼리 버티기에 바깥은 너무 위험해 보여서…….”

“음……. 저도 세정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무작정 감정적으로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스랄레오를 사냥하면서 식량도 넉넉하게 비축했다지만 언제 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유가 있다면 그 부분을 해결하는 데 큰 힘이 될 테니까요.”

“저는 형님의―”

“내가 아니라 너는 어떤지 묻는 중이야.”

“…저도 좋습니다. 애들을 내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또, 일행이 늘어나면 형님의 목표를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은 만장일치.

마냥 감정적이지도 않은,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근거가 더해진 찬성이었다.

“오빠는… 어떠세요?”

셋의 이야기가 끝난 후.

한세정이 대표로 내게 물었다. 우리는 이러한데 너는 어떠하냐고. 이제 내가 입장을 밝힐 차례였다.

하여.

“나는.”

심사숙고해 정한 생각을 털어놓기 위해 입술을 떼자마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한세정들뿐 아니라 옆에서 우리 얘기를 경청하던 신지유 신지운 남매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쫑긋 세운 상태.

그런 탓에 일순간 공기의 흐름까지 정지될 듯한 공간 속에서 차분하게 얘기했다.

“좋다.”

좋다고.

본래 구상하던 바와는 다른 결론. 이리된 까닭은 전적으로 한세정들의 주장이 타당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혹은.

내심 누나의 그림자가 엿보였던 신지유를 보호해 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건 내 종합적인 판단은 일행으로서 받아들여도 좋다는 것.

그 공표에 도합 다섯 명의 얼굴이 환해진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명의 일행이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 *

“허억, 헉…….”

완연한 흑야가 내리깔린 도심.

누군가 가쁜 숨을 내쉬며 수십 개의 건물을 지나고 몇 갈래의 도로를 넘는다. 땀과 피로 온몸이 젖은 그는 휘광 교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조철영이었다.

‘씨ㅂ, 그놈은 대체……!!’

혹여라도 그 의문의 남자가 뒤쫓아 올까 한시도 쉬지 못하고 달리는 그의 뇌리엔 온통 맥없이 쓸려 나가던 사람들의 학살극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반항은커녕 자신을 제외하곤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던 참극.

도대체 뭘 처먹고서 강해졌길래 혼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걸까. 아무리 되짚어 봐도 수준을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레벨의 괴물.

그나마 알아낸 점이라고는.

최후의 수단이었던 고유 능력 ‘허물 벗기’. 이제껏 몇 번이나 목숨을 구제해 준 그 비기가 없었더라면 똑같이 짓뭉개져 세상을 하직했을 거란 끔찍한 사실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침을 잔뜩 발라 두었던 애장품을 빼앗긴 걸로도 모자라 지지 기반까지 통째로 잃어버리고도 이리 도망만 쳐야 하는 치욕적인 현실이 조철영의 감정선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복수하고 싶었다.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점을 한 조각, 한 조각씩 떼어 내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문제는.

힘이 없다는 것.

‘젠장할……!!’

인정하긴 싫지만,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격차 때문에 이가 갈리고 눈에 핏줄이 서도 멀리 달아나기만을 반복해야 했다.

100m, 200m, 300m…….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지고자 얼마나 달렸을까.

“허어억, 허억……. 죽겠―”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라 도저히 더는 뛰지 못할 지경에 다다르던 차에.

“으아아악!”

“끄아아아악.”

‘……?!’

전방에서 날아든 몇 개의 ‘비명’이 조철영의 고막을 자극했다.

한둘이 아니었다.

적게 잡아도 다섯 이상.

‘뭐…지?’

앞쪽에서 들린 걸로 보아 그놈은 아니다. 그걸 인지하자 조철영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현재 자신은 모든 걸 잃은 상황.

이런 꼴로 떠돌아다녀 봐야 머지않아 불행한 결말이나 맞이할 터. 따라서 생존하려면, 나아가 재기하려면 사람을 구해야 한다.

“가자.”

결정했다.

가서 도와주기로.

몇 명이나 되는지, 정말 도와줄 만한 이들인지는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단 가 본다.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생명의 빚’보다 좋은 건 없으니까.

“흐읍!”

타앗―!

결단을 내리자마자 움직이는 다리.

한계에 도달한 육체를 채찍질하며 달리길 30여 초, 마침내 도착한 비명의 진원지에서 조철영은 어느 뻥 뚫린 공터에서 사방을 가득 채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손수 창조해 낸 빛줄기 아래.

갑옷을 포함한 장비 여기저기, 또는 팔뚝이나 이마 등 신체 곳곳에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은 대규모 집단을.

‘…조폭?’

그들을 처음 봤을 땐 조폭인 줄로만 알았다.

보통.

동일한 문신을 하고 다니는 집단이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들이었기에. 하지만 금세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 살려…….”

“네놈으로 인해 죽은 이가 다섯이다. 자기방어였다면 모르되, 본인의 재미와 욕망을 채우고자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으면 살기를 바라지 말도록.”

콰직!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이라면, 누굴 죽이면서 저런 고상한 대사를 읊진 않을 테니.

그럼 누구지?

‘아냐,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조철영은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저들이 누구든 간에.

악인을 혐오하는 듯한 발언으로 볼 때, 저들을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매우 매우 재미난 광경을 연출해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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