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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57화 (57/232)

57화

* * *

“이쪽으로 눕히게. 그리고… 자네가 날 도와주게. 칼을 뽑아야 할 테니. 자네는 그 옆 책상 두 번째 칸에서 구급함 좀 꺼내 주게. 어, 그래. 거기.”

노인과 손자의 집에 도착한 이후.

나를 비롯해 모두는 노인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약과 붕대 등이 들어 있는 약 상자를 가져오고, 누군가는 피와 오염 물질을 씻어 내기 위한 물과 수건을 챙겨 오는 등.

“셋을 셀 테니, 신호에 맞춰 칼을 뽑고 물을 뿌리면 유신이 너는 온 힘을 다해 치료에 임하거라.”

치료에 필요한 준비를 철저히 마치고서 곧장 수술에 들어갔다.

“하나, 둘, 셋!”

“흐읍!”

촤아악!

호흡이 잔뜩 섞인 카운팅에 맞춰 두 자루의 칼을 재빨리 뽑아내자 막혀 있던 둑이 개방되듯 솟구치는 핏줄기.

이에.

옆에서 대기하던 노인과 곽재우가 얼른 상처에 물을 뿌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으며 봉합을 시도하자 유신이라는 아이도 황급히 마력을 쏟아부었다.

“합!”

우우우웅―!

짧은 기합과 함께 눈부신 빛무리가 한세정의 복부에 머무르자 갈라졌던 살점이 서로 달라붙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위대한 소생 능력에 나는 절로 신뢰감이 생겼다.

‘살 수 있겠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나조차도 멀쩡히 되살린 힘 아니던가.

헌데.

시간이 흘러 그 당시보다 더욱 강력해졌을 테니 한세정의 문제도 충분히 해결될 것 같았다.

물론 마냥 안심하기는 힘들다.

환자가 두 명인 데다가 나나 한세정처럼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식의 특별한 경우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상 마력 스탯을 늘리기가 쉽지 않은 탓에 유신의 마력 보유량이 적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여.

“어르신.”

“왜 그러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지금?”

“예. 포션을 사 오겠습니다. 그게 있다면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포션을 구해 오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아이템의 도움을 빌린다.

단지.

먼저 구매해 뒀던 것과 제성초 교장실에서 발견했던 체력 포션은 죄다 이덕구에게 가하는 고통을 증폭시키려 투자했던 터라 현재는 해독제 따위밖에 남아 있질 않아 새로 구해 올 작정이었다.

“…괜찮겠나?”

노인은 이런 내 얘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다 말고 금세 우려를 표했다.

포션에 대한 지식은 있는지.

구할 수만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되리란 기색이었지만, 그 전에 나 또한 온전한 컨디션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체력도 마력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피로가 너무 많이 누적됐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움직일 사람이 없었다. 노인이 키메라를 동반해서 가는 방법도 가능이야 하겠으나, ‘차원 상점’의 위치를 모르다 보니 도리어 시간만 지체될 게 뻔했다.

내가 가야 했다.

“여길 부탁하겠습니다.”

“알겠네. 조심하게.”

“예.”

스윽―

나는 혹여나 피 냄새를 맡고 따라온 놈들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해 주고는 지체 없이 집을 나왔다.

목적지는 일전에 아이템 창고로 사용하던 건물.

그곳에 남겨 둔 한세정 몫의 무기들을 재활용하는 쪽으로 계획 중이었다.

조창기의 도끼나 여러 아이템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는 성풍 아파트 단지가 좋기야 더 좋겠지만, 거리가 꽤 멀어 일단은 두어 개라도 사 오고 나서 넘겨준 뒤에 기회를 보기로 가닥을 잡고.

“후, 가자.”

눈을 한 번 껌뻑이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몸을 들이밀었다.

* * *

“우웨에에에에에!!”

‘여기도 있나.’

예상대로.

바깥은 괴물들로 가득했다.

햇살을 받으며 막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놈들은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천지를 떠들썩하게 흔들었다.

그런 탓에 괜한 분쟁을 만들지 않으려 최대한 피해 가고 싶은 나는 번번이 길을 꼬아야 했다.

언뜻언뜻.

나타나 봐야 1등급에 불과하니 차라리 사냥을 하며 직전 주파를 하는 게 시간적으로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괜히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될지 몰랐기에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길을 선회했다.

다만.

기어이 사고는 터졌다.

‘여기서 우측으로 돌면……!’

하필이면.

아이템 임시 창고 건물을 일단의 무리가 점거하고 있었으니까.

“케륵.”

“케르륵.”

‘젠장.’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많고 많은 곳 중에 딱 저길 차지하고 있을 게 뭔지.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오감을 총동원해 숫자부터 살폈다.

‘입구에 다섯, 안쪽에도 예닐곱은 더 있는 듯하고…….’

규모도 적지 않다.

당장 잡히는 것만 해도 열 마리가량. 투르바와 흡사한 개체라면 저 이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대체로 1m 남짓밖에 되지 않은 소형 사이즈라 외형적으로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지구 종말의 원인인 괴물을 고작 외형으로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단지.

다행이라 여기는 이유는 체구가 작으면 그만큼 전투 중에 발생하는 소음도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혈 향도 덜 날 테고.

‘끌어내기…는 시간상 어려울 것 같고, 최단 루트로 뚫어야겠네.’

적당히 파악을 마친 나는 바로 진입할 태세를 갖춰 나갔다.

유인이고 미끼고.

이런저런 전략을 쓸 때가 아니었기에, 마력이 바닥이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해도 돌진을 선택했다.

“후우, 핫!”

타앗!

순간적인 들숨과 동시에 살짝 굽혔던 무릎을 펴며 건물을 향해 직전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쿠웅―

쿵!

땅을 디딜 때마다 쑥쑥 나아가는 육체.

“케륵! 케르르륵!!”

“케르륵!”

채 다섯 걸음을 남겨 둔 시점에서 날 발견한 놈들이 허겁지겁 전투태세를 취했다.

녹색 가죽에 작은 키.

툭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와 인간을 닮은 듯한 체형까지. 미간에 박혀 있는 자그마한 붉은 수정 같은 걸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흔히 말하는 ‘고블린’을 빼닮은 놈들은 보이는 이미지에 걸맞게 한 손에 나무 몽둥이를 쥔 상태였다.

전신에.

“케르르륵!!”

우우우웅―!

화르륵!!

불길과 비슷한 적색의 아지랑이를 두르며.

‘기운이 달라졌다. 버프 계열의 기술인가?’

버프로 추측되는 것에 휘감긴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급격하게 상승한다.

그래 봐야 수치로 표현하자면 10이었던 게 13쯤으로 향상된 정도였기에 위협적인 수준까진―

“…케르륵!!”

“케륵!”

“…더 강해졌다?!”

별거 아니라고 판단을 내리던 찰나.

미리 감지했던 대로 건물 안쪽에 머무르던 놈들이 추가로 튀어나오면서 기운이 또다시 증가했다.

10이었던 게 15로.

‘규모에 따라 증가량이 변하는 건가.’

상당히 귀찮은 기술이구나.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부디 더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손톱을 꺼내고 주먹을 들었다.

“케르르륵!!”

후화하하학!!

차례를 양보하고 싶지 않은지.

바닥을 박차고 훌쩍 도약한 놈 하나가 몽둥이를 휘둘러 온다. 그 끝자락에는 미간에 박혀 있는 것과 똑같은 결정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후.’

훅―

부딪치기 직전에 자세를 살짝 낮춰 횡으로 휘두르던 몽둥이를 가볍게 피한 나는 그대로 주먹을 올려 쳤다.

어퍼컷.

콰직!

“켁―”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붕 떠올랐다가 벽에 처박히는 괴물. 파르르 떨다가 쓰러지는 게 의심할 거 없이 즉사였다.

“케르륵!”

“케륵!”

한 놈이 당하자 미약하게나마 약해진 괴물들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여기저기서 달려든다.

‘옆구리, 오른 다리, 왼쪽 어깨…….’

나는 시각과 청각, 그간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점차 선명해지고 있는 육감을 통해 공격을 하나하나 구분하며 그것에 맞게 대응해 나갔다.

후우욱―

빡!

우선 제일 근접해 왔던 옆구리를 노리는 공세는 왼팔로 막는다. 제법 크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과 달리 대미지는 미약했다.

60을 넘어선 내구 스탯.

겨우 저따위 몽둥이질로 아파할 리가 없었다.

“흡.”

후우욱!

쾅!

반면.

100을 넘은 근력으로 펼치는 주먹질은 마력이 담기지 않았음에도 폭음을 일으키며 놈들의 뼈마디를 부수고 살점을 짓뭉갰다.

창―

서걱!

촤아아악!!

손톱 또한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창칼 저리 가라 하는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손톱이 휘날리면, 몽둥이째로 베여 나가기 일쑤.

온몸이 살상 무기로 변한 나는 십여 마리의 괴물들을 단 3분도 걸리지 않아 분쇄해 버렸다.

“추출.”

[‘추출’ 가능한 대상이 확인되었습니다.]

[대상 : 고블리니스 11개체]

[추출을 시작합니다.]

단숨에 전장을 정리하고서 딱히 이식할 만한 부위가 없어 모조리 추출을 시도하는데 꽤나 재미난 단어가 보였다.

“…고블리니스?”

생긴 것부터가 고블린 판박이더니만, 명칭마저도 끝자락이 조금 늘어났을 뿐 거의 동일할 줄이야.

무척이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문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블린이니 오크니 하는 신화나 전설 속 괴물들이 실제로는 외계에서 온 생명체라는 얘기가 있던데, 그게 정말인가.”

처음 들었을 땐 뜬구름 잡는 헛소리라고 여겼다.

헌데.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맞으나 틀리나 별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펄럭!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 내며 도착한 창고.

노인에게서 받아 온 큼지막한 보자기를 펼쳐 몇 정의 무기를 잘 정리해 감싸 어깨에 짊어지고 나는 잠깐의 휴식도 없이 다시금 불곰파 소유였던 ‘차원 상점’으로 달렸다.

【 기수 사냥 】

끼이이익―

탁!

“오, 왔나! 정말 수고했네. 고생했어.”

“아닙니다.”

다리가 무겁다 못해 굳을 지경에 놓일 무렵 집으로 복귀한 나는 연거푸 수고했다 말하는 노인에게 얼른 포션을 건넸다.

세 병.

“가서 쉬고 있게.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내게서 포션을 받은 노인은 한세정과 조이령에게 한 병씩을 먹이고, 나머지 한 병은 둘의 상처 위에 뿌렸다.

확실히.

포션의 효과는 대단했다.

유신의 능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자잘한 상흔은 금세 아문 데다가 특히 ‘재생 능력’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지라 이후 치료에 있어서도 큰 시너지로 작용할 예정이었다.

“후…….”

털썩―

나는 두 여인의 혈색이 불그스름하게 되돌아오는 걸 지켜보다가 벽에 기대앉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고비는 넘긴 듯하여 안심이 됐다.

앞으로 노인과 아이가 계속해서 봐준다면 두 사람 다 무리 없이 완쾌할 것 같았다.

딱.

쿵―

거기까지 상념을 이어 가던 와중에 느닷없이 세상이 어두워졌다.

초인적인 절제력을 발휘하며 버티고 버텼던 피로가 안도감과 뒤섞여 정신을 잠재우는 중이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맴돌다 떠나간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 여섯 시에서 일곱 시에 머무르던 시곗바늘이 어느덧 오후 열 시를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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