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소환 :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우우우우웅―
손끝을 통해 빠져나간 마력을 양분 삼아 태어나는 생명.
어째서인지 자신이나 동생 외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그마한 정령이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배시시 웃는다.
그 어떤 속내도 없는 순수한 미소.
아쉽게도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었으나,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쌓인 아픔과 슬픔을 씻어 주는 드라이어드에게 눈인사를 건넨 신지유는 바닥을 가리키며 조용히 부탁했다.
“드라이어드, 열매를 맺어 줘.”
사라락―
주인의 부탁에 환한 얼굴로 응답하며 사르르 날아가 흙더미를 향해 팔을 벌리는 드라이어드.
갸날프기만 한 손길.
허나 이상하게도 포근한 그 자태에 텃밭 여기저기가 들썩인다.
우우우우우웅―
소모되는 마력 양이 늘어날수록 강해지는 떨림.
톡―
톡―
그러다 일시에 자라나는 줄기.
“아!”
“오오!”
금세 꽃이 핀다 싶은 차에 하나둘 열매가 맺히자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가 튀어나왔다.
토마토, 딸기, 수박 등등.
계절과 날씨에 필수 불가결인 시간 소모마저 초월하며 곧장 수확해 먹을 수 있는 식량의 존재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이거라면…….’
신지유도 마찬가지였다.
식량이야 저들이 먹고 남긴 걸 주워 먹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로써 며칠 간은 동생과 자신의 ‘진짜 안전’이 보장될 터.
끽해야 하루 이틀일지라도 그 기간만큼은 동생이 힘들지 않을 수 있음에 누나로서 안심됐다.
이를 증명하듯.
“수고했어, 지유야. 조금 이따가 나눠 줄 테니 가서 지운이랑 쉬고 있어.”
“네. 감사합니다.”
잠깐이지만 감시의 눈길에서 놓아주는 조철영.
물론.
놓아준다 해도 어차피 사방이 막힌 터라 도주가 불가하기에 허락되는 자유지만, 신지유는 동생을 풀어 주겠다는 약속에 꾸벅 머리를 숙이며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지 몇 분.
“누나!”
많이 고됐는지 땀 냄새가 나는 신지운은 거친 고생에도 불구하고 누나의 슬픔을 덜어 주려 씩씩한 모습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는다.
그게 누나를 더 슬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고생했지?”
“아냐! 나 하나도 안 힘들어! 내가 누구 동생인데?”
“하긴, 내 동생이면 이 정도는 거뜬하지.”
“그럼! 헤헤.”
밝은 기운을 내뿜으며 대답하는 신지운과 담소를 주고받던 와중.
갑자기 주변을 쓱 살펴본 동생이 슬그머니 곁에 붙더니 팔을 꼼지락거린다.
‘…지운아?’
뭘까.
의아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에.
스윽―
슥―
허벅지 아래쪽에 뭔가를 적어 가는 동생.
살갗이 간질거리는 감각을 참으며 몰두하자 점차 읽히는 글자.
[ㅎ]
[ㅏ]
[ㄹ]
‘할…….’
[ㅁ]
[ㅓ]
‘머…….’
[ㄴ]
[ㅣ]
‘니, 할머니?’
첫 단어는 할머니.
그다음은.
[ㄲ]
[ㅜ]
[ㅁ]
꿈.
마지막은.
[ㄷ]
[ㅗ]
[ㅁ]
[ㅏ]
[ㅇ]
도망.
동생이 적어 둔 단어는 총 셋.
할머니, 꿈, 도망.
‘…예지몽?! 도망치는 예지몽을 꾸었다고?’
“헤헤.”
매우 직관적이라 단박에 내용을 해석하고선 커다래진 눈동자로 거듭하는 물음에 표정으로 화답하는 신지운.
꿀꺽―
그 확답에 신지유의 목젖이 크게 흔들린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슥―
스윽―
‘……?’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이야기에 격동하는 신지유의 허벅지를 붙잡고 다시금 손가락을 끄적이는 신지운.
[소리 듣고, 냄새 맡아서 꽃이 필 때 괴물들이 와, 그때 창문, 남자에게 갔어. 그분이 도와줬어. 해 보자!]
끝자락에 사견을 달아 선명하게 쓰이는 문장에.
‘…….’
신지유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동생의 예지몽대로 탈출을 감행하느냐 마느냐. 실패했다간 조철영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추측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지옥이야.’
그래.
성패에 상관없이 지옥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실행해야 한다.
끄덕―
“배 많이 고프지? 곧 어른들이 과일 가져다주실 거야.”
“응!”
누나와 동생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
콰아앙!!
예지몽이 현실이 되었다.
【 박멸 】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엉망이 되어 버린 교회.
애써 봉해 두었던 대여섯 개의 창문이 죄다 박살 난 현장을 바라보며 불같이 화를 토해 내는 조철영의 노기에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허나.
“이런 X!”
조철영의 노여움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식량에 정신이 팔려 있다 갑작스런 괴물들의 난입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목전에 두었던 과일들이 전부 부서진 건 둘째치더라도.
앞으로도 그 식량을 공급해 줘야 할 신지유가 도주한 걸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다 죽어도 그년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보물인데 그걸 놓치다니.
그토록 신경 써라 일렀건만.
“이런 병X 같은 놈들!”
“죄, 죄송합니다!”
“닥치고 추적부터 해!”
“에, 옛!”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행태에 극대노한 조철영의 노호를 피해 보고자 서둘러 무기만 챙겨 뛰쳐나가는 사람들.
“이쪽이야!”
다행히 추적에 능한 이가 있어 뒤늦게나마 쫓아가는 길일지언정 추격 속도는 제법 빨랐다.
단지.
문제는 그 도주로의 끝이.
“여, 여긴…….”
“아까 거기잖아!”
농자재 백화점.
즉.
일격에 건물을 뭉개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능력을 지닌 기이하고 경악스런 남자의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어, 어쩌지?”
“분명 가까이 다가오면 공격하겠다고…….”
아직도 그가 선보였던 장면이 기억에 선하게 남아 자동으로 전신이 굳어 버린다.
이는.
“젠장.”
조철영도 매한가지.
무리를 이끌며 근원석을 자주 복용해 일반적인 레벨은 넘어섰다 자신하지만, 그 의문의 남자와 겨룬다고 가정하면…….
아니다.
굳이 일대일로 싸울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한 명이야. 제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스무 명이나 되는 우리와 겨루고 싶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가서 협박만 적당히 하면 됩니다. 계속 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모두 가자!”
이쪽은 스물이나 되는 훌륭한 고기 방패가 있었다.
정 안 되면.
다 투입하고서라도 죽여 되찾는다. 조철영은 그리 되뇌며 전진해 나갔다.
* * *
“…해서, 사흘 전에 내가 나타나 너희를 도와주는 꿈을 꿨다고?”
“네!”
“…….”
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당함을 넘어서 터무니없는 대답에 한동안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꿈으로 날 봤다니 말이나 되는가.
공간도 넘나들고 하는 마당에 예지 능력 정도야 당연히 실존할 법하다지만.
“고유 능력으로 예지몽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지운이는 아직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어요.”
“…뭐?”
“대신… 지운이에게는 ‘신기’가 있어요. 진짜로요.”
신지운의 경우는 그러한 시스템의 영역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흔히 무당들이 가졌다는 신기(神氣).
접신을 하거나 점을 쳐서 누군가의 과거나 미래를 읽어 내게 해 주는 그 힘이 예지력의 원천이었다.
이러니 선뜻 신뢰하기가 어렵다만, 그렇다고 또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지도 못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단박에 은신 중이던 나를 정확히 짚어 낸 전적이 있었으니까.
더욱이.
“할머니께서 무당이셨어요. 지운이도 그래서 가끔 귀신이 들려서 미래를 보거나 한다고……. 제가 드라이어드라는 나무의 정령을 고유 능력으로 얻게 된 것도 같은 이유일 거예요. 저는 초목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셨거든요…….”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터라.
황당무계하다고 느끼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오게 됐어요. 지운이가 그―”
“아윤이다.”
“…아, 네. 아윤 님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
소녀 신지유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의 주장을 받아들여 도망쳐 오긴 했지만, 진정으로 내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보니 자칫 거절당할까 걱정스러운 듯했다.
혹은.
기회라고 여겼던 희망이 울타리만 바뀐 절망으로 치닫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걸지도 몰랐다.
확률을 따지자면 필시 후자일 것이다.
육체와 정신을 모조리 짓밟힌 탓에 더 이상 인간이라는 생물을 대함에 있어 친근감과 기대보단 두려움과 공포가 앞서 다가올 테니. 그럼에도 신지유가 내게 손을 내민 건, 본인이 ‘누나’이기 때문일 터였다.
동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동생이 안전해질 수 있다면, 동생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시도할 각오로 가득한.
흡사.
저 하늘 위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극단적인 헌신의 발로.
그래서였을까.
“…이령아.”
“네?”
“가서 따듯한 물 좀 끓여 줘. 달려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아, 네!”
“재우는 이령이와 집을 지키고, 전투는 세정이와 간다. 되도록 대화로 풀어 볼 테지만… 선을 넘으면 싸운다. 신호 주면 망설이지 말고 베.”
“당연하죠. 불곰파 개새끼들이랑 똑같은 작자들인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저기…….”
“가서 쉬고 있어라. 귀신인지 뭔지가 보여 줬다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나는 깊게 고민할 수가 없었다.
단발성이 될지, 연속성 있는 원조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저, 정말요?”
“거봐! 누나! 내가 뭐라 그랬어!”
이 남매의 부탁을 적어도 한 번은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한세정을 처음 대면하던 날처럼. 신지유의 극단적인 헌신에서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던 ‘누나의 그림자’가 엿보였으니까.
‘이것도 병인가.’
그럴 거다.
누나와 관련된, 누나를 회상하게 하는 인물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마음이 병이 아니면 뭔가.
틀림없이 정신병일 거다.
다만.
알면서도 결정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연결되지 않은 인연이었으면 몰라도, 이미 누나라는 교집합으로 맞닿아 버린 운명이었다.
그런 이를 가시밭길로 내몰고 싶진 않았다.
“그런 아픔을 겪는 것도 나 하나로 충분하고.”
“네?”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
“…네.”
“준비됐으면 가자.”
“네! 이령아! 재우 씨! 갔다 올 테니 집 잘 부탁해!”
“여기야 방벽도 있고 하니까 걱정 말고, 너나 위험하면 바로 들어와. 오빠도 몸조심하세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잡념과 회상을 비워 내며 한세정과 거점 밖으로 나가는 길.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혹한의 방벽을 지나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때마침 앞쪽 공터에 진입하는 게 시야에 잡혔다.
“어디야!”
“저쪽! 저쪽이야!”
“이 개자식들! 그렇게 먹여 주고 도와줬더니 도망을 쳐?!”
몹시도 흥분한 기색의 스물 남짓한 남녀.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퍼포먼스용으로 파괴했던 장소를 통로 삼아 건너온 이들은 씩씩거리며 달려오다 날 발견하고서 우뚝 멈춰 섰다.
보통 화가 치밀어오르면 터널 시야가 되기 마련인데.
그만큼 아까의 연기가 저들의 영혼에 확실히 각인되었다는 의미겠지.
하면.
우우우우웅―!
[오르그의 파괴 본능]
콰아아아앙!!
이번에도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데엔 이보다 좋은 연출이 없으리라.
“정지.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습니다.”
“…….”
“…….”
역시.
효과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