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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68화 (68/232)

68화

* * *

지구를 침공한 외계 생명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온갖 종(種)이 난무하는 탓에 과연 겹치는 요소가 있는가 의문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딱 하나 교차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그건.

침략군 전체가 지구에서 살아가기에 ‘부적합’하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다른 행성에서 나고 자란 생물이었으니까.

그런 탓에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띠는 제 고향 땅에 맞게 변형되고 진화된 그들로서는, 아주 사소한 기본 골자부터 판이한 지구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우주의 법칙’이 아니었다면 ‘침략의 문’을 넘어오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만큼.

해서.

침략자들은 첫 번째 ‘업데이트’ 시기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렸고, 때가 되자마자 곧바로 영역을 만들어 냈다.

이 지구 곳곳을 제 고향의 특성이 고스란히 적용되는 공간으로 오염시킨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특수한 작업은 때때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 *

“…하루, 하루만 생각해 보지.”

나는 활화산처럼 꿈틀거리는 곽재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혼잡하게 뒤틀린 사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사의 경계에서 입장을 명확히 정할 시간이.

그러려면.

이런 위험천만한 뻥 뚫린 곳을 벗어나 온전히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 입성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곽재우는 이런 내 말에 큰 불만 없이 주억거렸다.

가부(可否)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안건이었기에, 그로서는 본인의 맹세를 거부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사양하더라도 어떻게든 따라다니며 보답을 할 기세였으니까.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출발하겠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인 곽재우가 땅에 내려놓았던 짐수레 손잡이로 몸을 돌리던 그때.

파직!

‘……?!’

일순간 육감이 번뜩였다.

위험 신호.

텁!

“…왜?”

“전원 방어 대형!”

본능적으로 사인의 의미를 파악한 나는 떠나가려던 곽재우의 어깨를 붙잡으며 한세정과 조이령을 긴급히 호출했다.

노인과 키메라들이 떠나간 지금, 저들을 지키는 데 제일 좋은 위치는 내 등 뒤였다.

“…네? 아, 네!”

“네!”

타닷!

돌발 행동이나 다름없는 곽재우의 맹세 선포에 적잖게 당황 중이던 두 여인은 다행히도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며 내 주위로 달라붙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언제라도 뻗고 벨 수 있게.

그 일사불란한 준비를 마칠 즈음 비로소 육감을 자극한 실체가 후방에서 어둠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저 착호 부대 소속 정성훈 하사입니다.”

낯익다면 낯익다고 할 수 있는 군인들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정 하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보물.

두 열쇠를 노리고 왔다는 걸.

‘포기한 줄 알았더니, 역시 아니었나.’

볼일을 마치고 그냥 물러서기에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겠거니 여겼건만, 단단히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하여.

나는 다른 것보다 적들의 숫자부터 살폈다.

‘전위에 셋, 나머지는 좌·우측인가.’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주변을 훑자 여기저기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수만 해도 최소 십여 명 이상.

거기다.

정 하사의 뒤편에서도 꿈틀거리는 기운이 엿보였다.

‘스물은 족히 넘어.’

몇이나 데려온 건지.

입을 벌린 괴물의 대가리처럼 넓게 포진해 있는 구성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정 하사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은근슬쩍 장포 뒷자락 너머로 약도를 넘겨주고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오로지 한세정에게 보내는 수신호였다.

여차하면 도망칠 예정이니 마력을 아끼거나 ‘고유 능력’을 숨길 것 없이 곽재우와 조이령을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하라는.

툭툭―

그러자 누군가 내 등을 연달아 친다.

확인했다는 뜻.

난 거기까지 밀담을 주고받고서 정 하사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의중이 뻔히 보이는 손님이었기에 딱딱한 말투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정 하사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받는다.

“저희가 황 어르신을 영입하기 위해 인근을 수색하던 도중, 어르신의 가택에서 한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

“안전지대 생성권과 차원 상점 생성권이라는 아이템이 드랍됐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구매하고자 아윤 씨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초전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정 하사.

질질 끌고 싶지 않다는 듯한 눈빛의 그는 얘기를 끝낸 직후 품 안에서 커다란 주머니를 꺼냈다.

성인 남자 머리통 두세 개는 합친 크기.

“약 8백 개 분량의 근원석입니다.”

살짝 입구를 열어 랜턴을 비춘 주머니 속에는 1등급 근원석 수백 개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나는.

그 내용물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교전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수천 개라면 또 모를까. 기껏 근원석 수백 개 따위에 보물을 넘길 일은 결단코 없었다.

저들도 그걸 알기에 애초부터 포위망을 구성해 접근해 왔을 테지.

다만.

“…죄송하지만 거절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불가하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오해를 했을 뿐이고.

단순히 미쳐 날뛰는 괴물들로부터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하여 많은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가능성도 있으니―

“…예?”

라고 만에 하나쯤, 아니, 십만에 하나쯤 될 법한 확률에 기댔으나 아무래도 그런 해피 엔딩을 고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굳은 얼굴로 되묻는 정 하사를 필두로.

스윽―

스윽―

방패를 높이 드는 두 병사의 행동에 맞춰.

후우우욱!!

사방에서 거센 살의가 물밀듯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척!

“정확히 781개입니다. 무기를 지니신 것으로 보아 차원 상점에 들러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요. 이만한 양이면 네 분 정도는 완전 무장도 가능한 수준입니다.”

불곰파와 같이 괴상한 집단을 제외하고서 통상 무리를 이끄는 지휘관은 병사를 아끼기 마련.

정 하사도 그러한 일반적인 입장이라.

싸움이 벌어지는 극단적인 결말만큼은 피하고 싶은지. 공격 명령보다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흥정.

“좋습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송 병장, 꺼내.”

“옛!”

그의 선택은 흥정이었다.

덜컥―

좌측에 선 병사가 배낭용 가방에서 뭔가를 끄집어낸다.

각진 녹색 나무 상자였다.

“여깄습니다.”

송 병장이라는 병사로부터 그걸 넘겨받아 뚜껑을 열며 팔을 뻗는 정 하사.

저게 뭔가.

“포션 상자입니다.”

상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구급함이었다.

체력 회복 포션을 포함해 해독 포션, 화상이나 빙결 등에 쓰이는 상태 이상 포션 등 각종 물약이 열 병이나 담긴.

근원석으로 환산하면 얼추 500개 분량이었다.

“8백개 분량의 근원석과 열 병의 포션 상자. 여기에 가시는 목적지, 최대 15킬로미터 거리까지는 호송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 하사는 이번이 마지막 조건이라는 양.

또박또박하게 읊조렸다.

쿠웅!

그 문장의 마침표가 찍히는 타이밍에 한 차례 더 출렁거리는 살기의 파도.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이마저도 포기하고 보물을 지키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잔뜩 들어간.

역시.

“하나.”

우우우우웅!!

저들과 우리는 틀어질 운명이었다.

“둘.”

허면.

먼저 치고 나갈 수밖에.

“…셋.”

[오르그의 파괴 본능]

후와아아아아악!!

예고 없이 뻗어 나간 주먹이 마력을 퍼트리며 전방을 부순다.

한세정들에게 지시한 대로 나 또한 마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기에 위력이 어마어마한 권격.

다만.

상대도 일전을 불사할 요량으로 대기 중이었던 탓인지.

“막아!”

“합!”

“흐아아앗!”

쿵―

쿵―

우우우우우웅!!

쿠구구구궁―!

주먹은 목표로 했던 정 하사 대신 오른팔을 내미는 동시에 솟아오른 우윳빛 막과 강철 벽을 강타했다.

콰아앙!!

거칠게 울려 퍼지는 폭음.

“이 새끼가!”

그 사이로 정 하사의 괴성이 들린다.

어느새 칼을 빼 든 그는 왼손을 얼굴에 가져가고 있었다.

치이이익―

치익!

내게는 익숙한 무전기를 들고서.

“여기는 상인, 지금부터 목표를 사살한다! 다시 전달한다. 여기는 상인, 지금부터 목표를 사살한다!”

- 여기는 호랑이!

- 여기는 사자!

군수용 무전기에 고래고래 외치는 정 하사의 목소리 위로 덧입혀지는 낯선 음성들.

그게 전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돌겨어어어억!”

“돌겨어어억!!”

제각기 창칼 등의 무기를 꼬나쥔 두 무리의 병사들이 우리를 덮치는 형식으로 좌·우측에서 튀어나와 달려든다.

“우리도 공격해!!”

“옛!”

미리 감지했던 대로.

정 하사의 후방에서도 추가로 예닐곱 명.

이에.

“출발!”

쿠우웅!

나는 땅을 강하게 내려찍으며 소리쳤다.

어서 가라고.

“갈게요!”

번쩍―!

그 즉시 빛이 번뜩였고.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쿠구구구구구구구궁!!

대지가 뒤틀렸다.

* * *

타앗―!

“저쪽이다! 11시 방향!”

“11시 방향!”

발걸음을 떼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추격자들의 고함이 들린다.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는 의지로 범벅된 아우성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주시했다.

캄캄하기만 한 도심.

한세정들은 잘 도망치고 있을까? 한동안은 마력에 여유가 있을 테니 세 사람을 연속으로 옮긴다 해도 당장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터.

다만.

문제는 착호 부대만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

괴물들.

기수와 깃발의 보호를 위해 영역을 돌며 청소를 진행 중인 괴물들과 마주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한세정이야 괜찮다 치더라도 조이령과 곽재우는 짐 덩어리에 불과했기에.

더군다나.

괴물들과의 전투로 발목이 붙들렸다가 추격자들에 의해 인질이라도 되면 끝장이다.

‘여기서, 슬슬 합류하자!’

하여.

나는 고민 끝에 추격자들에게 혼동을 주고자 길을 뺑뺑 돌던 도주법을 파하고 곧장 한세정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삑―

[‘고주파 신호기’가 작동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로 당신의 위치 정보가 전달됩니다.]

이쪽엔 내비게이션이 있었으니까.

삑―

버튼을 누르고 3초가 지나기 전에 신호 기기에서 응답이 돌아온다.

나는 시야 한쪽에 펼쳐진 홀로그램 지도를 따라 한세정들의 경로를 예측해 가며 건물과 도로를 가로질렀다.

그러길 얼마.

“이령아! 멈추면 안 돼!”

“하아, 하악!”

“재우 씨! 뒤는!”

“우선 적은 안 보입니다!”

막 빌딩을 돌아 나갈 즈음 멀리서 한세정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전해져 왔다.

끽해야 50m?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나는 발끝에 힘을 주며 마력을 가동했다.

‘후우!’

[돌진]

쿠웅!

아스팔트를 박차고 날듯이 질주하는 육체.

45m, 40m, 35m.

한 발 한 발에 기하급수적으로 간격이 줄어든다.

그러다.

“세정 씨!”

“…아윤 씨!”

종국에 한세정들의 뒤를 딱 잡은 순간 기묘한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콰아앙!

푸화하하하하하학!!

“물……?”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지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량의 ‘격류(激流)’가 일대를 집어삼키며 쏟아지는 광경이.

[〈던전 : 파도 속의 고치〉가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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