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 *
특성?
갑자기 생겨났지.
그래서 초창기에는 우리도 특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 워낙 뜬금없이 추가된 데다가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곳도 없었고.
추측하기로는 처음부터 존재하던 시스템이 ‘업데이트’에 맞춰서 전면적으로 공개된 게 아닌가 싶다만…….
하여간 그 때문에 특성에 대해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헌데.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었어.
‘차원 상점’.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말처럼 상점에는 특성에 관한 정보도 수두룩했거든.
덕분에 모두가 알게 되었지.
상점에서 ‘특성 개방의 돌’을 구매해 복용한 후 보유 중인 ‘원본(原本)’ 단계의 기술을 지정하면 해당 기술과 관련된 특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더불어 그 특성을 통해 향후 자신만의 ‘고유 능력’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자네도 특성을 갖고 싶다면 기술 단계를 올리고 근원석 넉넉히 챙겨서 상점에 가 봐.
소문으로는 상점이 아니더라도 특성을 개방할 수 있다는데…….
뭐.
우리 같은 놈들이 그런 특전을 어디서 얻겠어.
몸과 돈으로 때워야지.
안 그래?
―특성, 그것을 알아보다 中 발췌
【 성장 】
“여긴.”
붉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황무지, 그 위에 서서 흉포한 기세를 드러내는 괴물.
그걸 생각하며 ‘포식의 땅’에 입성했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초’원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기억하기로 이곳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던 황폐한 세상이었다.
헌데…….
사락―
사락―
“…….”
지금은 전후좌우.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무성하게 자란 풀과 꽃으로 가득해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들판이 되어 있다.
뭘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2등급 개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여기.
[당신의 영혼이 〈포식의 땅 : 2등급〉으로 이동합니다.]
머리맡에 놓인 메시지에 나와 있었으니까.
2등급 개체의 기억을 포식하려 한 점. 그게 있는 거라곤 과도하게 넓은 땅덩어리가 전부였던 ‘포식의 땅’을 초원으로 변모시킨 원인이었다.
그래서.
새빨갛게 채색된 색감만 제외하면, 마치 방금 전까지 내달렸던 ‘던전 : 골갑의 초원’과 똑 닮은 공간이 된 것이었다.
“신기하네.”
이런 시스템이 숨겨져 있었구나.
상위 개체의 기억을 포식하는 것이니 기존의 방식과는 뭔가 다를 수도 있겠다 짐작은 했다만.
“아예 필드가 바뀔 줄이야.”
게다가.
쿵!
쿵!
쿵!
“꾸이이이이익!!”
“꾸이이익!!”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네.”
본디 ‘포식의 땅’은 일대일 매치를 고수하던 전장이었는데.
그 규칙도 변혁의 대상이었나.
잔방에 하나가 나타난다 싶더니 연이어 번쩍번쩍 빛을 번뜩이며 날 중심으로 열둘이나 되는 적이 등장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물론.
죄다 2등급 스랄레오였고.
“난이도가 너무 올라간 것 아닌가……?”
12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돌진이 특기인 놈들에게 딱 맞는 필드까지. 이전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레벨이 확 올라가 버렸다.
하지만 어쩌랴.
불평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저놈…이 제일 약한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전투 개시 전에 열두 마리 중 제일 약한 녀석을 찾으며 발끝에 마력을 밀어 보냈다.
우우웅―!!
출발선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레이싱 카인 양 마력에 반응하며 아우성치는 육체.
그 기세가 한계에 다다랐다 직감했을 때.
퍼석―
나와 스랄레오들의 중간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한 벽이 깨졌고.
“꾸이이이익!!”
“꾸이이익!!”
쿠구구구궁―!
전장에 지진이 일었다.
1등급에 비해 한 뼘이나 길어진 뿔을 앞세운 놈들은 일제히 기술을 발동시키며 내게 달려왔다.
해당 기술은 가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옵션이라도 존재하는지.
쿠웅―!
쿠우웅!
쿠우우우우웅!!
아지랑이 같은 마력이 줄어드는 거리에 비례해 불꽃을 뒤집어쓴 것처럼 점차 거칠어진다.
“참 한결같네.”
난 그 모습을 쓱 돌아보며 발로 바닥을 찍었다.
세부적인 사항은 다르나, 전체적인 틀은 엇비슷한 형세니, 현실에서 써먹었던 대응법으로 응수할 생각이었다.
탁―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쿠구구구구궁!!
먼저 땅을 비틀고.
그다음.
[돌진]
망가지는 대지를 나뒹굴 놈들을 상상하며 ‘돌진’을 부스터로 활용해 도약한 뒤 마력을 집약시킨 주먹으로 내려찍는다.
거기까지 그림을 그리며.
탁―
쾅!
후우우우우우욱!!
도약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는 대지를 뒤로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곤.
‘이제.’
계획한 대로.
우우우웅!!
오른팔에 마력을 싹 모으며 아비규환이 됐을 지상을―
“꾸이이익!!”
“꾸이익!”
쿵!
쿵!
“……?!”
오른팔을 휘감는 마력을 기술화해 방출하려던 나는 어느 지점을 공략할지 결정하고자 아래를 내려다보다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한창 구르고 있어야 할 놈들이.
제동에 실패한 몇 마리를 뺀 절반 이상의 스랄레오들이 정확하게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의 영역 코앞에서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사태.
대관절.
놈들이 무슨 수로 내 기술을 읽어 내고 파훼한 거지?
한둘이 겨우겨우 회피했다면 몰라도, 과반수가 당연하다는 듯 범위 바깥에서 멈춰 섰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질 않았다.
만약.
일전에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를 당해 봤다든가 해서 정보를 미리 갖고 있다면야 납득이라도 하겠다만.
‘…설마?’
눈앞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해결하고자 자문자답을 거듭하던 그때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2단계부터는.
죽기 전의 기억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거라면 모든 게 단번에 설명이 됐다.
심상 세계에서 태어난 스랄레오들은 기본적으로 나와 싸우다 죽은 개체.
고로.
생전의 경험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내 기술에 대처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하다 하다 생전 기억 회복이라니.
벌써 이 정도면 3등급, 4등급 등의 상위 개체들을 기억 포식할 때는 그 난이도가 얼마나 높아질는지 감도 안 잡힌다.
[플뤼의 탄성 일격]
투웅―
콰직!
촤아아아악!
나는 속으로 짜증 섞인 혼잣말을 삼키며 왼팔을 뻗어 체공 시간이 끝나 가던 몸을 한쪽으로 옮겼다.
일타 연계로 한꺼번에 처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할 수 없다.
탁―
[돌진]
콰앙!
나 또한 기동전으로 들어갈 수밖에.
“꾸이이이익!!”
[베어 내기]
슈후우욱!
서걱!!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질주해 첫 목표로 삼았던 스랄레오의 옆구리에 다다른 나는 손톱을 거칠게 휘둘러 녀석의 몸통을 길게 찢었다.
골갑을 흡수하며 한층 성장한 육체가 발산하는 예기(銳氣)에 눌려 맥없이 잘려 나가는 가죽.
푸화하하학!!
“꾸이익, 뀍―”
“흡!”
핏물이 튀고 내장이 쏟아져 쓰러지는 녀석을 뒤로할 즈음 한 놈이 골갑으로 덮인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끝자락은 뭉툭하나 무게감이 더해지면 제아무리 초인이라도 살가죽이 꿰뚫리기는 당연지사.
허나.
우우우웅―
피하지 않았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우우우우욱―
“하아!”
“뀌이이이이익!!”
충분히.
콰아아아앙!!
깨트릴 수 있었으니까.
후두두둑―
투둑―
강대한 파괴력 앞에 무참히 조각난 뼛조각이 흩날린다.
그 위에는.
콰드득!
쿵!
머리가 소실된 시체 한 구도 함께였다.
“자, 다음.”
* * *
“꾸이이이익!!”
쿵!
2m를 넘어가는 체구가 쓰러지며 땅을 울린다.
벌어진 주둥아리에서는 연신 분노로 얼룩진 괴성이 터져 나왔다.
현실에서도, 여기 심상 세계에서도 또다시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운명이 비통한 듯했다.
이를 보니.
생전의 기억이 있다는 것도 꼭 좋지만은 않은 혜택 같았다.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절망감만 깊어질 테니까.
“가라.”
“꾸이이이익―”
콰직!
털썩―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온갖 저주를 내뱉는 스랄레오의 머리를 쳐부수자 심상의 세계가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유 능력 :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기억 포식’을 성공하셨습니다.]
[육체가 온전한 진화를 이룩해 냅니다.]
[대상 「스랄레오의 뼈」에 담긴 ‘기억’을 포식합니다.]
그에 맞춰 출력되는 문장들.
나는 곧 씹어 삼켜질 스랄레오의 편린을 고대하며 눈을 감았다.
헌데.
“…….”
뭔가 이상하다.
보통이라면 밀려들어 와도 진즉 밀려들어 왔을 기억의 파도가 전해지지 않는다.
뭐지?
전례 없는 기묘한 광경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던 나는 이내 허공에 낯선 문장이 나타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포식하고자 하는 ‘기억의 갈래’를 선택해 주십시오.]
이것이었다.
저 한 줄의 메시지가 고착화되어 있던 흐름을 막고 있었다.
대체.
“…기억의 갈래?”
그게 뭐길래?
의아한 심정으로 자연스레 내뱉는 질문.
그러자.
답변이 돌아왔다.
[현재 당신이 흡수한 대상의 등급은 「2」입니다.]
[대상의 등급에 따라 포식 가능한 ‘기억’의 폭이 늘어납니다.]
[1. 기술]
[2. 특성]
[포식하고자 하는 ‘기억의 갈래’를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되지 않는 ‘기억’은 자동 삭제됩니다.]
“아.”
연달아 올라오는 메시지를 통해 나는 ‘기억의 갈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다소 어안이 벙벙해졌다.
‘업데이트’ 이후 ‘개인 정보’에 추가된 특성을 여기서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기에.
“특성, 이라.”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만 2번으로 움직였다. 정말 순수하게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과연 특성의 역할이 뭔지.
필시.
평범한 건 아닐 터인데.
“…좋아.”
선택되지 않은 항목은 자동 삭제된다는 부분이 걸려 신중하게 고민하던 나는 기어코 2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랄레오의 기술도 나쁜 편은 아니다만.
[‘기억의 갈래 : 특성’을 선택했습니다.]
지금껏 흔했던 기술보단 흔하지 않은 특성을 얻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해당 갈래와 관련된 ‘기억’의 포식을 시작합니다.]
* * *
쏴아아아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녹색의 물결이 일렁이는 초원.
“꾸이이이익!!”
쿠웅―
쿵―!
나는 그 초원을 매일같이 달리고, 또 달렸다.
목적은 확고했다.
이 추진력을 바탕으로 저기 저 거대한 ‘돌산’을 무너뜨릴 작정이었으니까.
고작 앞산 흔들바위만 한 내가 그보다 엄청나게 큰 돌산을 무너뜨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부숴 없앤다.
“꾸이이이이이익!!”
후우우우우욱!!
콰아아앙!!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축하합니다!]
[이식된 「스랄레오의 뼈」에 남아 있던 기억 속에서 ‘특별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특성 : 불굴」을 습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