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58화 (58/232)

58화

“…….”

멍하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시계만 바라봤다. 그만큼 누적된 피로가 엄청났던 상태였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기절을 해 버릴 정도로.

아마.

똑똑―

“혹시 일어났는가.”

“아, 예. 일어났습니다.”

지하실 문을 두드리며 전해진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10여 분은 더 멍때리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또다시 수마에 잡아먹혀 기절해 버렸든가.

“다행히 일어나 있었군.”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지하실로 들어온 노인의 손엔 세상이 무너진 뒤로 거의 본 적 없었던 흰 쌀밥과 김치에 김을 포함한 몇 개의 반찬으로 채워진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탁―

“일어나면 배가 많이 고플 것 같아서 조금 챙겨 왔는데 말이야. 좀 들게.”

식탁이 따로 없어 바닥에 소쿠리를 내려놓은 노인이 전과 같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식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나는 그가 건네는 수저를 받아 들며 한세정과 조이령에 대해 물었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기절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옆에 누워 있었던 두 여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원활한 치료를 위해 위치를 변경한 모양인데.

“아, 두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자네 덕분에 거의 다 회복했으니까.”

“정말입니까?”

“그렇네. 그 한세정이라는 여인은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손주가 최소 보유량을 제외하고는 마력이 모이는 즉시 전부 쏟아붓는 중이니 길어도 사흘이면 평소처럼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걸세…….”

“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도와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네. 그리 쓰러진 걸 보면 자네도 꽤나 심각한 수준으로 무리했던 것 같은데, 자네 몸이나 잘 관리하게. 젊다고 막 굴리다가 언제 골병들지 몰라. 나처럼 늘어서 아프기 싫으면 뭣보다 몸 관리에 신경 쓰게.”

“그… 알겠습니다.”

“허허허.”

대가가 없음에도 최선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여전하고, 그에 대한 감사 표현을 거절하는 것도 여전하다.

되레 날 걱정하는 노인의 성품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거듭 인사를 마친 후.

“그럼 밥이나 어서 들게. 밥이 좀 식긴 했어도 맛 자체는 나쁘지 않을 걸세. 유통 기한도 아직 한참 남았고, 상태도 괜찮은 것들이니까.”

“잘 먹겠습니다.”

하압!

나는 연거푸 소쿠리를 가리키는 노인의 손짓을 따라 한 숟갈, 두 숟갈 식사를 시작했다. ‘나쁘지 않다.’라고 낮게 평가한 것과 달리 밥맛은 상당히 좋았다.

배가 고프면 뭐든 맛있게 먹는다고 하던가.

단기간 내에 전쟁을 풀어 나가야 하는 제약으로 한가로이 식사할 여유가 없었기에 거의 이틀을 내리 굶은 데다가 심지어 중간마다 입에 넣었던 건 죄다 인간의 심장 아니면 괴물의 심장이었던 탓에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단지.

‘…….’

허기가 해결될수록 마음 한쪽에는 불편함이 싹을 틔웠다.

더 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아 ‘튜토리얼’을 핑계로 노인과 손자를 뒤로하고 떠났을 때, 나는 분명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받은 은혜에 대해 보답하리라 맹세했었다.

헌데 이게 뭔가.

결국 이번에도 도움은 받을 대로 받고, 정작 내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전과 달리 군입마저 셋이나 더 끌고 온 형편이었다. 심지어 정상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환자로.

여기에 소모되는 식량과 물, 그리고 의약품의 양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탁―

“잘 먹었습니다, 어르신.”

“차린 것도 별로 없어서 간에 기별이나 갈지 모르겠네. 자네처럼 젊은 사람들은 든든히 먹어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 나는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하고 노인 모르게 슬며시 몸을 점검했다.

바깥.

지금이라도 외부에 나갔다가 올 작정이었다. 조창기와 불곰파 조직원들이 흘린 무기들을 챙기러.

반나절이 훌쩍 지난 터라 아직 남아 있을지.

더욱이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던 장소인지라 괴물들이 짓밟고 다녔을 게 확실해 남아 있더라도 과연 온전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다 털렸다면 사냥이라도 해서 근원석을 벌어 올 각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내가 어딜 가는지, 무슨 생각인지 안다면 극구 만류할 분이시기에 적당한 구실을 붙였다.

본디.

초인이 됐다 하더라도 생물인 이상 생리 현상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

“아, 그러게. 나도 여길 정리해야 할 테니… 그럼 갔다 와서 얘기를 해 주겠나?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알겠습니다.”

어서 다녀오라는 듯 흔쾌히 끄덕이는 노인의 모습에 작전이 통했음을 깨달은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지하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세상.

구름이 끼었는지 달과 별도 가려진 도심.

‘체력도, 마력도 충분해.’

잠을 잔 덕택이었나.

피로도 피로지만, 조창기와의 전투 이후로 죄다 소모되었던 마력도 넉넉하게 차 있음을 확인한 나는 가벼이 장포를 털어 주고는 피가 식어 버렸을 성풍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타앗!

* * *

거리를 활공하다시피 질주하며 단숨에 도착한 전장.

“키엑, 켁!”

“케에엑!”

“켁.”

콰직―

콰드득!

‘셋, 다 털어먹고 뒤늦게 찾아온 놈인가.’

벌써 휩쓸 대로 휩쓸고 지나간 것인지.

어둠 때문에 시야가 탁 트이질 않아 흐릿하지만, 이 근처를 기웃거리는 괴물은 고작 세 마리에 불과한 것 같았다.

시체도 거의 다 사라졌고.

[돌진]

[플뤼의 탄성 일격]

쿠우웅!

콰직!

바로 진입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자마자 곧바로 들이쳐 팔을 휘둘렀다.

“케엑!”

“케르륵! 케륵!”

금세 한 마리가 고꾸라지고, 그 갑작스러운 기습에 화들짝 놀라 달려드는 두 마리.

도마뱀의 대가리에 뱀의 몸통이 달린 놈들이라 타격보다는 베기가 효과적이라 판단해 손톱을 휘두르자.

후우욱―

서거걱!

원체 신체 능력이 좋아서인지, 예상이 들어맞은 것인지 기술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두 마리가 한꺼번에 잘려 나간다.

“추출.”

파삭!

파삭!

파삭!

손톱에 묻은 피를 쫙 털어 내며 세 구의 시체를 모조리 근원석으로 바꾼 나는 작은 주머니에 대강 쑤셔 넣고 주변을 둘러봤다.

부디 아무도 손대지 않았기를 바라며 전장을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

“아!”

참 다행스럽게도 주인 잃은 무기들은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곳곳으로 튕겨 나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펄럭!

원하던 걸 찾은 나는 즉시 장포를 풀어 보자기로 활용해 갖가지 무구를 하나둘 담았다.

노인 몰래 나온 터라.

따로 보따리를 챙기지 못해 피와 살점에 간간이 오물이 묻어 있는 병기를 차곡차곡 채워 갈 때마다 장포가 더러워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설령 내가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마땅히 참아 내야 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툭―

“…….”

그렇게 한창 수거에 열을 올리던 와중에 바위 틈새에서 조창기가 사용하던 도끼를 줍게 되었다.

웬만한 성인 남자 상체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도끼.

간부 중의 간부이자 이덕구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던 만큼 결코 평범하진 않으리라 여겼는데, 손에 쥐자 자연스레 출력되는 아이템 설명 안에는 추측보다 더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갈취하는 도끼》

- 행성 ‘탈티스(Taltis)’의 지배종 「수코랍토」의 송곳니를 갈아 만든 뼛가루를 도끼 제작 당시 마법 주문과 함께 합성 재료로 사용해 탄생한 무기.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의 마력과 맞부딪칠 때마다 일부를 빼앗아 흡수한다.

“이것 때문이었나.”

어쩐지.

광폭화의 지속 시간이 내 계산보다 훨씬 오래간다 싶더니만 역시 이유가 있었다. 전투가 끝나던 시점에서 마력이 모조리 소모됐던 것도 전부 이 도끼 탓이었다.

“이런 걸 사려면 대체 근원석을 얼마나 써야 하는 거지.”

척 보기에도 ‘괴물 사냥용 철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이템임을 깨닫자 그와 비례해 불곰파에 대한 증오심도 무지막지하게 자라났다.

족히 근원석 수백 개의 가치는 될 법한 도끼.

이것을 구매하기까지 착취된 노동자들의 원한과 처절한 절규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아서.

나아가.

두목인 이덕구 소유의 아이템들은 도대체 몇 명의 피를 머금은 것인지 머릿속으로 상상조차 되질 않아서.

“…젠장.”

기어코 욕설을 내뱉은 나는 괜스레 도낏자루를 강하게 틀어쥐며 분노를 털어 냈다.

이미 지워져 버린 집단.

분통을 터트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감정을 배제하며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서 더 가져가기는 무리야.”

꽈아아아악―!

워낙에 양이 많은지라 최대한 비싸 보이는 것 위주로 챙긴 나는 상대적으로 순위가 밀린 나머지를 적당한 건물 안쪽에 숨겨 두고 등짐을 멘 채 복귀 길에 올랐다.

한세정과 조이령의 치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아이템을 팔아 포션을 구매하기에 앞서 먼저 노인과 아이에게 고르게 할 계획이었다.

키메라 제작과 치유에 특화된 능력자라고 무기가 쓸모없는 건 아니니만큼 비상용이라도 구비할 수 있게끔.

그런 생각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길 5분여.

“컹!”

멀리서 백구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날 찾아 나온 건가.”

그런 것 같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나가서 10여 분이 넘도록 돌아오질 않았으니, 노인의 입장에서는 나한테 뭔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됐을 테니까.

하여.

일부러 백구의 하울링이 울려 퍼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간격.

“컹! 컹!”

꺾어지는 골목길을 돌아 나가니 노인과 아이의 집 근처 뻥 뚫린 도로에서 허공에 대고 우렁차게 짖는 백구의 형체가 보였다.

“자네 어디 갔었나!”

백구 곁에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노인도 함께였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난 내게 걱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어투로 반쯤 호통을 치는 노인. 진심이 확 와닿는 음성에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깨에 이고 있던 등짐을 내려놓았다.

잘 묶은 보따리 끄트머리로 조창기와 양건덕의 도낏자루가 교차하여 튀어나와 있는 광경에 노인은 단박에 전후 사정을 파악했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거짓말까지 더해 가며 자신에게 보답할 물품을 찾아다녔을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눈치였다.

“우선 들어가시죠.”

“후… 거참, 알겠네.”

나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선 노인의 등을 돌려세우며 훌쩍 앞서 걸었다.

아니.

걸으려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가서 설명드리겠습―”

짤막한 대화를 마치려던 찰나에.

파직!

마치 스파크가 튀는 듯한 감촉을 필두로 후방에서 등골을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찌릿!

찌릿!

“……?!”

이러한 기묘한 반응은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가 어느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곳 빠짐없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컹! 커헝!”

그에 맞춰 사방을 향해 사납게 짖어 대는 백구.

녀석도 무언가 감지한 기색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온 천지에서 밀려들어 오는 거대한 살의(殺意)를.

띵!

[공지가 도착했습니다.]

[현재 〈차원 : 테라〉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가 「80%」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정해진 조건이 충족됨에 따라 정해진 법칙에 의거하여 〈차원 : 테라〉에 ‘약속된 변화’가 찾아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