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기적의, 조각?”
나는 빛무리를 뿌리며 ‘차원 상점 생성권’과 겹쳐져 소환된 새하얀 돌조각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기적의 조각’이라니.
그 명칭부터가 범상치 않은 돌조각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붙잡아 들어 올리자 재차 빛이 일렁거리더니 홀로그램 화면 몇 개가 연달아 확 펼쳐졌다.
《기적의 조각》
- 이름 그대로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묘한 ‘마석(魔石)’의 조각이다. 본래는 하나의 차원을 온전히 발아래에 둔 지배자에게 수여되는 보물이나, 이따금씩 해당 조각처럼 주인 잃은 별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총 ‘여섯 개’를 모아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나, 단지 조각을 지닌 것만으로도 적잖은 능력을 손에 넣기도 한다. ‘기적의 조각’을 소유하는 동안 모든 신체 능력치가 10% 상승하며 체력 및 마력의 회복 속도가 9% 향상된다.
해당 아이템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소유주가 사망할 시 또 다른 운명적 만남을 위해 우주 어딘가로 전이된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아이템 정보 창.
대여섯 줄이나 되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설명에는 이름의 유래와 버프 효과가 적혀 있었는데, 그 수치나 범위가 엄청났다.
이 작은 조각 하날 품고만 있어도 스탯과 회복 속도가 증가한다니.
허나.
날 경악하게 만든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기적의 조각’의 소유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당신의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었습니다.]
[특수한 조건을 달성한 당신에게 ‘특수 퀘스트 : 기적의 문을 여는 자’를 부여합니다.]
《특수 퀘스트 : 기적의 문을 여는 자》
- 오로지 ‘기적의 조각’을 소유한 자만이 습득 가능한 퀘스트. 당사자는 ‘기적의 조각’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해당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다.
숨겨진 특정 조건 달성을 통해 총 ‘여섯 개’의 ‘기적의 조각’을 모아 「기적의 별」을 완성해 낼 경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설사 생사(生死)의 영역마저도 초월하는 그 어떤 소원일지라도 이뤄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1/6)
┗현재 개방된 특수 조건 : ‘기수 사냥’ 이벤트에서 세 개의 「열쇠」 확보(해당 조건으로는 ‘기적의 조각’ 획득 불가)
“……!”
아이템 설명만큼이나 긴 장문의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가던 차에.
끝자락에 적힌, 여느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나 볼 법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설사 생사의 영역마저도 초월하는 그 어떤 소원일지라도 이뤄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라는 대목에 입을 벌렸다.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지만, 눈을 아무리 비벼 봐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진정.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였다.
“…누나.”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누나’라는 단어가 입술 밖으로 툭 삐져나왔다. 내가 소망하던 것이 무어던가. 내게 기적이라 불릴 만한 게 무어던가.
그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누나.
여느 때와 같이 날 향해 웃어 주던 누나의 미소를,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했던 따스한 손길을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느껴 보는 것.
그래서 죽으려고 했었다.
사후 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면, 죽어서라도 누나와 만나기를 희망했으니까.
헌데.
“기적을, 이루어 준다. 생사마저도 초월해서…….”
나는 눈앞에 자리한 퀘스트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반투명한 화면 너머로 누나의 실루엣이 아른거리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새벽에 피어나는 물안개같이 흐릿했고 표정 하나 보이지 않았으나, 그 형상을 일별하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래서, 그렇게 날 말린 거였어?”
그간에 있었던 일들.
한세정과 노인, 그리고 곽재우를 통해 전달되었던 누나의 목소리가 오늘 이 순간을 위한 작품이었다는 걸.
내 죽음을 말리던 이유.
이제야 비로소 납득이 되었다.
“그래.”
나는 죽어서는 안 됐다.
사후 세계인지 저승인지, 그런 불확실한 기대감에 매몰되어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됐다.
운명.
그 찬란한 글자로 새겨진 이정표가 가리키는, 누나를 비롯해 모두가 알려 준 앞으로의 길을 밟고 나아가야 했다.
“살아 볼게.”
정말 악착같이 살아남아 내 손으로 직접 기적을 실현해 내리라. 나는 ‘기적의 조각’에 은색 목걸이를 얹으며 그리 다짐했다.
그렇게.
복수만을 좇던 내 삶에 두 번째 목표가 세워졌다.
* * *
중천에 걸려 있던 달이 기울어 가는 흑야.
“으, 으음…….”
아라운다의 던전으로 변해 버린 ‘하와이 수영장’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건물에 들어와 곽재우가 허리춤에 따로 챙겨 두었던 라이터를 꺼내 모닥불을 지피려던 찰나.
자그마한 신음과 함께 조이령의 눈꺼풀이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이령아! 조이령!”
그 미약한 반응에도 화들짝 놀라 달려가는 한세정.
물기 섞인 친구의 음성이 정신을 차리는 데 나름의 보탬이 됐을까?
“…세정, 아?”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슬며시 눈을 뜬 조이령이 비몽사몽 한 어투로 한세정을 부른다.
그러다.
“…아!”
후욱!
팍 허리를 세우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마.
납치되기 직전의 급박하던 풍경이 떠오른 듯했다.
“푸흡, 진정해. 여긴 안전하니까.”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싱긋 웃으며 조이령을 꽉 끌어안는 한세정.
눈시울이 제법 붉어진 걸 보니.
겉으로는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른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 불곰파로부터 어렵게 구해 냈던 친구를 또 잃게 되는 건 아닌가 매우 불안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잠시간의 해후가 끝나고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묻는 조이령에게 한세정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히 이야기해 주었다.
한 장면, 한 장면 듣는 내내 조이령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까.
자신도.
더불어 우리도.
때문에 얘기가 후반부에 도달할 즈음에는 미안함과 감격 등의 감정을 내비치며 나와 한세정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특히.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아윤 씨께는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정말, 정말로 감사해요.”
내게는 빚진 게 많다고 여기는지 괜찮다고 손을 내저어도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곽재우가 눈을 뜬 건 그런 그녀를 겨우 진정시킬 무렵이었다.
덩치가 큰 탓에 수면 독도 더욱 과다하게 투여했는지 거의 20여 분을 더 잠들어 있다가 기상한 그는, 독의 영향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하긴 했으나 그 외에는 조이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저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조이령보다 더했다.
내게 목숨을 바치겠다 맹세한 지 채 일주일도 가기 전에 보탬이 되긴커녕 되레 위험에 빠뜨려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떨구는데.
미녀의 눈물이라면 모를까.
2m에 다다르는 장한의 우울함은 썩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었던 터라 나는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를 제지하고선 셋을 모닥불 근처로 모았다.
그러고는.
툭―
툭―
툭―
품에서 꺼낸 세 개의 열쇠를 가지런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에.
“……?”
“……?”
“……?”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는 세 사람.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더없이 커다란 물음표가 새겨졌을 때.
스윽―
“이건, 기적의 조각이라고 부르는 돌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백색 조각.
마치 진주를 가공한 듯한 ‘기적의 조각’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진실을 드러냈다.
이 조그만 조각의 정체와, 습득하게 된 경위, 또한 이것을 온전한 상태로 복원해 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까지.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전부 알려 주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날 향해 미친 게 아니냐며 기겁을 할지도 모른다.
헛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일진대.
하물며 ‘기적’을 이뤄 주는 보물을 이리 쉬이 공개한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냐고 욕을 할 것이다.
제아무리 ‘양도 불가’라는 옵션이 붙어 있다 주장한들, 확인이 불가한 이상 욕망에 잠식돼 의심이 싹을 틔우고 나면 일을 저지르는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 의견은 조금 달랐다.
‘혼자서는 안 돼.’
여태껏 여러 가지 읽을 겪으면서 홀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란 불가능에 가까움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종말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종말 이후는 집단의 가치가 더더욱 강조되는 시대였다.
당장 불곰파와의 전쟁만 해도.
황 노인과 유신이의 지원으로 ‘프레데터’가 되어 복수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고, 한세정의 합류로 2주라는 짧은 기간만으로도 복수 준비를 마칠 수 있었으며, 곽재우의 조력으로 이석열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건져 결국 이덕구를 죽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인간말종에 불과한 개새끼들을 처리하는 데에도 그 많은 원조가 필요했는데, 그보다 수백 배는 어려울 ‘기적의 조각’ 완성 작업을 혼자서 한다?
그야말로 개소리.
하여.
가감 없이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는 이걸 완성시키려고 합니다.”
부탁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패를 쥐고 있고, 이를 활용해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이쪽부터 진심을 보여야 상대 역시 진심으로 도와주리라 판단했기에 일절 숨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연히 아무런 대가 없이 바라기만 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욕심에 불을 지피게 될 터이니 전체를 만족시킬 만한 보상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완성이 되는 그날, 같은 자리에 모인 이들이 각자 떠올리는 사람을 건강한 모습으로 되살려 달라고 빌 겁니다.”
가족, 친구, 연인.
어떤 인물이 되었든, 설령 종말 이전에 곁을 떠난 인물이든 구분하지 않고 재회하고자 한다면 되살려 달라고. 적어도 우리 네 명에게 제일 중요시되는 건 가족이었기에 이보다 확실한 제안은 없으리라 여겼다.
하여.
“물론 어려울 겁니다. 위험할 테고 불곰파 제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기가 수없이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거절하신다면 더 이상의 동행은 힘들 것 같습니다. 해서 떠나실 분에게는 이 중 하나를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세 사람을 응시했다.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이제 답을 달라는 무언의 제스처, 허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보니 다들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딱.
곽재우를 제외하고서.
“…저는,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정적이 내려앉기도 전에 침묵을 깬 곽재우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제 동생과 제 원한을 풀어 주신 당신께, 노예도 좋고 고기 방패도 좋으니 원하는 대로 써 달라고.”
동생을 되살릴 수 있다는 말에 일순간 흥분하기도 했으나, 감정을 억누르며 무척이나 담담한 어투로 맹세를 재언했다.
“그 길의 끝에서 제 동생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동할 테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부탁하지 마십시오. 명령하시면 그대로 따를 겁니다.”
‘기적의 조각’이라는 될지 안 될지 모를 미래보다는 그저 현실, 눈앞에 존재하는 내게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
그게 다였다.
나는 그 차분하고 담담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곽재우는 지옥이라도 따라갈 완전한 아군이었다.
그렇다면.
스윽―
“…….”
자연스레 두 여인에게 시선을 옮겨 본다.
당신들은 내 원군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지 않고자 떠나갈 것인가. 아라운다 던전 사고로 친구를 잃을 뻔했던 만큼 이별을 염두에 두고서 질문했다.
허나.
“…그럼.”
괜한 물음이었다.
“아윤 씨와 계속 같이할 수 있는 건가요……?”
“어머, 너무 대담한 거― 읍! 왜 꼬집어!”
“니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렇지!”
“내가 뭘― 아아! 알겠어, 알겠어. 어휴……. 아무튼 아윤 씨를 돕는다면 저희 부모님을 다시 뵐 수도 있다는 거 맞죠?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갈게요. 단순히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건 아니에요. 당당히 도움을 드리고, 합당한 지분을 얻을 거니까요. 그리고, 벌써 세 번. 최소한 목숨값 빚진 건 갚아야죠.”
착호 부대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한세정도, 조이령도, 곽재우도.
단지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같이, 가 보죠.”
이 한마디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