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여기서 왼쪽입니다.”
2층짜리 패스트푸드 가게를 지나며 신호를 보내자 수레를 좌측으로 꺾는 곽재우.
그 옆으로 각기 칼과 창을 뽑아 든 한세정과 조이령이 따라붙는 걸 확인한 후에 나는 다시금 전진했다.
손에는.
[꼭 살아남으시게.]
[나도, 손주도―]
심기를 어지럽히는 노인의 쪽지를 쥐고서.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글귀였으나, 참 부득이하게도 치워 버리거나 품에 갈무리할 수가 없었다.
후면에.
농자재 백화점으로 가는 약도가 그려져 있던 탓이었다.
이 역시도 노인의 노림수였으리라.
본인의 편지를 한 번이라도 더 읽게 하려는, 그로 인해 계속해서 되새기도록 만드는.
덕분에 머릿속에서 노인의 글귀와 누나의 목소리가 엉겨 붙어 시시각각 날 괴롭히는 중이었다.
“아윤… 씨?”
“…예?”
“그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괜찮습니다. 별거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그 고뇌와 번민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지.
재출발 직후부터 힐끔힐끔 훔쳐보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한세정. 그러나 나는 전과 같이 아무렇지 않다는 대꾸로 그녀의 걱정을 흘려 넘겼다.
애당초.
‘저희,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한세정 또한 노인이나 누나와 마찬가지로 채 한 줌도 남지 않은 삶의 의지를 되살리려 하는 자극제였으니까.
“…그나저나… 재우 씨,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아까 그 군인이 했던 영입 제안이요. 착호 부대였던가? 전 솔직히 저희 중 누구 한 명쯤은 수락할 줄 알았거든요.”
이에 대화가 끊기며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자, 냉랭한 기운을 풀어 보려는 듯 불쑥 입을 여는 조이령.
주제가 제법 공감을 이끌어 냈는지.
“저도 놀랐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묵묵히 수레만 밀던 곽재우가 말을 받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인이고 하니 두 분께서도 어르신과 함께 가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의외라고 느꼈듯이.
한세정들도 일심동체로 영입 제안을 거절했던 상황에 대해 꽤나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요? 저는 재우 씨가 가실 줄 알았어요. 저야, 세정이가 당연히 안 갈―”
“이령아?”
“…응? 아, 아아, 하하……. 아무튼, 저도 안전한 환경을 찾아 떠나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째서 거절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히 조금 궁금했거든요.”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맹세, 요?”
“네.”
“무슨……?”
흥미롭다는 얼굴로 곽재우의 이야기를 듣던 조이령은 대화 말미에 등장한 ‘맹세’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상적인 문답에서 쓰기에는 다소 무거운 글자였으니까.
하여.
어떤 맹세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자.
“…불곰파와의 일이 끝나고 나서, 어르신과 유신이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던 중에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곽재우는 상관없다는 듯 읊조렸다.
허나.
덤덤하게 내뱉어진 말투와 달리 그의 얘기는 고요하던 행군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복수할 대상도, 반겨 줄 가족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이제 무얼 해야 하나 하는.”
“아.”
“그러던 차에 어르신께서 배가 고프지 않냐며 감자를 건네주셨고, 저는 거절했습니다.”
“왜…요?”
“결정을 내렸었습니다. 미련 없이 죽어 버리기로. 죽을 건데 아깝게 식량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너무나도 극단적이었기에.
친구라는 지지대가 존재해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던 한세정이나 조이령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물론.
당연하게도 가장 두드러지는 반응을 보인 건 단연 나였다.
훅―
“……?!”
설마.
곽재우가 나와 똑같은 문제로 시달리고, 더하여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기에.
나아가.
“그런데 어르신께서 그러더군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만들어 살아가라고. 무의미한 죽음은 먼저 떠나간 이를 제일 슬프게 하는 행동이라며.”
“……!!”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라.
이 한마디가 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저 조언은.
3년 전, 오른팔을 잃은 사고로 자살 충동에 휩싸였던 혈육을 붙잡기 위해 여인이 시도한 방식이었으니까.
‘…….’
나는 그 기묘한 광경에 말을 잃어버렸다.
대체 노인은 어떤 인물이기에.
쪽지를 통해 누나와의 과거를 불러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동일한 처지에 놓인 이를 누나와 동일한 방식으로 설득하려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우연으로 가능한 일인가?
오히려 이쯤 되니 하늘에 있어야 할 누나가 제 곁으로 쫓아오려는 나를 말리고자 노인으로 둔갑해 눈앞에 나타났던 게 아닌지 의심될 지경.
“…….”
그래서인지.
내 손이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향해 움직였다. 살갗에 전해지는 차가운 촉감. 거기에 대고 묻고 싶었다.
정녕.
당신의 소행이냐고. 누나는 진정 내가 이 세상에 머무르길 원하는 거냐고.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툭―
뚜벅뚜벅―
일순간 말을 멈춘 곽재우가 수레를 내려놓더니 내게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2m에 달하는 거구답게 단숨에 간격을 좁힌 그는 내가 시선을 돌리자 불꽃이 치솟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외쳤다.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지……. 결론은 단순했습니다. 적어도 당장 죽어선 안 될 이유가 한 가지 있다고. 복수라는 가장 값진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해 보답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냥 죽어선 안 된다고.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맹세했는지.
또.
“당신께 제 목줄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저와 제 동생의 원한을 풀 수 있게 도와준 당신에게 목을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죽으려 했던 놈이니 고기 방패로 써도 좋고, 잡일 노역용 노예로 부려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이 만족스럽다 여길 때까지 저를 사용하십시오. 그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누구에게 맹세했는지를.
다만.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탓에 나에게 있어 곽재우의 선언은 그저 누나가 보내는 또 하나의 시그널로 다가올 뿐이었다.
누나와 노인, 한세정에 이어 내 영혼을 이 땅에 묶어 놓는 새로운 쐐기 말이다.
* * *
“전방에서 바퀴 자국 및 다수의 족적을 발견! 시간 측정 시도합니다!”
“측정 완료! 지금으로부터 약 5분 전에 새겨진 흔적입니다!”
“좋아.”
갈수록 더 어두컴컴해지는 도심.
기어이 비가 내리려는 듯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을 할 즈음, 드디어 황금 고블린과 5분 거리까지 근접했다는 소식에 정 하사는 생긋 웃으며 몸을 크게 돌렸다.
그러고는.
차렷 자세로 시립한 1소대 병사들 머리 위로 팔을 휘휘 저었다.
미리 고지한 대로.
“자, 지금부터는 나와 1분대가 먼저 진입한다.”
분대를 쪼개라는 신호였다.
최악의 경우 황금 고블린의 살갗을 갈라 배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강제로라도 끄집어낼 심산이다만, 그건 문자 그대로 최악을 상정해 짜 둔 계획.
가급적이면 신사적이고 매끄러운 교섭으로 보물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만큼 수월한 거래를 위해선 마흔 명이나 되는 인원을 협상 테이블에 죄다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위기감 조성은 최대한 피해야 하니까.
“2분대와 3분대는 각기 좌우로 돌아 신호를 보내면 즉각 기습할 수 있도록 대기한다.”
“옛!”
“알겠습니다!”
“4분대는 사주 경계에 들어간다. 괜한 잡놈들 때문에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50m 이내로 접근하는 모든 놈을 죽여. 필요하다면 2분대와 3분대에서 지원을 나가되 우리의 목적은 황금 고블린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옛!”
“옛!”
“옛!”
“위치로.”
“위치로!”
“위치로!”
“위치로!”
1소대 병사들은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작지만 강렬하게 복창한 뒤, 기세를 피워 올리며 전원 각자 맡은 구역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였다.
정 하사는 마지막 한 명까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1분대와 함께 흔적을 밟아 갔다.
적절히 체력 안배를 하되.
쿠웅!
쿵!
사사사삭!
상당히 빠른 속도로 돌파하기를 대략 3분여.
‘…정지!’
최선두에서 달리던 정 하사는 마침내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헌데.
상황이 조금 묘했다.
‘이제야 잡았네. 그런데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어째서인지.
황금 고블린과 세 명의 능력자들이 걸음을 멈춰 선 채 도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모여 있었으니까.
‘…뭐지?’
다툼이라도 있었나?
한마디 언급도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정 하사는 바로 진입하려다 마음을 접었다.
아무래도.
추이를 좀 살펴보는 게 좋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진짜 분쟁이 벌어진 거라면, 잘못 건드렸다 이번 거래를 물거품으로 만들 확률이 매우 매우 높아서.
그리되면 쓸데없는 희생과 피를 마주할 테고.
하여.
정 하사는 최대한 동공을 크게 키우며 놓친 부분은 없는지 전방을 두 번 세 번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분이 발생했다는 쪽으로 추가 기울어 갔다.
‘세 명이 한 명을 바라보고 있고, 특히 저 거구의 남자는 황금 고블린과 코앞에서 대치 중.’
전반적인 구도가, 전체적인 정황이 딱 그러했으니까.
허면.
마찰이 빚어진 까닭은 뭘까. 본 부대의 영입 제안마저 단체로 무시하며 똘똘 뭉쳤던 놈들인데.
‘…아, 그런 건가.’
머리를 굴리며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가던 정 하사는 끝끝내 그럴싸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저들도.
보물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그게 원인이라면 저 그림이 깔끔하게 들어맞는다. 본래 황금 앞에선 아군도 적도 없는 법이니까.
게다가 목숨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물건이라면 웬만해서는 욕심에 휘둘리겠지.
물론.
틀릴 가능성도 있다.
공기 중에 남은 흔적을 영상화해 시청한 병사의 말에 따르면 애당초 저 황금 고블린은 제 보물의 소유권을 황 노인과 한세정이라는 여자에게 별 대가 없이 넘겨주려 했었고, 그럼에도 당시에 특별히 다툼은커녕 언쟁조차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니.
오판을 했거나, 싸움이 났을지라도 아예 다른 사안으로 저런 광경이 연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하나.’
그런 탓에 정 하사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난하게 일을 진행하고픈 마음이 컸기에 어느 쪽으로든 함부로 움직이기가 망설여졌다. 황 노인의 괴물 공급 라인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인력 자원의 낭비는 금물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지켜볼 수만은 없을 터.
“진입한다. 분대장은 남아서 신호 기다리고, 송 병장과 최 상병이 보조한다.”
“옛!”
결국 결단을 내린 정 하사의 수신호에 방패와 단검으로 무장한 검방병 두 사람이 후다닥 달려와 뒤로 붙는다.
부대 내에서도 방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병사들.
어떤 위기가 닥쳐도 한 번은 버텨 낼 수 있는 최고의 방패를 대동하고서 황금 고블린에게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