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불굴.”
찬란하게 빛을 뿌리며 흩어지는 글자들.
그 속에서 나는 새로이 각인된 기억을 갈무리하며 추가된 특성으로 눈길을 주었다. 주마등처럼 펼쳐지다 사르르 녹아 융화된 스랄레오와의 과거를 돌아보면 돌격과 관련된 듯한데.
《특성 : 불굴》
- 설명 : 그 어떠한 장애물로도 감히 막아설 수 없었던 행성 ‘두리티오스(Duritos)’의 지배종 「스랄레오」의 도전적인 신념이 고스란히 반영된 특성. 선결 과제를 이행할 시 특별한 힘이 부여된다.
- 과제 : 체력 10% 이하로 하락한 상태에서 적을 ‘앞’에 둘 것
- 옵션 : 선결 과제 달성 시, 소모된 체력이 회복되기 전까지 저항력 대폭 상승
“호오.”
유추한 내용과 일치할는지 확인하며 읽어 본 ‘특성 : 불굴’은 내가 예측한 것 이상의 능력을 품고 있었다.
비록.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이 세상의 생존자들에겐 수치화된 HP 같은 게 없어 ‘체력 10% 이하’와 ‘상대를 앞에 둬야 한다’라는 제약을 컨트롤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게 문제일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발동할 때마다 ‘인간성’을 요구한다든가 하다못해 ‘마력’이 소모되는 형태도 아닌 데다가,
“저항력.”
무엇보다 상승한다는 대상이 다름 아닌 ‘저항력’이었다.
《저항력》
- 설명 : 모든 물리력, 속성력, 정신적 공격에 대항하는 힘.
일견하기로는 단출하기 그지없는 한 줄짜리 문장이지만, 안에 담긴 실체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불굴(不屈).
온갖 고난에도 절대 굽히지 아니한다는 뜻에 적합한, 가히 전방위적인 방어 체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능력이었다.
스랄레오의 ‘멱따기’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정신계 방어력이 소폭이나마 올라갔다고 좋아하던 나였다.
헌데.
“그게 대폭으로 올라간 것도 모자라 속성력까지 커버가 된다니.”
그야말로 대박.
2등급 개체의 기술을 포기한 보상을 아주 제대로 받게 됐다.
더군다나.
“…기술이 체화 단계가 되면 섞어서 고유 능력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가?”
특성의 존재 의의는 결국 ‘고유 능력’의 발판.
즉.
이로써 나는 괴물들의 기억을 무한한 성장력의 양분으로 삼아 버리는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이나 짧은 거리일지언정 공간의 문을 열어 어디든 마음껏 활보하도록 도와주는 ‘단거리 공간 이동’ 같은 무지막지한 힘을 생성해 내는 단초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미쳤군.”
정말이지.
미쳤다는 표현이 절로 튀어나왔다.
딱.
[‘고유 능력 :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을 통해 「특성」을 습득했습니다.]
[앞으로 ‘30일’간 「특성」 포식이 제한됩니다.]
[앞으로 7일간 「기억」 포식이 제한됩니다.]
이런 것만 없었더라면.
“…기브 앤 테이크, 라는 건가.”
얻는 게 있다면 내어 주는 것도 있는 법이던가.
심상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고유 능력’이 봉인 상태로 잠금되었다. 특성 획득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아예 포식 행위 자체를 막아 버리다니.”
더욱이.
[앞으로 50일간 종족 「스랄레오」를 상대로 ‘기억 포식’이 제한됩니다.]
가장 큰 건 이것.
“…뭐?”
거의 두 달에 달하는 기간 동안 등급에 구분 없이 스랄레오 종(種)의 기억은 손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2등급 개체의 기술을 추출하지 못한 터라 일주일이 지나는 대로 재차 포식을 시도하려 계획 중이던 내게는 꽤나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만큼 특성이 중요하다는 건가?”
당혹스러운 감정과 황당하다는 감정이 한데 뒤섞인 어투로 중얼거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가 막히기는 하지만.
봉쇄를 막을 수단이 없으니 수긍할 수밖에. 그러니 비관보다는 외려 낙관적으로 상황을 평가했다.
‘어쩌면 기술 쪽에도 제약이 존재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진정 그랬다면.
평소처럼 기술 확보에 의견을 두었다면 특성을 접하는 시기가 두 달이나 늦어졌을 수도 있었기에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변경 전
- 근력 : 106
- 체력 : 77
- 내구 : 66
- 순발력 : 80
- 마력 : 54
- 감각 : 47
- 저항 : 12
- 제어 : 8
*변경 후
- 근력 : 113
- 체력 : 85
- 내구 : 84
- 순발력 : 84
- 마력 : 54
- 감각 : 49
- 저항 : 19
- 제어 : 8
“…50 정도 올랐나.”
깔끔하게 교체된 스랄레오의 뼈는 신체 능력치 중 특히 내구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수치로만 따져도 18.
이만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웬만한 1등급 개체들은 피부에 상처도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지는 경우는 더더욱 없을 테고.
“트럭에 치여도 살아남으려나.”
그럴지도.
나는 시답잖은 소리를 해 대며 근력에 이어 체력이나 내구, 순발력도 100을 바라보고 있음을 머릿속에 새긴 후 ‘개인 정보’ 창을 닫고서 상점으로 향했다.
깨어나자마자 체크한 신호기가 여전히 잠잠한 걸로 보아 한세정들은 잘하고 있는 듯하니.
거긴 알아서 하도록 제쳐 놓고 온 김에 ‘특수 퀘스트 판매처’에 들를 요량이었다.
“뭐가 있는 거냐.”
다섯 개의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해 오라던 제안을 완료했으니, 이제 그곳에 어떤 내막이 감춰져 있는지 알아볼 차례였다.
굉장히 궁금했다.
적게는 500개에서 많게는 1,500개에 달하는 1등급 근원석을 대가로 먹어 치우며 뭘 내주려 하는지.
결코 범상치 않은 것이리라.
[특수 퀘스트 판매처]
턱―
그러한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스크린에 손을 올린 찰나.
[축하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당신의 ‘정보’를 전달받은 결과, ‘첫 번째 할당량’을 모두 채웠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의뢰 판매와 관련된 화면이 싹 사라지고 튀어나오는 글자의 향연.
그 과실은 상당히 달콤했다.
얼마나?
[‘첫 번째 할당량’을 달성한 당신에게 「세 가지 특전」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특전 : 차원 상점 등급 향상]
[두 번째 특전 : 단계 향상의 돌x5]
[세 번째 특전 : 특수 조건 ?의 실마리_No. 1]
“……?!”
단언컨대.
여태껏 먹어 본 적 없던 달콤함이었다.
[〈첫 번째 특전〉의 효과로 ‘차원 상점 Lv. 1’이 ‘차원 상점 Lv. 2’로 상향됩니다.]
[‘차원 상점’ 내에 「비범」 등급 아이템들이 추가됩니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차원 상점’의 레벌 업, 그 때문에 등급 업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 이는 나와 달리 아이템의 효과가 절실한 한세정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거기다.
《단계 향상의 돌》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기술의 단계를 향상시켜 주는 돌. 복용 후 보유 중인 기술을 지정하면 해당 기술의 단계가 상승한다. 단, 한계에 다다른 기술은 성장시킬 수 없으며, 원본(原本) 등급 이상의 기술 또한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 옵션 : 기술 단계 1 향상
기술 위력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 나왔다.
아쉽게도 사본(寫本) 등급 기술에만 효력이 발동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래도 무려 다섯 개였다.
내가 써도 좋고 한세정들에게 남겨 그네들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해도 좋은.
물론.
역시나 제일 눈길이 가는 건 세 번째.
[「특수 조건 ?의 실마리_No. 1」을 공개합니다.]
지이이이잉―!!
상점의 한쪽 벽면을 뒤덮는 거대한 홀로그램 화면을 동반하는 영상 안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펄럭!!
‘깃발’에 대한 정보였다.
《차원의 깃발 : 테라》
- 등급 : 신화
- 분률 : 불명
- 설명 : 〈차원 : 테라〉의 단 하나뿐인 신물.
- 옵션 : ?
붉은색 깃대와 그 끝에 걸린 새하얀 천, 깃발의 중앙을 장식하는 청록색의 구체.
보는 즉시 깨달았다.
저 깃발 하나에 태양과 달, 지구를 한데 아우르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팟!
“…….”
나는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종말이 재림하던 날, 전해진 최초의 메시지에 포함됐던, 인류와 지배권 혹은 침략군의 추방권을 좌지우지한다는 물음표로 점철된 ‘특수 조건’의 단서를 보고 나니 영혼이 빠져나간 듯 어안이 벙벙했기 때문이었다.
몸이 덜덜 떨릴 지경.
전율.
이 순간 내 육신을 짓누르는 건 전율이었다.
꿀꺽―
“…아.”
침을 삼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되돌아오는 정신.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멍해졌던 멘탈을 다잡았다.
아직.
[축하합니다!]
[‘특수 조건 ?의 실마리’를 확보했습니다.]
허공에는 날 위한 문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특수 퀘스트〉의 ‘트리거’가 발동되었습니다.]
《특수 퀘스트 : 깃발을 쟁취하다》
- 본디 ‘깃발’이란 누군가의 「영역」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완벽한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발아래에 두는 영광스러운 증명에도 깃발을 사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오니 이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주장하고 싶다면 먼저 깃발을 쟁취하십시오. 그것으로 공언하십시오. 당신 또한 이 차원의 패권을 두고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0/1)
└해당 퀘스트는 누군가 ‘차원의 깃발 : 테라’를 쟁취하기 전까지 지속됩니다.
└해당 퀘스트의 과제를 달성할 시 ‘연계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해당 퀘스트는 각 진행 과정마다 보상이 따로 존재합니다.
└현재 단계 보상 : 기적의 조각
기껏 붙잡은 정신 줄을 다시금 뒤흔드는 파격적인 제안서가.
“기적의 조각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덩달아 출력된 퀘스트의 보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물의 소유권을 가져오라는 퀘스트이니만큼 보상이 대단해야 함은 당연지사.
허나.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기적의 조각’을 내걸 줄은. 심지어 연계 퀘스트의 출발점일 뿐인데.
“…반드시 내가 가져야 한다.”
우득―
그래서였을까.
전희라는 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외계 생명체들에게 지구가 지배당하든 말든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누나.
누나와의 만남을 이룰 수만 있다면 죽음조차 불사할 의지로 뭉친 사람이었다. 그러니 괴물들이 뭘 하든 상관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지구가 어떻게 되든, 인류가 멸종하든 그저 ‘기적의 조각’을 모으는 데에만 열중하려 했거늘.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상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인류의 존망이나 침략군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오직 기적을 위하여.
이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에 나를 욕하는 이가 나타날지라도, 설령 그 주체가 차츰 믿음을 주고받는 한세정들일지라도.
막아서는 게 있다면 모조리 찢어 버리고 목표를 달성하리라.
이를 악물고 천장에 가로막힌 하늘을 응시하며 필사의 각오를 다지던 와중이었다.
삑!
[‘고주파 신호기’가 작동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로 당신의 위치 정보가 전달됩니다.]
“……?!”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