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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78화 (78/232)

78화

* * *

“여긴 아무것도 없네. 거긴 어때?”

“여기도 없어. 먼지가 닦인 부분도 안 보이고.”

“남은 식량은?”

“음식 대신 이건 찾았어요. 자.”

동이 틀 무렵이 되어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도심을 돌아다니며 순조롭게 수색을 이어 나가던 차에 곁으로 다가온 한세정이 자그마한 뭔가를 잔뜩 건넨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손에 들려 있는 건.

“담배?”

“네! 그거랑 라이터, 많죠?!”

포장지도 뜯지 않은 담배 세 갑과 온갖 호프집 이름이 적힌 라이터 열댓 개였다.

나이스였다.

흡연자들에게 있어서 담배만큼 훌륭한 화폐는 또 없다. 겨우 세 갑에 불과하나, 이것만으로도 근원석 몇 개쯤은 충분히 교환할 수 있다.

구태여 물물 교환이 아니더라도 호감을 얻는 데도 탁월하고.

라이터야 두말하면 입 아프고.

“잘했어. 안 그래도 불 피울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죠? 헷, 그럼 또 찾으러 가 볼게요!”

“그래.”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전하자 한세정은 아픈 와중에도 부모에게 칭찬받은 아이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또 다른 건물을 향해 뛰어간다.

그렇게.

“저기, 한세정 씨?”

“응?”

“너,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아니, 이미 티는 냈으니까 아예 막 들이대기로 한 거야? 누가 보면… 읍읍!”

“여길 안 들어가 봤네? 이령아, 여기 가 볼까?”

각자 온 힘을 다해 시가지를 활보하길 다시금 30여 분.

툭―

투둑―

“…음?”

어슴푸레하게 빛이 드리워지던 즈음 축축한 무언가가 볼을 두들겼다.

머리를 들어 보자 이마에 부딪쳐 또르르 굴러 내려 가는 물방울.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 그게 기어코 소나기를 토해 내려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급하게 끌어모은 옷으로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물이라니.

투두두둑―

쏴아아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순식간에 굵어지는 빗줄기에 나는 여기저기 퍼져 있던 한세정들을 불렀다.

불이 있으니 무리할 수야 있다만, 그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푹 쉬고 저녁에나 나와야 할 듯싶어서.

그랬는데.

“…형님! 저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제법 멀리 나갔다 돌아오던 곽재우가 한껏 미간을 좁힌 얼굴로 본인이 왔던 길을 가리켰다.

일견하기에는 어둡기만 한 골목길.

저 너머에 뭐가 있길래 이러는 걸까,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짓자 자연스레 뒷말을 이어 가는 곽재우.

그 이야기에는.

“…숲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렸던 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 * *

[축하합니다!]

[〈던전 : 골갑의 초원〉에 입장하셨습니다.]

“숲, 이 아니라 초원이었네요.”

곽재우의 안내에 따라 골목길을 빠져나오자마자 쭉 펼쳐진 초원이 보였다.

본래 존재해야 할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는 자취를 감춰 버린, 이름 모를 풀과 꽃으로 덮인 대략 100m에서 150m 달하는 들판이.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부지가 변한 광경에 나는 물론 모두가 잠시간 넋을 잃었다.

아라운다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환경 전체를 뒤바꿔 버리는 던전의 영향력은 아직 낯설기만 했다.

《던전 : 골갑의 초원》

- 이곳은 행성 ‘두리티오스(Duritos)’의 지배종 「스랄레오」의 영역입니다. 피부 바깥을 강철만큼 단단한 뼈로 뒤덮어 ‘골갑(骨甲)의 기병’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들이받아 부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앞’에 서지 마십시오. 상대를 인지하는 순간 기병대가 달려들 테니.

└던전 입장 시 ‘던전 전용 퀘스트’가 자동 진행됩니다.

└던전 전용 퀘스트 : 두개골 부수기

《던전 전용 퀘스트 : 두개골 부수기》

- 이 퀘스트는 오로지 ‘던전 : 골갑의 초원’에서만 진행 가능하며, ‘살이 있는 「스랄레오」’의 두개골을 파괴하는 것이 핵심인 임무입니다.

미간을 중심으로 생성되는 그들의 골갑은 생존에 필요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방어구이며 동시에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드높은 긍지를 꺾어 보십시오. 그것이 곧 당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길이 될 터이니.

└현재 파괴한 두개골 : (0/~)

└상위 등급 「스랄레오」의 두개골 파괴 시 해당 등급의 ‘x2’만큼 추가 적용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주르륵 출력되는 홀로그램 화면.

“…스랄레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읽어 본 그 안에는 던전의 명칭부터 퀘스트 달성 조건까지 내게 요긴한 자료들이 쭉 들어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했을 찰나.

“꾸이이이익!!”

멀리서 돼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긴 곳에는.

콰앙!!

쾅!

이마에 새하얀 빛을 품은 괴물 서너 마리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정차되어 있던 차량 몇 대를 들이받고 있었다.

저 영역의 주인 스랄레오였다.

‘…멧돼지? 아니, 코뿔소인가?’

처음 마주한 놈들은 멧돼지와 코뿔소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돌진 위주로 설계된 생명체였다.

눈매를 좁혀 뚫어지게 주시하자 이마에 씌워진 뼈의 형체가 차츰차츰 선명해졌는데.

자세히 살펴본 결과.

미간에 곧게 선 뿔을 중심으로 머리를 쫙 감싸고 있는 백골의 모습이 마치 창과 방패를 한 번에 착용하고 있는 느낌이라, 왜 ‘골갑(骨甲)의 기병’이라 표현했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납득이 됐다.

다만.

‘다행이야.’

그래서인지 나는 보면 볼수록 놈들이 마음에 들었다.

돌진형 개체라면.

무슨 수를 쓰든 한세정의 공간 이동을 넘어서기는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령 멧돼지나 코뿔소와 달리 순간적인 곡선 회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공중으로 이동하면 따라올 재간이 없었기에.

‘사냥은 쉽겠어.’

방심은 금물이라지만, 어쩐지 우리에게 딱 맞는 사냥터가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 * *

거점으로 복귀 이후.

한세정이 구해 온 라이터로 불을 피워 하늘이 퍼붓는 소나기에 축축해지는 옷을 말리는 동안 나는 가방을 가져와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거무튀튀한 상자 아홉 개를 끄집어냈다.

“그건?”

“고치 구출 퀘스트 보상.”

아라운다 던전에서 조이령과 곽재우를 구조하며 받은 ‘선물 상자’였다.

《아라운다 던전 퀘스트 보상 선물 상자》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던전 : 파도 속의 고치〉의 전용 퀘스트를 진행하여 획득 가능한 선물 상자. 대부분이 선택하는 쉬운 길을 두고 ‘구출’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기에, 그에 합당한 ‘비범’ 등급의 선물 상자가 지급되었다.

- 옵션 : 개봉 시 종족 「아라운다」 관련 ‘일반~비범’ 등급 아이템 획득 / 극히 낮은 확률로 ‘특별’ 등급 아이템을 획득

본래는 근처에 스랄레오의 영역이 있음을 확인했겠다.

바로 ‘차원 상점 생성권’을 처분해 근원석부터 마련할 요량이었으나, 그 전에 이걸 먼저 까 보는 게 좋을 듯했다.

뭐가 뜨든.

무가치한 아이템이 뜬다면 팔기 위해 상점에 가야 할 테니, 쓸데없이 헛걸음하지 않고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각자 두 개씩 개봉해 봐. 아홉 개 다 열어 보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이 있으면 나눠 줄 테니까.”

나는 상자의 정체를 깨닫고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한세정들에게 두 개씩 배정해 준 뒤 한 개의 끈을 당겨 끌렀다.

그러자.

상자가 빛으로 화해 가루가 되더니.

스르르륵―

툭―

이내 인간의 심장을 닮은 듯한 물체가 굴러떨어졌다.

[‘아라운다 던전 퀘스트 보상 선물 상자’를 개봉합니다.]

[축하합니다.]

[‘2등급 근원석 : 아라운다’를 습득했습니다.]

“오.”

근원석.

그것도 무려 2등급 근원석이었다. 첫 개시부터 2등급 근원석이라니. 기분 좋은 출발에 웃음기를 머금은 나는 나머지 두 개도 연달아 개봉했다.

허나.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고 하던가.

[축하합니다!]

[‘1등급 근원석 : 아라운다’를 습득했습니다.]

[‘아라운다의 소형 실 주머니’를 습득했습니다.]

다른 두 상자는 변변찮은 아이템뿐이었다.

“저는 1등급 근원석 두 개네요…….”

“저도…….”

“전 소형 실 주머니 한 개와 ‘수중 호흡 물약’이라는 게 나왔습니다.”

한세정들에게서는 성과라고 할 만한 게 거의 나오지 않을 만큼.

“특별 등급 아이템이 나오기도 한다더니.”

아쉽게도 아홉 개 중 일곱 개가 꽝이라.

하기야.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은 아니다. ‘던전 전용 퀘스트’는 문자 그대로 던전에 입장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는 미션.

그런 만큼 상위 등급 아이템이 쉽사리 드랍되게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여.

《수중 호흡 물약》

- 등급 : 비범

- 분류 : 소모품

- 설명 : 물속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도록 일정 시간 동안 ‘아가미’를 강제 개화시켜 주는 물약이다.

- 옵션 : 복용 시 10분간 ‘수중 호흡’ 가능

“그나마 이런 거라도 나와서 다행이지.”

죄다 1등급 근원석으로 겹치지 않았음에 만족한 나는 곽재우가 전해 준 ‘수중 호흡 물약’의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는 상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한걸음에 판매대에 도착해 내미는 ‘차원 상점 생성권’.

과연 얼마나 쳐줄 것인가.

현재 수중에 보유 중인 2등급 근원석은 세 개.

즉.

이 열쇠가 최소 1등급 근원석 150개 이상의 값어치를 해 줘야 스랄레오의 ‘특수 퀘스트’를 구매할 수 있다.

물론 가히 보물이라 칭해도 모자랄 게 없는 아이템이니 150개는 당연히 넘길 터라.

‘못해도 5백 개는 쳐주려나.’

예상치를 과감하게 올려 치며 눈을 빛내던 그때.

[모든 물품이 판매되었습니다.]

[전체 판매가 : 1등급 근원석 777개(화폐 전용)]

마침내 판매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근원석 수백 개가 담긴 큼지막한 박스가 나타났다.

“777개?”

보물의 판매 비용은 의외로 내 추정치를 훌쩍 벗어난 8백 개가량이었다.

허.

비싸게 쳐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내줄 줄이야. 그렇다는 건 원가는 1,500개가량이라는 뜻인가?

“…역시, 시도하길 잘했네.”

이런 걸 두고 그냥 떠났다면, 나아가 착호 부대에게 빼앗기기라도 했다면 배가 상당히 아플 뻔했다.

[‘근원석 교환’을 진행합니다.]

[교환 대상 : 1등급 근원석 5백개 => 2등급 근원석 열 개]

[교환이 완료되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난날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 나는 교환소에서 바꾼 근원석으로 의뢰서를 구입했다.

[‘특수 퀘스트 의뢰서 : 스랄레오’를 구매했습니다.]

툭―

삽시간에 근원석 3백 개를 깔끔하게 먹어치운 키오스크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돌돌 말린 종이 한 장.

뒷면에 괴물 스랄레오의 형상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의뢰서를 받아 든 순간.

“…아.”

나는 다른 것보다 설명 창 맨 하단에 적혀 있는 글귀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곳엔.

《특수 퀘스트 의뢰서 : 스랄레오》

- 등급 : 특별

- 분류 : 소모품

- 설명 : 이것은 행성……(후략).

- 옵션 : 사용 시 「스랄레오」의 ‘특수 퀘스트 : 멱따기’ 부여 / 최대 5인 동시 수행 가능

내가 바라던 문장이 적혀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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