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나비 효과.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또.
실제로 경험해 본 이들도 상당히 많으리라. 대개 나비 효과의 출발 지점은 사소한 사건인 경우가 태반이니까.
“마치… 멸망한 세계에서라도 왕처럼 살아 보려던 어느 악인(惡人)의 욕망처럼 말이야.”
* * *
[지금부터 「침략의 문_Ver. 2 : 영토 전쟁」 업데이트를 실시합니다.]
“…이게 무슨.”
나는 난데없이 나타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문장과 단어의 파도에 굉장한 당혹감을 느꼈다.
동시에.
이것이 사방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의 정체라는 걸 직감했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저것 외에 다른 원인은 없노라고.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고한 확신이었고, 이를 증명하는 새로운 글귀가 허공을 가렸다.
[「침략의 문_Ver. 2 : 영토 전쟁」 업데이트가 진행되는 동안 자그마한 ‘이벤트 : 기수 사냥’이 개최됩니다.]
《이벤트 : 기수 사냥》
- 「침략의 문」을 통해 〈차원 : 테라〉를 침략해 온 수많은 외계 종족의 선발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를 공략해 저마다의 영역을 손에 넣었고, 이제는 그 땅 위에 깃발을 꽂아 온전한 주인임을 선포해 출진을 기다리는 본대를 부르려 하고 있으니, 막거나 피하거나 당신은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영역 선포’ 중인 기수 : (0/~)
┗현재 파괴한 깃발 : (0/~)
[각 종족의 ‘깃발’이 설치되려 하고 있습니다.]
[각 종족의 ‘깃발’은 〈차원 : 테라〉의 마력을 흡수할 것이며, 한계치에 다다른 ‘깃발’은 「열쇠」로서 작용해 각 종족의 차원에 통로를 개방하게 될 것입니다.]
[‘깃발’이 설치되어 「열쇠」로서 변화하는 동안 이를 보호하는 모든 침략군의 신체 능력과 기술 위력이 10% 상승하며, 공격성이 대폭 향상됩니다.]
[더불어 ‘깃발’의 안전과 온전한 영역 선포를 위해 주변 일대 청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혹여 당신이 이 역경과 고난을 뚫고 ‘깃발’과 ‘기수’를 제거한다면 그에 따른 엄청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니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
보통.
정신적으로 충격을 너무 세게 받으면 머리가 새하얘진다고 하던가. 미친 듯이 출력되는 문장의 파도를 주르륵 읽어 내려가 마침표에 도달한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숫제 당황스럽다는 감정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심정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을 시간은 없었다.
콰앙!
쾅!
“그에에에에에엑!!”
“그에에엑!”
“……!”
흩뿌려 대는 살기로 사방을 진동시키던 괴물들이 기어이 코를 벌렁거리며 등장한 탓이었다.
아마도.
이 근처를 떠돌던 놈들이 고작 10%일지언정 기존보다 상향된 오감을 통해 나와 노인의 냄새를 맡고 위치를 특정해 온 것 같았다.
혹은.
등짐에 잔뜩 배인 혈 향을 추적해 왔거나. 뭐,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가시죠!”
지금은 거의 이십여 마리에 가까운 괴물들을 피해 물러나는 게 급선무였다.
싸울 전력이 나와 백구밖에 없었으니까. 나아가 이 전력으로는 근접 전투 능력이 전무한 노인을 지킬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했다.
한세정과 조이령 등을 보호하고자 집 근처에 키메라 두 마리가 비치된 상태라라는데, 그런 상황에서 노인에게 문제가 생겨 키메라들의 제어가 풀리기라도 하면.
“뒤는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시죠.”
“자네―”
“어서요!”
찰나 간에 끔찍한 상상을 한 나는 인상을 콱 찌푸리며 함께 싸우려던 노인과 백구를 억지로 돌려보냈다.
집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몇백 미터.
그 정도는 백구가 붙어 있으면 충분히 주파할 수 있을 거라 믿은 나는 등짐을 대충 내려놓고 전투태세를 갖추며 팔등을 살짝 갈라 피를 흩뿌렸다.
촤아악!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는 비릿한 냄새. 살 내음보다 더한 자극제의 등장에 괴물들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된다.
“그에에에엑!!”
“캬아악!”
“으어어어어!”
“후.”
짧은 기합.
나는 일제히 달려들어 오는 괴물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쿠웅!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쿠구구구구구궁!!
순식간에 뒤틀리기 시작하는 대지.
코앞까지 다가왔던 괴물들이 갈라지는 지반을 견디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바닥을 구른다. 그 중심에 선 나는 기술을 발동하던 자세를 그대로 이어 가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는 것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탓―
경쾌한 움직임.
허나.
[돌진]
[오르그의 전투 본능]
우우우우웅!!
이후에 펼쳐진 장면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 * *
최대한 빠르게 괴물들을 처리하고 재차 복귀하는 길.
이쪽도 습격을 받은 것인지.
“키에에에에에엑!!”
“그어어어어!”
‘이런.’
급격하게 줄어드는 간격 속 몇 종류의 괴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에.
[돌진]
꾸우우우욱―
쿠웅!
미간을 찡그리고서 기술까지 활용해 스피드를 올리며 소음의 근원지로 뛰어가니, 곧 열댓 마리의 괴물에 둘러싸여 분전하고 있는 키메라들이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분전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모호했다.
“컹! 커헝!”
“케엑! 케에엑!”
“케르륵!”
쿵!
콰드드득!
평범한 진돗개였기에 다소 밀리는 체격을 외려 장점 삼아 빠른 기동성과 뛰어난 회피력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백구, 도마뱀과 비슷한 괴물 라세르타의 팔로 추정되는 걸 여섯 개나 부착한 키메라, 여기에 이마와 어깨 등 전신 곳곳에 뿔을 단 곰과의 개체까지.
‘프레데터’든 아니든 서로 다른 육체를 이식하는 데 성공하면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건 똑같다고 소리치듯, 세 마리의 키메라는 수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각자만의 방법으로 괴물들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하아압!”
후우우욱!
서걱!
“케엑―”
쿵!
한쪽에는 붉은 갑옷과 적색 대검으로 무장한 곽재우도 힘을 보태고 중이라 굳이 내가 도와주려 나서지 않더라도 알아서 해결 가능할 정도로 승기가 기울어져 있었다.
물론.
구태여 시간과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달려가던 기세를 유지하며 괴물들의 후방을 들이받았다.
후우우욱!
쿠웅!
“케엑―”
꽉 움켜쥔 주먹.
‘돌진’의 효과를 받으며 거칠게 내지른 일격에 가격당한 괴물 하나가 반쯤 우그러지며 땅바닥에 처박힌다.
“흐읍!”
[베어 내기]
서걱!
촤아아악!
손끝에 남은 묵직한 감촉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측으로 틀어졌던 허리를 회전시키며 휘두르는 왼팔. 마력을 머금은 손톱이 다섯 줄기의 선을 그리며 궤적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죄다 갈라 버린다.
후두둑―
털썩!
앞뒤로 찢고 부수는 공세에 맥없이 허물어지는 괴물들.
나는 금세 마무리되어 가는 전장을 지켜보다가 문득 쭉 팔을 뻗어 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텁!
“켁! 케엑!”
대략 1m 70cm쯤 되는 크기에 생긴 건 사마귀와 비슷한 괴물은 호흡이 막히자 반사적으로 거대한 낫을 연상케 하는 팔을 휘저으며 나를 밀어냈지만.
후우욱―
콰직!
“켁, 케엑―”
곧이어 팔다리를 부숴 버리는 내 손길에 강제로 조용해졌다. 나는 그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노인과 합류했다.
“컹!”
“역시, 자네였군. 누가 와서 도와주나 했더니. 그런데… 그건 뭔가?”
치열했던 전투를 마치고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던 노인은 안도감을 표하다 말고 무력화가 되긴 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괴물을 가리키며 의문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째서 살려 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하여.
나는 곧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이령 씨에게 줄 겁니다.”
“아.”
조이령에게 넘길 거라고.
그녀에게도.
능력을 개방할 계기를 주려 한다고.
이 세상은 일반인의 신분으로는 절대 생존할 수 없는 세계였기에, 마침 제물도 생겼으니 기회를 잡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좋은 생각이군. 지하실로 옮겨 두면 되겠어. 그보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 보였는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드릴 물건도 있고.”
“그러지. 얘들아, 가자.”
“컹!”
“케르르륵.”
“케엑.”
왈칵 퍼진 피 냄새에 끌려올 더 많은 괴물들을 피해 추출 작업을 끝내고 지하실에 도착한 나는 괴물과 등짐을 풀어놓았다.
촤르르륵―
“여기 물이… 허, 이걸 가지러 갔던 겐가?”
키메라들을 시켜 주변을 살피도록 하고 지하실로 내려와 물병을 꺼내 오던 노인은 내가 펼쳐 놓은 보따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는지 감탄이 섞인 숨을 토해 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값어치를 따져 추리고 추렸다 한들 그래도 스무 개가 넘는 양의 각종 무기가 한 줄로 늘어서서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전에 신세 졌던 일과 이번에 받은 도움에 대한 나름의 보답입니다. 제게 베풀어 주신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판매하시면 적잖은 양의 근원석을 챙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
이 많은 양의 아이템이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알겠네. 이런 걸 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받기 싫다 말하면 강제로라도 손에 들려 줄 모양이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 외에 아직 조금 더 있으니, 추후에 그것들까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고 호신용으로라도 쓸 만한 무기를 가져가시면 나머지는 상점에 들러 판매해 근원석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란 말인가? 허… 전부 아이템인 듯한데, 내게 정말 과분한 선물을 해 주는군.”
나는 얼떨떨해하는 노인이 다른 소리 하기 전에 보따리로 썼던 장포를 걷어 내 물로 대강 닦고서 옷 위에 걸쳤다.
그러면서.
스윽―
“……?”
“이 정도면 길이도 무게도 적당할 거다.”
“저도, 주시는 겁니까?”
옆에서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던 곽재우에게도 칼날의 길이만 1.5m가량 되는 대검을 한 자루 건넸다.
그는 내가 왜 무기를 쥐여 주는지 매우 의아한 얼굴이었다.
흘러가는 대화를 통해 노인에게는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음을 알았겠지만, 반면 자기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능력을 일깨워 주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복수를 이뤄 주는 등 일방적인 도움만 받았을 뿐.
하여 무척이나 어리둥절해하는 곽재우에게 나는 딱 한 가지를 부탁했다.
“조금 전에 뜬 알림, 그 내용대로라면 앞으로도 괴물들이 계속 찾아올 테니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어르신을 도와 여길 같이 지켜 줬으면 해.”
막 진행된 ‘기수 사냥’ 이벤트가 언제 종료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위험에서 노인과 아이, 한세정이 벗어날 수 있게끔 힘써 달라고.
실력적으로는 가장 부족할지 모르나, 동료의 가치는 꼭 실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내 담담한 부탁에 곽재우는 다행히 긍정적으로 응답해 주었다.
그렇게 얼추 일단락된 상황.
잠시 숨을 돌리며 경계를 이어 가던 우리는 이내 미뤄 두었던 대화를 다시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