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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87화 (87/232)

87화

‘막아야겠군.’

나서야겠다.

나는 결심을 내리고 몸을 날렸다.

거점으로.

막아야 한다 다짐해 놓고 복귀라니, 누군가는 이런 날 보고 모순이 아니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이 길이 옳다고 여겼다.

현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창칼이 난무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부드럽고 둥글둥글하게. 그러려면 옆구리나 뒤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거점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쳐야 한다.

그러고는 대화를 기반으로 무난하게 풀어 나가야겠지.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도록.

물론.

아무 준비 없이 만났다가는 도리어 쓸데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단초로 작용할지도 모르니.

공연히 그러지 못하게끔 대면에 앞서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곁들일 예정이었다.

‘건물 한 채 정도면 되려나.’

감히 상상도 못 할 힘으로 겁을 주겠다는 뜻이다.

어쩐지 광대가 되는 기분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양방이 무사하게 해결된다면야 상관없었다. 나는 사람 죽이는 데 맛들인 사이코패스가 아니기에.

불곰파와 같은 악인.

또는 먼저 칼날을 들이밀지 않은 한, 일전에 착호 부대 군인들을 무탈하게 방면해 주었던 것처럼 사람을 상대로는 가급적이면 피를 보지 않길 소원했다.

뭐.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매몰된다면 가차 없이 이빨을 드러내겠지만 말이다.

* * *

거점 앞.

삑―

삑―

삑―

삑―

한달음에 돌아와 4급 신호를 보낸 나는 머릿속으로 카운트를 세며 적당한 건물을 찾았다.

퍼포먼스용으로 파괴할 만한 폐건물은 수두룩해서 표적을 정하는 건 금방이었다.

탁탁―

‘이거면 되겠어.’

농자재 백화점에서 20m가량 떨어진 휴대폰 판매점.

몇 번이나 오가며 가져갈 만한 건 모조리 회수해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축물이 돼 버린 데다가 단층에 20평이 안 될 소형 상가라 부수는 과정에서 잔해나 붕괴로 인한 2차 피해도 없을 듯한 이곳.

여기가 내가 지정한 과녁이다.

꽈아아아악―

“후.”

됐다.

배우와 무대는 세팅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관객들의 입장.

“앞으로 5분 정도.”

방금 전의 조우로 사람들의 이동 경로와 도착 예정 시간까지 대략적으로나마 계산이 가능한 터라.

나는 완벽한 타이밍을 맞추고자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목소리.

누구든 인간의 육성이 들리는 순간, ‘투르바의 포효’로 괴물이 있는 듯한 연출을 해 개연성을 확보하고 곧바로 주먹을 내질러 상가를 송두리째 소멸시킨다.

오로지 단 일격.

그걸로 내 힘을 증명하고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저깁니다!!”

“아아! 정말 다 왔다! 바로 앞이다!”

‘왔다!’

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던 나는 드디어 들린 누군가의 외침에 가슴을 짓누르던 마력을 세상에 쏟아 냈다.

[투르바의 포효]

“후으으읍, 크아아아아아!!”

후화아아아악!!

삽시간에 일대를 뒤흔드는 음파.

소리가 만들어 낸 강렬한 폭풍이 화려하게 날아오르며 점차 가까워지던 이들의 고막으로 파고들어 가자.

“뭐, 뭐야!”

“괴물인가?! 전원 전투태세!”

“선두, 방패 들고 따라와!”

고지를 앞에 두고 환호하던 이들의 어투에 실리는 당황스러운 감정.

뒤이어.

타다다닷―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스테레오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30m, 20m, 10m.

‘지금.’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로 넘어갈 차례였다.

우우우우웅!!

[스트랭스]

[돌진]

[순간 회귀 : 오르그의 오른팔]

“하!”

짧게 기합을 더하며 굽혔던 무릎을 쫙 펴고 도약하길 잠시. 일순간에 풍경이 바뀌며 타깃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와 동시에.

[오르그의 파괴 본능]

콰아아아아앙!!

거대해진 주먹이 콘크리트를 때렸다.

작정하고 후려친 공격은 마력이라는 양분을 토대로 멀쩡했던 건축물을 이 땅에서 삭제시켰다.

표현하자면.

‘파멸적인 위력’이란 수식어가 퍽 어울리는 파괴력이었다.

정말이지.

“저, 저게 무슨…….”

“건물이, 사라졌어?”

“사…람?”

“후.”

때마침 스테이지에 발을 디딘 관객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연주였다.

스윽―

나는 먼지와 눈이 뒤엉켜 비산하는 달빛 아래서 허리춤을 뒤져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근원석 하나를 슬쩍 꺼내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담담한 눈빛으로 뻔뻔하게 거점으로 돌아가는 모션을 잠시 보여 주다가.

“……?!”

후욱!

탓!

아주 적절한 때에 시선을 옮겨 사람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누구인가.

우우우웅!

당장에라도 공세를 펼칠 듯 피워 올린 마력.

“…아, 아닙니다!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진정! 진정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그저…….”

설계한 대본을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연기해 낸 직후 직면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단순히 ‘겁을 먹었다’라는 수준은 진작에 넘었고.

대체로 넋을 잃거나, 경악하거나, 심지어는 공포를 내비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이에.

‘먹혔다.’

확신할 수 있었다.

걱정하던 사고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물론.

일시적인 공황에 불과하기에 틈을 주면 회복할 테니.

“…누구십니까. 여긴 제가 자리 잡은 거점입니다. 더 이상 다가오신다면 싸우겠다는 의미로 간주하고 공격하겠습니다.”

한 번 쥔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강하게 나갔다.

타협을 하든 협상을 하든.

칼자루는 이쪽이 쥐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줘야 거래 이후에도 평안한 이별을 할 수 있는 법.

그 점을 명확히 하며 으르렁거리듯 한 걸음 내딛자,

콰직!

무력하게 깨져 나가는 아스팔트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조여진다.

다만.

뭐든 무작정 조이기만 하면 터져 버리는 만큼 적합한 시기에 물꼬를 터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곳에 오신 걸 보면 물자가 필요한 듯한데, 이대로 돌아가신다 약속하신다면 따로 대가는 받지 않고 씨앗과 비료를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대로 돌아가신다는 약속만 하시면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 그러겠습니다!!”

“당연히 돌아갑니다!!”

난데없는 난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이들은 내가 순순히 베풀어 주겠다 제안하자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가로막혀 힘들게 여기까지 온 보람도 얻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야 하는 건가 애만 태우고 있었는데 성과가 생겨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

‘좋아.’

나는 그 리액션에 내심 손뼉을 쳤다.

보고 있자니.

애써 시나리오를 짜고 광대 짓을 한 노력이 빛을 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실제로도 그러했다.

“여깄습니다.”

쿵―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이 전부 넉넉하게 챙겨 갈 만한 양은 아니었지만, 물자를 넘겨받은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약속을 지켰으니까.

“됐다! 됐어! 어서 돌아가자고!”

“제가 알기론 이 근처에 커다란 교회가 있습니다! 우선은 그리로 가서…….”

“그거 좋겠네. 거기로 가자고!”

조금은 신기한 장면이었다.

막상 그림을 그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그 결의가 무색하리만치 이리 쉽게 마무리될 줄이야.

기껏해야 씨앗.

바로 먹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에 대단하다고.

“…그 남매도 그렇고, 하나같이 이해 안 되는 것투성이네.”

납득이 되진 않지만.

나는 어둠 깊은 곳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내 신경을 거두었다. 평화적으로 잘 정리되었으니 그거면 됐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

추후에 재차 찾아와 더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지만 않는다면, 황수현 일행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기부한 셈 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 * *

그날 저녁.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인스턴스 던전에서 나온 한세정들에게 사람들과 있었던 얘기를 해 줬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했다는 식의 스토리를 설명해 줘야 재고량에 변동이 생긴 연유도 납득하기 편하기에.

농사 쪽으로는 다들 소질이 없는지 여전히 지지부진하지만, 재고 관리는 철저해야 한다.

더불어.

논의해야 할 안건이 또 있다면.

“신호를 보내셨다고요? 어… 못 받았는데……?”

신호는 갔으나 응답이 없었던 ‘고주파 신호기’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미리 인스턴스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사냥감을 유인해 입구 근방에서 사냥하도록 정해 두었다.

던전 내부가 상당히 넓고 큰 탓에 자칫 신호가 닿지 않는 10km 거리 제한을 넘길 수도 있어 이를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헌데.

그리했음에도 신호가 전해지지 않았다.

“다른 공간이기 때문인가?”

음.

아마도 그런 듯했다.

인스턴스 던전은 엄연히 현실에 속하지 않는 ‘다른 공간’. 따라서 입구가 열려 있고, 또 그 인근에서 대기한다 하더라도 연결이 끊어지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쩐다.

“어쩌죠……?”

“사냥에 전념해.”

“네?”

외외로 답은 간단했다.

“신호기를 사용해야 할 것 같으면 내가 입장할 테니 너희는 바깥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성장하는 데 주력해.”

인스턴스 던전은 일반 던전만큼이나 출입이 자유롭다.

고로.

현실에서 안 보내진다면 입장하면 될 일이었다. 거점을 보호하는 ‘혹한의 방벽’이 셋을 데리고 나올 시간을 너끈히 벌어 줄 터.

“아, 그렇긴 하네요.”

“그보다 사냥은 어때.”

해서 내 이야기를 마치고 한세정들의 무용담으로 주제를 넘겼다.

“참! 안 그래도 저 이제 2등급 개체도 무난하게 사냥하고 있어요! 이령이랑 재우 씨도 둘이서 함께 싸우면 비등비등하고.”

“많이 좋아졌네.”

“그죠? 헤헤…….”

장비에 이어 인스턴스 던전에서 드랍되는 근원석을 남김없이 복용 중인 덕분인가.

1등급 개체도 겨우 처치하던 이들이 이제는 2등급 개체와 자웅을 겨룬다.

스랄레오들의 공격법이 워낙 일차원적이고 단순해 가능한 결과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런 성장세라면 ‘이벤트 : ?’가 개시되더라도 제 몫을 해내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 없으리라.

딱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쿵!

[‘혹한의 방벽’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

1층에서 괴상한 소식이 들려온 건.

공격이라니?

“다들 무기 챙겨!”

“어, 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다소 급작스런 뉴스에 놀라면서도 서둘러 창칼을 꼬나쥐고 아래로 내려가는 한세정들.

나 역시 무슨 일인가 알아보고자 수저와 밥그릇을 내려놓으며 후다닥 거점 정문으로 향했다.

‘아까 포효로 괴물들이 몰려온 건가.’

아니면.

좀 전에 떠나갔던 사람들이 갖은 위협에도 더 많은 물자를 빼앗으려 되돌아온 걸까? 가는 동안 나름의 원인을 추론하며 입구에 다다른 찰나.

“……?!”

나는 건물 전체를 둘러싼 방벽 너머의 존재를 보고 입을 벌렸다.

그 정체가.

“도와주세요!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다름 아닌, 사람들과 함께 가 버렸던 ‘남매’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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