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겨울이 되었음을 알리듯 다섯 시가 막 넘자마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서쪽으로 천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을 등지며 노인이 얘기한 농자재 백화점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컹!”
선두에는 나와 백구가 섰다.
언제 어디서 전투가 일어나든 사전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전위는 감각적으로 제일 뛰어난 이가 맡는 게 좋았으니까.
그런 상태로.
라세르타의 팔 여섯 개를 붙인 키메라 ‘육팔’이와 뿔 달린 곰 키메라 ‘불곰’이 각기 좌우익에 서서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노인과 유신이를 중앙에 두고 화살촉 형태로 포메이션을 구성했다.
후방 경계를 담당할 꼬리 쪽에는 한세정이 자리를 잡았다.
유신이의 집중 치료를 받으며 거의 완쾌가 된 그녀는 혹시 몰라 중앙에 있으라는 내 권유에도 꿋꿋이 파수꾼의 역할을 자처했다.
끝으로 조이령과 곽재우는 커다란 수레에 담긴 짐을 관리하되 유사시에 위급한 부분을 도와주는 지원 팀으로서 발을 맞췄다.
그렇게 포지션을 잘 짜 둔 덕분인지.
“…크르르르르!”
“좌측? 돌아가자.”
“컹!”
우린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20여 분 가까이를 나아갈 수 있었다.
아마.
이 경로가 안전한 데에는 어제 프라구스들이 몰려왔던 길목과 겹쳤다는 점도 한몫한 것 같았다.
텅텅 비어 버린 영역이라 따로 앞길을 막아설 만한 병력이 없었으니까.
다만.
찌릿―
“……?!”
“…크르르르르!!”
딱 거기까지였다.
쿵―
쿵―
쿵―
프라구스의 영역을 막 벗어나 나아가길 채 5분도 되지 않아 괴물들이 몰려오는 중이었으니까.
콰앙!
“그어어어어어어!!”
“그어어억!!”
반쯤 무너져 있던 상가를 완파시키며 출현한 십여 마리의 괴물 부대.
흐물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와 굵직한 세 개의 손가락이 특징적인 외계 생명체, 크루톤들이었다.
“다리를 들어 올리면 마비 독을 쏘려는 것이니 주의해!”
내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과거를 남겨 준 놈들의 등장에 나는 반사적으로 경고 메시지를 날리며 앞으로 팍 내달렸다.
선수 필승.
정보가 있는 상대라면 공격을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돌진]
[베어 내기]
쿠웅―
서걱!
땅이 울린다 싶은 순간 이미 크루톤들의 코앞에 다다른 나는 손톱을 쫙 뽑아 든 왼팔로 전방을 거칠게 내리그었다.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다섯 개의 칼날은 머금은 마력을 토해 내며 두 마리를 한꺼번에 갈라놓았다.
촤아아아아악―!!
하늘 높이 솟구치는 핏물.
그 찐득한 액체가 몸에 묻지 않게끔 서둘러 몸을 회전하기 무섭게 뭔가가 내 옆구리를 지나쳐 간다.
“케에에에엑!!”
“케르륵!!”
육팔이와 불곰이었다.
유신이가 직접 작명했다는 두 마리의 키메라는 다소 허술한 듯한 이름과 달리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며 크루톤들을 찢어발겼다.
그런 탓일까.
“그어어어어어!!”
“그어어어!”
“끄어어어!!”
교전이 일어나자마자 썰려 나가는 동족을 보며 번뜩 위기감을 느꼈는지, 크루톤들이 괴성을 질러 대며 다리를 하늘 높게 쳐들기 시작했다.
마비 독.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 밑천을 모조리 쏟아부으려는 모양새였다.
허나.
그다지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거라!”
미리 고지해 준 터라.
크루톤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주시하던 노인이 제때에 맞춰 회피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3m.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대략 3m 남짓이면 충분했다.
놈들은 플뤼가 아니기에, 고무처럼 늘어나는 능력은 없는 탓에 공격 범위 밖으로 물러나 적당한 간격만 벌려 놓으면 애써 준비한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찌릿―
‘왼쪽 어깨, 오른쪽 허벅지, 그리고… 발등.’
단 한 방도 놓치지 않고 전부 피해 낼 자신이 있다면.
[돌진]
쿠웅―!
지금처럼 외려 앞으로 전진해도 상관은 없었다.
파바바바박!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발판 삼아 뻗어 내는 보폭.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놈들의 독침이 아슬아슬하게 살갗을 타고 넘어가며 빈 공간을 두들긴다.
흡사 총탄이 쏘아진 듯.
숭숭 구멍이 뚫리는 대지를 뒤로하고 단박에 거리를 좁힌 나는 비장의 한 수를 무척 간단히 파훼한 사냥감을 보며 당황하는 크루톤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후.”
[오르그의 파괴 본능]
[형태 변화]
[마력 권갑화]
우우우웅―!
쾅!
나지막한 기합을 섞으며 뻗어 낸 일격에 담긴 거대한 마력이 곧 괴물의 피륙을 짓이기며 생명을 앗아 간다.
그 이후로는.
[플뤼의 탄성 일격]
투우웅!
콰직!!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기습적으로 마비 독을 살포하는 방식의 전술을 제외하고는 특별할 게 없는 놈들이라 금세 마무리된 사냥.
“추출.”
“추출.”
우리는 널브러진 크루톤들의 시체를 근원석으로 맞바꾸고서 멈췄던 수레바퀴를 재차 굴려 나갔다.
* * *
“여기서 30분 정도 쉬겠습니다.”
날이 완전히 저문 밤.
비가 오려는지 구름이 잔뜩 끼어 달빛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야심한 시각에 어느 건물에 도착한 나는 일행에게 휴식을 알렸다.
마음 같아서는 농자재 백화점까지 스트레이트로 이동하길 원했으나.
“후, 늙으니 걷기만 해도 힘들구만.”
“할아버지, 힘들어? 회복시켜드릴까요?”
“됐다. 유신이 너도 앉아서 좀 쉬거라.”
“네!”
“이령아, 우리도 앉자.”
모두의 컨디션이 그걸 불가능하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상정했던 난이도 이상으로 괴물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크루톤을 기점으로 거의 1~20분에 한 번은 꼭 마주칠 만큼.
숫자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문제는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
안 그래도 식량과 식수 등 다양한 생존 물품에 무기와 방부 처리한 신체 조각 짐 등 여러 물품으로 가득 채운 수레를 동반하는 야간 행군이라 속도가 잘 붙지 않는데, 여기에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으니 누적되는 피로의 양이 평소의 두세 배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앞으로도 최소한 몇 번쯤은 더 멈춰야 할 듯싶었다.
“아윤 씨, 물 좀 드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일정에 관한 상념으로 홀로 침묵하던 중에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세정이었다.
허리춤에 칼 한 자루를 비스듬히 찬 그녀는 물이 찰랑거리는 병을 내게 건네주더니.
털썩―
그대로 내 곁에 주저앉았다.
친구인 조이령이 저기 있는데 왜 굳이 이쪽에 와서 엉덩이를 붙이려는 건지 잠깐 의아했지만, 일단은 슬쩍 우측으로 비켜 공간을 내주었다.
이에.
싱그러운 미소로 화답하는 한세정을 두고서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물을 쫙 마시기 위해 머리를 살짝 꺾어 들어 올리던 나는.
‘……?’
점차 넓어지는 시야를 통해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다 굉장히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건.
스윽―
스윽―
다름 아닌 옆자리에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병뚜껑을 만지작거리는 한세정의 행동이었다.
저게 어디가 이상한가.
사실 단순히 ‘병뚜껑을 만지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나도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할 법한 평범한 행위였으니까.
단지.
내가 그리 느낀 건 한세정이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음, 아…….”
미세하지만 계속해서 달싹거리는 입술 말이다. 공허한 손장난과 꿈틀거리되 꽉 붙어 있는 입.
위 두 개 항목을 동시에 선보이는 사람의 심리는 아주 명확하다.
“혹시,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상대방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여.
가볍게나마 운을 띄우자.
“네? 아, 그게…….”
속마음을 들킨 한세정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건물 바닥만 내려다보는 그녀.
대체.
뭘 얘기하려고 이토록 뜸을 들이는지 의문이 턱 밑까지 차오를 무렵.
“후…….”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용기를 낸 한세정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저희,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뜻밖에도 나와의 동행을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예?”
설마 그런 내용일 거라고는 아예 예상을 못 했던 터라 순간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되묻듯이.
한세정은 그 멍청한 물음에 질문을 다시 하는 대신 어째서인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침묵을 고수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
나는 대답 아닌 대답을 남긴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예측 못 한 발언에 너무 얼떨떨해서.
더불어.
귀를 지나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살갗에 비친 그 마음이 진심일뿐더러 또한 꽤나 간절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대관절 내가 뭐라고.
“음, 저는―”
그래서였을까.
나는 일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정말 힘겹게 꺼낸 제안이라는 게 그녀가 발산해 내는 감정에 덧입혀져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는 터라 단박에 거절 의사를 밝히기가 매우 꺼려졌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였다.
“저는.”
하얀 거짓말도 선이 있는 법.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한들 지키지 못할 약속, 지키지 않을 약속은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 했다.
그러니.
헤어지는 날, 여태껏 쌓았던 추억을 아름답게라도 가져가기 위해 괜한 기대감 따위 심어 주지 말고 깔끔하게―
“죄―”
“…커엉! 컹!”
손을 내저으며 이번이 마지막 동행임을 밝히려던 그때.
“……?”
“컹! 컹!”
노인과 유신이 근처에서 편히 쉬고 있던 백구가 느닷없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요란하게 짖어 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으나.
“컹컹!”
“…일단 그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죠.”
“아, 네…….”
녀석은 굴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거칠게 짖었다. 이에 어떤 사고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나는 뱉기 직전이었던 문장을 꿀꺽 삼키며 한세정을 비롯한 모두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소리쳤다.
그 일갈에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각자의 포지션을 찾아가는 사람들.
휘이이이이잉!!
저마다 칼과 창을 손에 쥐고서 백구가 응시하던 부근을 바라보고 서자 타이밍 좋게 불어닥치는 칼바람.
과연.
‘뭐가 오는 거냐…….’
백구 저 녀석은 이 칼바람 속에서 무엇의 냄새를 맡은 걸까.
휴식을 방해한 미지의 대상을 향해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도록 발바닥에 마력을 보내며 대기하길 1분여가 됐음을 즈음.
까만 장막 너머에서 튀어나온 것은.
“이쪽입니다!”
“저 건물입니다!”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람?”
인간의 언어였다.
족히 2~30여 명은 될 법한 다수의.
물론.
당연히 환청은 아니었다.
똑똑―
“…혹시 황철성 어르신 계십니까?!”
음성이 들린 직후, 실제로 어둠을 헤치며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우리가 머무는 건물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것도.
“저 착호 부대 정성훈 하사입니다!”
폭이 제법 넓은 장도와 묘하게 어울리는 군복을 쫙 빼입은 ‘군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