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소녀와 소년 】
“이런 게 있었나.”
조이령이 건넨 ‘기술서’를 보고 놀라 급하게 들어온 상점.
[기술 및 특성 관련 판매처]
그곳에는 나도 처음 보는 창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차원 상점’이 2레벨로 업그레이드되던 시기에 옆에 있었음에도 여길 알아보지 못했다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다.
허나.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당시 내 신경은 온통 ‘차원의 깃발’과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라’에 사로잡혀 있었거니와 심지어 한세정들의 호출까지 있어 터널 시야가 된 상태였으니까.
더욱이.
안전한 장소였기에 상대적으로 집중력도 저하되어 있었고.
“…아.”
그런 생각을 하며 신설 창구를 둘러보니 재미난 게 아주 많았다.
몇 권인지 셀 수도 없는 기술서 옆으로 낯익다면 낯익다고 할 수 있는 ‘단계 향상의 돌’이나 기술의 등급 자체를 넘길 때 써야 한다는 ‘한계 돌파 의뢰서’.
그중 내 시선을 확 잡아끄는 건.
[특성 개방의 돌]
단연 이것이었다.
‘특성을 여기서 개방할 수 있는 거였나.’
2등급 개체의 기억을 포식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능력 특성.
때문에 한세정들같이 평범한 루트를 타야 하는 생존자들은 그 힘을 어떻게 보유하는 건지 의아했는데 해답이 여기 있었다.
《특성 개방의 돌》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수많은 능력 중 「특성」이 개방되는 촉매제다.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유 기술 목록 중 하나 이상을 최소 ‘원본(原本)’ 단계로 성장시켜 놓아야 한다. 만일 해당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 복용할 경우 아이템은 소멸한다.
- 옵션 : ‘특성’ 개방
[구매가 : 2등급 근원석 50개]
“더럽게 비싸군.”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싸서 감히 구입할 엄두도 안 날뿐이지만.
2등급 근원석이 50개라.
1등급 괴물을 2,500마리나 잡아야 겨우 저 돌 한 개를 손에 쥘 수 있다는 현실이 날 놀랍게 만들었다.
가격만 괜찮았다면 마침 요건을 충족하는 기술이 네 개나 있으니 빛을 좀 봤을 텐데.
“남은 근원석 몇 개야.”
“지금… 3백 개쯤 남아 있어요.”
“300개.”
가진 자금으로는 ‘특성 개방의 돌’ 하나를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니.
‘이렇게 된 거.’
나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세정아.”
“네?”
“가서 재우 좀 불러 줘.”
“네!”
곽재우.
상자에서 비범 등급 상의를 뽑는 바람에 한세정이나 조이령과 달리 자연스럽게 일반 등급 아이템으로만 장비를 맞췄던 그에게 300여 개의 근원석을 남김없이 투자하기로.
아껴 두었다가 추후 ‘특수 퀘스트’ 대금으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나.
그쪽은 자본이 모자라더라도 방법이 있다.
“저 부르셨습니까?”
“와서 잘 살펴보고 원하는 것으로 하나 구매해.”
“기술서… 말이십니까?”
“남은 걸 다 써도 좋으니까 맞춰서.”
그러니.
지금은 곽재우의 전력을 증진시키는 데에 쏟아붓는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결정에 안 그래도 갑자기 불려 와 어리둥절해하던 곽재우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다 이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쭉 나열되어 있는 수십 권의 기술 서적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2등급 근원석을 기준으로 최소 다섯 개부터 값이 책정되어 있는 기술서들.
허투루 쓰기엔 너무 큰 금액이고, 또 내가 별도의 기회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겹쳐지면서 곽재우의 열의가 불타오른 듯했다.
그로 인해 고르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한세정과 조이령을 데리고 먼저 나왔다.
쉴만큼 쉬었으니.
“내일 저녁에 인스턴스 던전에 들어갈 예정이니 그때까지 적응 좀 해 둬.”
슬슬 몸을 담금질할 차례였다.
* * *
“크아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울려 퍼져 전달되는 괴물의 하울링을 알람 삼아 눈을 뜬 점심나절. 잠에서 깨고 나면 보통 첫 번째 일과로 농작물 관리에 들어간다.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거점 1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물들은 현재 약 10여 종.
영양소 관리보다는 주로 포만감이 크게 느껴지는 것 위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솔직히 잘되고 있는진 확신이 없었다.
텃밭은커녕 화분조차 키워 본 사람이 없는 터라.
오로지 모종 봉투에 적힌 재배법만으로 뭔가를 기르기가 쉽지 않았거니와 겨울인 데다가 난방도 불가능해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그나마 호재가 있다면 거점 내부는 온도가 비교적 온화하다는 것.
더불어.
끼이이익―
쿵―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녹여서 가져오겠습니다.”
바깥에 쌓이는 눈으로 농업 용수를 구하기는 수월하다는 점이었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소복이 쌓이고 있는 눈 덕분에 물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연 이를 농사에 써도 되는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마실 물도 귀한 마당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오빠! 재우 씨! 아침 드세요!”
“고기 거의 다 구워졌어요!”
그렇게 한창 간단히 살펴보고서 씻고 나오니 계단을 타고 두 여인의 활기찬 목소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금일 조식은 두툼한 냉동육.
아쉽게도 돼지나 소고기는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예 이 세상 동물의 것이 아니다.
치이이익―
치이익―
“여기요!”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다 내 앞접시에 놓인 이 살코기는 어제까지만 해도 우릴 잡아먹으려 날뛰던 ‘스랄레오’의 살점이었으니까.
우리가 스랄레오, 괴물의 육신을 식량으로 사용하게 된 건 어제저녁.
쪼개서 먹는다고 먹었는데도 식량이 남아나질 않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상점에서 ‘식용 가능성 판별기’라는 아이템을 찾은 덕택이었다.
《식용 가능성 판별기》
- 등급 : 일반
- 분류 : 생활용품
- 설명 : 온갖 차원에서 넘어온 외계 생명체들, 개중 식용 가능한 대상을 판별해 주는 도구. 끝에 ‘혈액’을 묻혀 그 유무를 판독한다.
- 옵션 : 식용 가능성 판별
곽재우의 기술서를 구입하고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물약을 구비하려던 과정에서 발견한 아이템으로, 이 온도계 형태의 막대 덕에 스랄레오가 먹어도 되는 생물임을 판가름한 직후 우린 주저 없이 놈들을 도축해 왔다.
가죽을 가르고 살집을 잘라 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기도 했으나, 그건 찰나였다.
종말한 세상에 내던져진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고기가 노릇하게 구워지며 향기를 내뿜자 젓가락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후아, 배부르다.”
“나도. 어제도 많이 먹어서 오늘은 좀 조절하려고 했는데.”
“잘 먹었습니다.”
“여기 물.”
“감사합니다.”
“오빠! 오빠도 물, 여기요.”
“고마워.”
“이 정도로 뭘요…….”
빙 둘러앉아 식사를 마친 우린 30여 분 휴식을 취하다 천천히 몸을 풀어 주며 인스턴스 던전 입장을 준비했다.
각자의 색이 묻어 나오는 장비를 착용하고.
“포션 및 구급 약품, 식량과 식수도 전부 챙겼습니다.”
“라이터랑 혹시 몰라서 장작도 조금 가져왔어요.”
노숙을 염두에 두고 며칠 버틸 작정으로 짐을 꾸리고 나자,
“좋아. 들어간다.”
콰직―!
나는 ‘점령의 구슬’을 강하게 쥐어 공간을 열었다.
촤아아아아악!!
[‘점령의 구슬’을 사용합니다.]
[〈인스턴스 던전 : 골갑의 초원〉이 생성되었습니다.]
[해당 던전은 내부에 존재한 모든 적을 섬멸할 시 귀환과 함께 소멸하며, 생성 후 ‘3일’이 초과해도 자동 소멸합니다.]
[또한, 인스턴스 던전에서 습득한 ‘근원석’은 기존 「침략군」을 통해 획득한 ‘근원석’ 성능의 10분의 1로 고정됩니다.]
[추가로 인스턴스 던전에서 습득한 ‘근원석’은 상점에서 화폐로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지금 입장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 71시간 59분 59초]
[던전 클리어 보상 : 모든 신체 능력 +5 / 종족 「스랄레오」 관련 아이템]
흡사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통로’처럼 쩍 하고 벌어지는 균열.
[예]
[〈인스턴스 던전 : 골갑의 초원〉에 입장합니다.]
[복귀를 원할 경우 ‘퇴장’ 주문을 외워 주십시오.]
[퇴장 시 다음 입장은 ‘퇴장 지점’에서부터 재시작됩니다.]
우우우우우웅―
번쩍!
입장 방식은 한세정의 공간 이동과 비슷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텁―
휘이이이잉―!
빛에 휘감기며 도착한 초원.
들판에 발을 딛자 따스한 바람이 전신을 스쳐 지나간다.
인스턴스 던전이라 그런가?
한풍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과 다르게 이곳은 5월에서 6월 사이의 따듯한 초여름 날씨.
별로 좋은 기후는 아니었다.
“…좀 더운데요?”
“난 뜨거운데……?”
더위.
방어력을 높이려 전신을 갑옷으로 두른 우리에게 온난한 기온은 체온을 급격하게 상승시켜 피로 누적 속도에 악영향을 끼치는 한편 흘러내린 땀이 시야를 빼앗는 등의 악재를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으음…….”
이런 문제에 직면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던전〉 입장을 확인했습니다.]
[‘칭호 : 점령하는 자’가 발동합니다.]
[현재 〈인스턴스 던전 : 골갑의 초원〉에 존재하는 적의 숫자가 표시됩니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 72시간 58분 48초]
[2등급 : 9]
[1등급 : 89]
난데없는 사안에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허공에 출력되는 자그마한 화면에 우선 사냥을 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사냥을 해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방안을 모색해 다시금 방문할 요량이었다.
“세정아.”
“네! 시작할게요.”
그런 일념으로 한세정을 부르자.
고개를 주억거린 그녀가 곽재우와 조이령을 데리고 앞으로 나선다. 이번 사냥은 전적으로 셋이서만 해결해 보기로 계획했기에.
빈약한 실전 감각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걱정은 없었다.
유사시에 빠른 대피가 가능한 한세정도 있고, 곽재우와 조이령도 세트 아이템에 기술서로 굉장한 성장을 거두었으니까.
‘수치가 올라갔을 뿐, 제대로 써먹으려면 한참은 걸리겠지만.’
뭔가에 대한 적응력을 발전시키는 데 제일 좋은 게 실전 아니던가. 내가 그랬고, 한세정이 그랬듯이 몰아붙이다 보면 금세 잘해 내리라.
난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아침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
검푸른 어둠을 가르며 솟구치는 환한 빛무리에 누군가는 희망을 노래할 이때에.
“사, 살려…….”
“제발, 제발…….”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서걱!
툭―
데구루루―
여기 이곳은 삶을 갈구하는 절규와 처절한 애원이 빚어내는 절망으로 가득했다.
사방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소용돌이쳤고, 온몸엔 아무리 지워도 영원토록 새겨질 핏물이 낭자했다.
학살.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왜?
“어째, 서…….”
목구멍을 간신히 비집고 나온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네놈으로 인해 죽은 이가 열일곱이다. 저기 네놈의 동료까지 합하면 쉰다섯이 살해당했다.”
콰직!
“켁, 케엑…….”
“난 그런 악마들이 살아 숨 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단죄와 처벌.
그 숭고하되 잔악한 소망을 이루고자.
우드득―
청년은 심장에 틀어박힌 칼끝을 꺾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아니.
쉼표라고 해야 옳았다.
“마스터!”
“여긴 끝났어. 다음은?”
“동쪽, 인원은 아홉 명이야.”
“부상자는?”
“에이, 부상자라니. 다들 아주 쌩쌩해.”
“다행이네. 다친 사람 없으면 그대로 추격하자. 살려 뒀다가 누가 다칠지 몰라.”
“오케이. 전원! 동쪽으로!!”
아직 ‘성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