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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76화 (76/232)

76화

* * *

수천, 수만 년간 이어진 ‘인간사’는 그간 ‘격변’이라 불리는 여러 시기를 지나왔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던 맹수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돌조각을 쥐며 ‘무기’에 대한 개념을 깨우치던 첫 번째 격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방랑하던 차에 자연의 산물이라 불리던 ‘불’과 ‘농작물’을 발견하게 되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곳에 정착하며 집단과 사회를 배워 나가게 되는 두 번째 격변 등.

한 번씩 발생하는 ‘격변’은 향후 인류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축하합니다!]

[현 시간부로 「침략의 문_Ver. 2 : 영토 전쟁」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개인 정보’, ‘아이템’, ‘기술’ 등 여러 가지 사항이 업데이트된 시스템에 맞춰 변경됩니다.]

우리는 오늘을 또 하나의 ‘격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종말의 시대를 걷는 김 아무개의 일기 中 발췌

* * *

“여기서 왼쪽으로 돌면― 아, 저기 보이는군요.”

노인이 적어 준 약도.

더는 껄끄럽게 느껴지지 않는 종이를 당당하게 펴 들고 대로 중간에 첨탑처럼 우뚝 선 ‘휘광 교회’의 십자가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던 나는 드디어 도로변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찾아 헤매던 목적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농자재 백―]

누구의 소행인지 간판이 반쯤 박살 나 있는 작은 마트를.

“안에, 남아 있겠죠?”

“있길 바라야겠죠.”

외관이 온전하지 않은 터라 반사적으로 내부 물건에 대한 걱정이 생겼지만, 벌써 다 털리진 않았겠거니 기대하며 조심스레 입구로 다가갔다.

슥―

슥―

입성 전.

조를 나눠 인근 수색 및 실내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았으나,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일단.

당장은 괜찮아 보이는 현장.

스릉―

착―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에 무장을 완벽히 갖추고 천천히 정문을 개방했다.

끼이이이이익!!

전류 공급이 되지 않아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자, 지면과의 마찰로 듣기 거북한 비명을 질러 대는 유리.

신속히 탈출해야 할 순간을 대비해 억지로 참아 가며 양 끝단까지 밀어붙이고 난 후.

나는 앞장서서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저벅―

저벅―

먼지가 쌓여서 그런가.

너무 고요한 탓에 걸음을 뗄 때마다 발생하는 소음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나아가기를 얼마간.

“아윤 씨, 저기!”

전방을 경계하던 무리 중앙에서 좌·우측을 주시하던 한세정이 이동을 멈추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자리에는 포대 자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쌀?’

…이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해당 포대는 쌀이나 밀 대신.

[푸른 세계 / 유기질 비료(20kg)]

조금 너저분하게 비치돼 있긴 하다만, 직접 확인해 보니 먼지가 쌓인 것 외에는 어디 흠 하나 없는 온전한 형태의 비료가 담겨 있었다.

수량은 넉넉잡아 서른 포대 정도.

이런 곳이 처음이라 이게 평소 상비 물량의 몇 퍼센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만하면 우리가 쓰기에는 더없이 충분해 보였다.

“다행이네요. 간판이 부서져 있어서 안쪽도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첫 수확물부터 흡족하다 여긴 덕택인가.

나도, 한세정들의 표정에도 조금씩 피어나는 웃음꽃.

물론.

성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형님! 저기!”

딱히 호칭 정리를 하진 않았지만.

정식으로 동행을 확답한 이후 날 ‘형님’이라 부르는 곽재우가 호미나 낫 등 구석에서 농사 도구를 한 아름 확보했으며.

“여기도 있어요!”

조이령 또한 잘 진열된 선반에서 수북이 쌓인 모종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토마토]

[고추]

[수박]

과일과 채소, 구황작물에 심지어 묘목까지.

“이건 못 쓰겠군.”

종말 이후 거의 두 달.

초겨울의 날씨를 직격으로 맞은 데다가 관리해 주는 이가 없어 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밀봉된 물품 빼고는 죄다 말라비틀어지는 등 버려야 할 게 더러 있었으나.

“아! 이건 이렇게 키우는 거구나.”

“재배 방법이 있어?”

“포장지 뒷면에 다 쓰여 있네? 안 적혀 있는 것도 있긴 한데, 그래도 거의 다 적혀 있어서 이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겠는데?”

“아, 그러네!”

제일 걱정하던 재배 방법도 얼추 마련된 상태라 이만하면 꽤나 성공적인 루팅이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지만 말이다.

“잠시 모여 보시죠.”

한 차례 수색을 마친 나는 일행에게 모이도록 알린 후 바닥에 열쇠들을 꺼내 놓으며 회의를 열었다.

결과물이 좋은 상황이니.

“이 정도면 농사를 짓기에는 넉넉할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여길 아예 거점으로 삼고 안전지대와 차원 상점을 설치하면 어떨까 하는데, 여러분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 점을 고려해.

보유 중인 ‘안전지대 생성권’을 사용해 여기 농자재 백화점 자체를 거점화할지 말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장단점은 극명했다.

전자는 획득한 농자재를 전부 옮겨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남들이 모르는 장소에 자리를 잡아 물자의 은닉 효과가 커질 테다.

반면 후자를 고른다면 시간과 체력을 아끼되 남들이 아는 공간이기에 제아무리 ‘안전지대 생성권’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위험 부담이 커진다.

어느 쪽을 고르든 좋고 나쁜 점이 확실하니 쭉 들어 보고 결단할 요량이었다.

만일 동률로 갈린다면.

둘 중 내 판단이 기우는 쪽으로―

“저는 아윤 씨 의견에 찬성해요.”

“저도요.”

“저도 형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를 작정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던 질문을 한 것처럼 결말이 나 버렸으니까.

“…….”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의견 일치가 빠르다고 봐야 할지, 극단적인 의존성이라고 봐야 될지 다소 애매모호한 감이 있다만.

여하튼 빠른 단일화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들을 챙기고는 건물 중심으로 향했다.

지정한 곳에서부터 직경 50m라.

가능하면 거점 전체가 ‘안전지대’로 설정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좋을 텐데. 마침 중앙에 기둥이 있어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쯤인가.”

툭―

그렇게 기준점을 명확하게 잡은 뒤.

[‘안전지대 생성권’을 사용합니다.]

[결정한 위치가 맞다면 ‘예’, 다시 설정하길 원한다면 ‘아니오’를 선택해 주십시오.]

[예/아니오]

[선택 완료]

[현 위치로 직경 50m에 달하는 ‘안전지대’ 생성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보물을 가동했다.

우우우우웅!!

선택을 완료한 찰나 손가락 하나 크기에 불과한 열쇠에서 막대한 양의 빛이 휘몰아쳤다.

흡사 전구 수백 개의 스위치가 한꺼번에 켜진 듯한 이펙트.

“…이런!”

펄럭!

황급히 장포를 벗어 덮지 않았더라면 외부의 이목을 끌어 최악의 경우 자칫 유혈 사태로 연결됐을 정도로 심각한 특수 효과였다.

이런 기괴한 장치를 심어 뒀을 줄이야.

누가 설계했는진 몰라도 악취미를 가진 캐릭터 같았다.

촤르르르륵!!

내가 그런 상념을 하는 사이.

뭉쳐 있던 빛이 가닥가닥 갈라지며 바닥을 타고 쭉쭉 퍼져 나가 일대를 거미줄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쑤우우우욱―!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땐 50m에 달하던 빛의 그물이 지면 아래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혹한의 안전지대 ― Lv. 1’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걸로 설치는 끝이었다.

[‘혹한의 안전지대’ 외곽에 「혹한의 방벽」이 구축됩니다.]

[「혹한의 방벽」이 파괴하지 않는 한 허락되지 않은 모든 대상은 ‘안전지대’ 내부로 입장이 저지됩니다.]

[또한 「혹한의 방벽」이 파괴된 이후에도 허락되지 않은 모든 대상에게 ‘상태 이상 : 둔화’를 부여하고 지속적인 빙결 피해를 선사합니다.]

[위 효과는 3분 간격으로 증폭되며, 최대 10회 중첩되고, 3회 중첩 시마다 추가 저주가 적용됩니다.]

[해당 효과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안전지대’ 중심에 세워진 「깃발」을 파괴해야 합니다.]

[「깃발」이 파괴된 순간 ‘안전지대’는 즉시 제거됩니다.]

열쇠가 소멸된 자리에 커다란 ‘깃발’이 박히고.

사르륵―

쿵!

[허가된 대상은 ‘안전지대’ 내에서 모든 신체 능력이 5% 상승하며, 체력 및 마력 재생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허가된 대상에게는 ‘하얀 늑대’ 표식이 새겨집니다.]

사아아아아아아!

‘혹한’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50m 바깥에 하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방벽으로 변환되는 동시에 쫘르륵 올라오는 문장들.

“아…….”

가열하게 가동된 ‘안전지대’.

실제로 체험해 본 쉘터는 적의 진입을 막아서는 데에도 유용하지만, 반대로 ‘기적의 조각’같이 거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로운 버프가 적용되는… 아이템 설명만 읽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숨겨진 옵션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 점에 신기해하는 한편.

둔화 수치는 어느 정도인지, 빙결 피해는 또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보고자 시선을 돌려 한세정들을 바라봤다.

“어, 어어…….”

“갑자기 몸이…….”

“…형님?”

디버프의 영향을 받게 된 셋은 한기가 침투하는지 으슬으슬 몸을 떨며 고통 어린 낯빛을 띠었는데. 얼굴이 상당히 일그러진 걸로 보아 대미지가 결코 약하지 않은 듯했다.

“어떻습니까?”

“으음, 우선 둔화는 기본 20%가 적용된다고 하고… 빙결 피해는 수치가 정해져 있진 않지만, 체감상 한겨울에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에요…….”

들어 본 결과 디버프 위력은 아주 만족스럽진 않아도, 1레벨임을 감안하면 썩 나쁘지 않았다.

“곽재우.”

“예?”

“나가서 방벽을 공격해 봐. 방어력이 얼마나 되는지 체크해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이루어진 방벽 내구성 테스트도 합격점이었다.

“하아!”

우우우웅!

쾅!!

곽재우가 ‘고유 능력’인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까지 발동하고서 십여 번 가까이 두들기고 나서야 흠집이 나는 수준이었기에 1등급 괴물들은 웬만큼 몰려와도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좋다.

나는 훌륭하게 마무리된 검사에 속으로 손뼉을 치며 세 사람에게 허가를 내려 주었다.

[지정한 대상에게 ‘하얀 늑대’ 표식이 새겨집니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설사 주변이 어둡더라도 편히 알아볼 수 있게끔 큼지막하게 각인되는 프라구스의 형상.

‘이건 이쯤 하면 되겠네.’

[‘차원 상점 생성권’을 사용합니다.]

허가가 완료되는 대로 곧장 건물 한쪽을 텅 비워 ‘차원 상점’도 적당한 곳에 박아 넣었다.

쉘터 범위가 50m밖에 되지 않아 상점이 들어서니 절반가량이 잡아먹혔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농자재 백화점은.

“그래도 2층이 있으니 잠은 거기서 자면 되겠다.”

“아까 보니까 근처에 침구 매장도 있던데, 거기로 가 보자.”

복층 건물이었으니까.

하여.

[‘차원 상점 ― Lv. 1’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이것도 끝.”

이제 더 신경 쓸 건 없다고 생각했다.

헌데.

예상 못 한 부분이 있었다.

[축하합니다!]

[현 시간부로 「침략의 문_Ver. 2 : 영토 전쟁」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개인 정보’, ‘아이템’, ‘기술’ 등 여러 가지 사항이 업데이트된 시스템에 맞춰 변경됩니다.]

“…지금?”

공교로운 타이밍에 ‘업데이트’가 끝난 것이다.

허나.

진정으로 날 놀라게 하는 건 그다음 메시지였다.

[지금부터 ‘차원 상점’에서 〈특수 퀘스트〉 판매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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