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 *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어느 도심 한복판에 있었고, 수많은 괴물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무서웠다.
살고 싶어 여기저기 구해 달라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 주질 않았다.
죽음.
괴물의 이빨에 새겨진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단어가 내 심장을 물어뜯으려 한다. 나는 꼼짝없이 잡아먹히리란 현실에 암담해져 눈을 감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기원하며.
‘도와줄 테니까 저리 가 있어.’
그러던 차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은 건.
‘……?’
멍하니 시선을 들자 한 남자가 보였다.
‘이것도 병이지, 틀림없이 정신병일 거야.’
나를 등진 그는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괴물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제각기 이빨과 손톱을 내밀며 으르렁거렸으나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내딛는 발걸음 앞에는 오직 승리만이 기록될 따름이었다.
‘아…….’
―어린 소년의 꿈속에서
* * *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제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도로를 넘어오신다면 적대 의사가 있음으로 여기고 공격하겠습니다.”
얼어붙은 사람들을 응시하며 무덤덤하게 읊어 내려 가는 당부.
모쪼록.
피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한마디에 침묵이 내려앉은 지 3분 정도 흘렀을까. 조용하던 무리를 반으로 가르며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일전에 보았던 남자.
남들이 괴물들과 싸우는 동안 홀로 신지유 신지운 남매를 데리고 뒤쪽에 빠져서 전투를 관망하던 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요. 조철영입니다.”
꽤나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조철영.
바람을 타고 흐르는 그의 음성은 아주 중후했다. 만일 일종의 내부 고발 같은 신씨 남매의 주장을 전해 듣지 않았더라면 그저 ‘예의 바른 사람’이라 여겼을 정도로.
목소리가 가지는 매력이 상당히 높은 타입이랄까.
검도관 사범이라더니.
성우를 했어도 성공했을 타입이었다. 그래 봐야 미성년자 성추행범에 강간 미수범 따위의 개새끼라는 실체가 까발려진 뒤라 별로 정감이 가진 않지만.
물론.
여전히 가슴 한쪽에는 일말의 가능성은 남겨 두고 있다.
회상 중간마다 신지운이 그 증거라며 신체 곳곳에 새겨진 멍이나 흉터 등 수십 개의 상흔을 내보이며 그간 학대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거의 100에 99는 확신하고 있으나, 결국 100%인 건 아니니…….
“씨앗과 비료 등 물자는 충분히 나눠 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받았다.
무미건조한 어투에 은은하게 투기(鬪氣)를 담아 내뱉는 언사에 조철영의 눈썹이 살짝 좁아진다.
자존심이라도 상한 건가.
하기야.
리더로서 자리매김한 뒤로 이어진 사람들의 깍듯한 대우에 이제는 예우받는 게 당연한 지경에 이르렀을 터인데, 벌써 두 번을 쌀쌀맞게 응수했으니 드높아진 프라이드에 스크래치가 날 만도 하지.
그나마 일전에는 물자라도 나눠 줘 화가 풀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거니와 안 그래도 제 식량 공급원을 빼앗겨 반감이 베이스로 깔린 형편이었으니까.
그래도 연거푸 실력 행사를 한 보람이 있었나.
“…저희가 이리 찾아오게 된 건 다름 아니라 한 가지를 여쭤보기 위함입니다.”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부드러운 말투로 방문 목적을 설명하는 조철영.
“혹시 이곳으로 중고등학생쯤 되는 학생 두 명이 오진 않았는지요.”
“…….”
“보셨다면 부디 제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잔머리가 좋은 것인지.
혹은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스토리를 짜 두었던 건지. 조철영은 차근차근하게 신지유 신지운 남매의 ‘악행’을 설파해 나갔다.
“저희는 그 두 명을 꼭 잡아야 합니다. 그놈들 때문에 저희 일행들이 크게 다쳤습니다.”
“…일행이 다쳤다?”
“그렇습니다! 한 달 전쯤 아사(餓死)하기 직전의 상태로 길거리를 배회하던 녀석들이 불쌍해 거둬 줬건만, 배가 부르자 거둬 준 은혜를 저버리고 여기 이분을 강간하려고 하질 않나.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고 훈계를 좀 했더니 앙심을 품고 근처에서 괴물들을 몰고 와 휴식 중이던 저희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
“더구나 누나라는 녀석은 동생을 따끔하게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제 동생을 혼냈다고 저희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그로 인해 보시는 것처럼 저 두 분은 심각한 상처를 입으셨죠. 심지어 한 분께서는…….”
구구절절한 조철영의 강변에 따르면 신씨 남매는 사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이 세상에 소악마(小惡魔)가 있다면 그게 저 둘이 아닐까 싶은.
그런 탓에.
머릿속으로 조철영과 이덕구를 동일시하던 나는 그의 성토가 거듭될수록 가슴의 추가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음.”
마음은 신지유 신지운 남매에게 기울어져 있으나, 어느덧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분통을 터트리는 태도를 보아하니.
불현듯 소년범들의 장난에 휘말린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인 범죄만큼이나.
아니.
어떤 면에서는 성인 범죄보다 더 악독하고 잔인한 개 짓거리를 일삼는 소년범들. 나라고 당하지 않을 재간이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골치가 아파졌다.
신지운의 엉망이 된 신체 상태가 걸리긴 하는데.
“아내가 강간당할 뻔한 걸 알고 형두 씨께서 흥분해서 때린 게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다지만,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건 결코 애들이라고 해서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기에 저희는 두 녀석을 잡아다가 합당한 처벌을 할 겁니다. 그러니 알고 계신다면…….”
저리 말하니 근간이 흔들리기는 한다.
하여.
“오빠.”
“세정아, 가서 둘 데려와.”
“…네?”
“이유는 묻지 말고.”
고심에 고심을 기해 결단을 내렸다.
둘을.
“오빠, 데려왔어요.”
“넘겨줘.”
“…오빠?”
내어 주기로.
“저기, 지금 그게 무슨…….”
“혀엉……?”
“보내 줘.”
심증 외에 자기 입장을 명확하게 입증할 열쇠가 없다면, 어느 쪽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그게 내 결론이었다.
누나의 그림자?
만약 신씨 남매가 정말 상종 못 할 소년범이라면, 나는 누나의 이름에 지울 수 없는 먹칠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보내.”
“…네.”
속 시원하게 건네주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아, 아저씨?!”
“형……?”
이런 내게 충격을 받은 듯 당황해 소리치는 신지유와 신지운.
한세정도 당혹스러운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냈지만, 나는 결코 지시 사항을 번복하지 않았다.
외려.
망설이는 한세정을 대신해 직접 두 남매를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자식들!!”
“감히 구상이 형을 죽이고 도망쳐?!”
“거기 숨어 있었구나!”
남매를 인도하자.
다시는 놓칠 일 없을 거라 선고하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욕설을 퍼붓거나 창칼을 쥐고 흔들며 둘을 둘러싸는 사람들.
“…감사합니다. 추적 능력이 있어 쫓아오긴 했지만, 혹시나 저놈들에게 속아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는데, 제 말을 믿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러는 사이 조철영이 내게 꾸벅 허리를 숙인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붙잡은 것처럼 감격한 그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양 숨을 몰아쉬며 감사를 표하고는 재차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서서히 점이 되어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훌쩍 몸을 돌렸다.
“저기, 아윤 오빠…….”
그런 날 부르는 한세정.
할 말이 많은 듯한 그녀를 뒤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조이령과 곽재우가 우리에게 달려온다.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묻고 싶은 모양.
더군다나.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애들은 왜 데리고 나간 거예요?”
느닷없이 남매를 소환해 낸 탓에 궁금증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이에.
슥―
난 손을 들어 조이령의 질문을 막아 세운 후.
세 사람을 돌아보며 모두에게 얘기했다.
“곧바로 나갈 거니까 다들 장비 챙겨.”
“네?”
99가 100이 될지.
또는.
1이 100이 될지를 직접 확인해 보러 가자고.
* * *
“철영 씨.”
휘광 교회 안.
의문의 남자로부터 식량 공급원을 되찾아온 조철영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깊게 감았던 눈을 뜨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의 시야 끄트머리에는 무릎이 꿇려진 신지유와 신지운이 있었다.
저벅―
저벅―
조철영은 절망 어린 낯빛으로 굳어 있는 남매 곁으로 다다라.
스르릉―
한마디 말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우연찮게 발견한 ‘차원 상점’에서 무려 근원석 100여 개를 투자해 구매한 명검. 리더의 지위를 이용해 거머쥔 칼날이 창가를 넘어 드리워진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린다.
조철영은.
후우욱!
서걱!
그걸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아아악!!”
“지, 지운아!!”
후두두둑―
서슴없이 휘두른 참격에 옷자락이 잘리며 베여 나가는 신지운의 팔뚝.
검도관 사범이었던 전직에 맞게 정교한 칼솜씨로 살갗만 갈라 내는 기예에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솟구친다.
“그러게, 왜 도망쳤어.”
조철영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통증으로 몸부림치는 신지운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로지 신지유만을 주시하며 읊조렸다.
그 소름 돋는 문장에 부르르 떠는 소녀.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오늘로서 개의 목에 채워져 있던 목줄이 풀려 버렸다는 걸.
“하마터면 널 잃을 뻔했잖아. 그랬으면 이 오빠가 얼마나 슬펐겠니.”
텁―
그 속내를 알려 주듯.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본 신지유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뜻일 터.
“으음, 웃어야지. 넌 웃는 게 예뻐.”
조철영은 그런 소녀의 입꼬리 양쪽을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선언이었다.
네 생각대로, 이 시점부터 더는 너의 인격이 존중받길 바라지 말라는. 그 선포와 동시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도장을 찍으려던 찰나.
“더러운 새끼.”
신지유의 입술이 움직였다.
“…응?”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를 즐기며 30cm 남짓까지 다가갔던 조철영은 귓가를 자극하는 육두문자에 일순 멈칫거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잘못했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더러운 새끼’? 이거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순간 이해되지 않은 대사에 벙찐 표정으로 신지유를 보는데.
“이쯤이면 됐죠?”
소녀의 입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이번엔 물음이었다.
“대체 뭐라는―”
당최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 행동에 반문하려던 그때.
“확인했다.”
어디선가 낯선 말소리가 들렸다.
왠지 익숙하기도 한 어조.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콰아앙!
“……!!”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에 뜬금없이 폭발음이 울려 퍼지더니, 무의식적으로 소음의 근원지를 쳐다보려던 눈앞에.
탁―
“세상엔.”
그 음성의 주인이.
신지유와 신지운을 숨겨 주었던, 그러나 어째서인지 쉽게 양보해 주었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개새끼가 많아도 너무 많아.”
후우우우우욱!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