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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53화 (53/232)

53화

카가각―

카각―

일부러 그러는 건지.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발아래로 내려 복도를 긁으며 다가오는 조창기의 전신에서 한세정은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마치.

아윤을 보는 듯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길어야 30초. 짧으면 10여 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도끼에 온몸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공포가 조창기의 등 뒤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꿀꺽―

“…….”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한세정은 입술을 깨물며 두뇌를 회전시켰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니.

사실 방법이란 건 딱히 없었다.

우우우웅―!

‘속박의 저주’라는 게 풀리자마자 공간 이동을 전개하는 것 외에는.

그래서 마력부터 끌어모았고.

‘…9, 10!’

[‘속박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운신이 자유로워집니다.]

속으로 10을 세던 그녀는 자유를 되찾은 찰나.

‘됐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공간을 열었다.

헌데.

[단거리 공간―]

파직!

강렬하게 번쩍여야 할 불빛이 스파크처럼 튀다 만다.

더불어.

공간도 변하지 않았다.

[현재 ‘마력 봉쇄의 장막’이 펼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저항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마력 사용이 제한됩니다.]

“……!!”

“말했을 텐데, 더는 도망 못 간다고.”

이곳은 이미 한번 발이 묶인 시점부터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드디어 잡았네.”

조창기는 눈을 부릅뜬 한세정을 바라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는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만일.

살려서 데려오라던 이덕구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당장 눈앞의 한세정을 갈가리 찢어발겼을 정도로.

무척 아끼던 부하 양건덕의 죽음은 조창기의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스으으윽―

툭―

“묻는 말에 괜히 머리 굴렸다가는 팔이든 다리든 바로 자를 테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조창기는 감정이라도 여지없이 드러내며 차가운 도끼날을 목에 걸치고서 한세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널 포함해서 몇 명이나 있지?”

사각―

주르르륵―

질문과 동시에 살갗을 파고드는 도끼.

속이려 든다면 선언한 대로 어디든 자르고 보겠다는 강압적인 태도에 한세정은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참으며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셋.”

고심 끝에 툭 터놓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조이령 곽재우와 짧게라도 전략 회의를 하면서 혹 붙잡혔을 때를 상정해 여러 가지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

지금은 아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어야 하는 상황이니 이에 맞게 저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한세정은 그 플랜 중 하나를 실행에 옮겼다.

그건.

“여기는, 여기는 셋이야.”

“여기는?”

“얘기하면, 정말로 살려 주는 거지?”

“헛소리 말고 묻는 대답이나 해.”

“…여기는 정말 셋밖에 없어.”

다름 아닌 ‘인원 부풀리기’였다.

불곰파가 병력을 이끌고 내려온 건 고작 한둘을 때려잡기 위함이 아닐 터. 그러니 이를 통해 복수의 대상을 늘리자는 목적이었다.

사냥꾼에게.

사냥감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 회군할 거냐고 자극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대장과 함께 사람들을 데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갔어. 당신들이 쫓아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우린 후방 경계조일 뿐이고. 가서 살펴보면 알 거야.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까.”

너무 티가 나면 안 되니.

살고 싶은 척 가면을 덮어쓰고서 적절히 진실을 섞어 떠들어 대는 거짓말.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남을 속이는 과정에서 들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식은땀이 흘렀을 텐데, 지금은 의외로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어쩌면.

능력이 미천할 때에도 괴물을 향해 제 몸을 미끼로 던지던 대담한 성격이 빛을 발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설령 들통난다 하더라도 저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약간의 확신도 있었다. 교전이 이루어지는 30분 내내 ‘생포’니 ‘포획’이니 떠들어 댔으니까.

“정확한 위치는.”

그러한 생각으로 펼친 작전은 다행히 제대로 먹혀든 듯.

도끼에 주던 힘을 푼 조창기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묻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기세.

역시.

원하는 흐름에 한세정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한곳을 지정했다.

“남가 3동 동사무소, 우선 그쪽이 목표야.”

거짓말을 이어 가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간 황수현과 사람들의 흔적이 발견돼야 하는 상황에 부합하는 경로이면서도 대규모 인원이 머무르기에 충분한 관공서를.

제법 괜찮은 장소를 골랐는지.

완전히 도끼를 치우며 조창기가 명령을 내렸다.

“데려가서 위로 올라간 둘도 끌고 와. 나머지는 준비해, 남가 3동 동사무소로 간다.”

“옛!”

목숨을 건 배팅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 * *

“세, 세정아!”

“……!”

마력 봉쇄는 풀렸으나.

도망치려는 낌새를 보였다가는 생포고 뭐고 단숨에 죽여 버릴 작정으로 목덜미와 옆구리에 창칼을 대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101동에서처럼 기습을 준비하던 조이령과 곽재우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뒤따라 가겠다던 사람이 인질이 돼서 왔으니.

스윽―

스윽―

한세정은 그런 둘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히 두 번.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순순히 투항하라는 제스처 같았지만, 실제로는 붙잡혔을 때 취할 플랜들 중 2번을 실행하고 있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이에.

툭―

툭―

그 의도를 명확히 이해한 조이령과 곽재우가 말없이 무릎을 꿇는다. 포획용으로 가져온 밧줄을 채우는 조직원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이 없는 터라.

“시체는 전부 모아 뒀습니다.”

“불태워.”

“옛!”

“추가 수색 결과,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건덕을 비롯해 사망한 조직원들의 시체를 한자리에 모아 화장시켜 줄 겸 혹시 몰라 한차례 수색을 한 후.

“안내해.”

한세정의 주장을 근거로 성풍 아파트 단지를 떠나 남가 3동 동사무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만.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키에에에엑!!”

“케에엑!”

“좌측! 괴물 발견!”

“숫자는 약 일곱! 교전에 들어갑니다!”

이동하는 동안 꽤나 많은 괴물들의 공격이 일어난 탓이었다.

아무래도.

한번 대규모 인원이 지나간 경로에 또다시 큰 무리가 들어섰다 보니 길 위에 뿌려진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거기에 잦은 전투로 피도 튀고 소음도 퍼지고 있어 정말 지독하게 몰려드는 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더럽게 많이 오네.”

“그러니까. 쓰벌.”

“더 빡치는 건 우린 여기서 이놈들이나 잡고 있어서 근원석 배분을 못 받는단 거야.”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잠깐이나마 한세정들에게서 관심이 멀어졌다.

부대 중심에 가둬 둔 데다가 마력 봉쇄 능력자도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탈출이 불가능한 구조라 되레 덜 집중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하아아아!!”

콰아앙!!

조창기마저도.

그는 양건덕을 잃은 슬픔을 털어 내려 함인지 부하들 대신 직접 나서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툭―

“아앗!”

쿵!

목줄에 메인 짐승처럼 끌려가던 한세정이 넘어진 건 그즈음이었다.

발이 꼬인 듯.

“뭐야, 이건.”

“일어나, 이 X년아!”

휘청거리며 쓰러진 한세정의 모습에 그녀를 담당하던 조직원 두 명이 연달아 밧줄을 잡아당기며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바닥과 부딪쳐 이마가 찢어졌으나 그런 건 안중도 없는 듯 오로지 짜증이 가득했다.

“세정아! 피―”

“넌 입 닥치고 앞만 보면서 걸어.”

“빨리 안 일어나?”

닿지도 않을 팔을 뻗는 조이령의 행동마저 강압적으로 제지하며 닦달하자.

“으으…….”

눈썹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몸을 일으키는 한세정.

그렇게.

다시금 고된 행군을 반복하며 얼마나 더 갔을까.

“형님!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남가 3동 동사무소입니다.”

어느덧 밤도 완전히 가 버리고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 될 무렵 모두의 귓가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 한마디에.

스윽―

조이령과 곽재우가 반사적으로 한세정을 바라봤다.

플랜 2번의 시나리오는 ‘남가 3동 동사무소 도착’을 기점으로 마침표가 찍힌다.

하여.

이 다음엔 무얼 해야 하는지 눈빛으로 무언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랬는데.

“……?”

“……?”

막상 고개를 돌렸던 두 남녀는 곧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시선을 마주한 한세정이.

씨익―

‘미소’ 지었기 때문이었다.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웃음에 조이령과 곽재우는 잘못 보았나 본인들의 눈을 의심했다.

허나.

아니었다.

봄꽃을 닮은 미소가 선명하게 피어난 직후.

퍼억!

촤아아아악!!

급작스럽게 한 남자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졌고.

번쩍!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의 몸이 빛에 휘감겨 외딴곳으로 전이되었으니 말이다.

“…타, 탈출했다!!”

불곰파 조직원들의 고함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 재회 】

“너희는 좌우로 돌아서 조여들어 와라. 저 여자의 말로는 스물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많을 수도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신속하되 은밀히. 가능하면 단 하나도 놓치지 않되, 어쩔 수 없다면 몇 놈쯤은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남가 3동 동사무소 인근.

목적지를 코앞에 둔 조창기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며 상대가 몇이 있든 모조리 잡아 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여차하면 부하들에게 공표한 대로 몇 놈쯤은 본보기로 찢어 죽일 작정이기도 했다.

먼저 떠난 양건덕에게.

충분히 말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해 싸늘한 주검이 된 아끼는 수하에게 바치는 제물의 의미로.

그러면서.

끊임없이 기도했다. 한세정이라는 계집이 죽고 싶지 않다며, 살려 달라며 불었던 정보가 틀리지 않기를.

그럴 확률은 매우 낮을 테지만…….

사람들을 구하고자 대불곰파를 쳤던 영웅적인 면모를 표방하는 집단의 인물이니만큼, 아군을 살리고자 목숨을 버리며 거짓 정보를 토해 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예상이 제발 틀리기를 빌고 빌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거라면.

자신의 꼴이 아주 우스워질 테니까.

‘그러니, 부디 그럴 일이 없길 바란다. 정말 그랬다가는…….’

제아무리 이덕구에게 넘겨야 할 먹잇감이라도 죽여 버리리라.

막.

그런 상념을 떠올리던 찰나였다.

“슬슬 가 보겠습니다.”

“저도.”

“절대 방심하지―”

부대장으로 지목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던 그때.

“…타, 탈출했다!!”

조창기는 괴상한 단어를 듣게 되었다.

탈출?

이 무슨 개 같은 소리인가 싶어 그 근원을 찾았다. 슬그머니 회전하는 시야에 호들갑 떠는 조직원들이 들어온다.

어째서인지 머리가 박살 난 이도.

헌데.

참 이상하게도 딱 하나, 포로들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 밧줄로 묶어 잘 끌어왔는데.

번쩍!

번쩍!

번쩍!

“……?”

어리둥절한 광경에 당황하던 조창기는 멀지 않은 건물 근처에서 익숙한 빛무리가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그곳이었다.

반쯤 무너진 빌딩 앞에 포로들이 서 있었다.

휘이이이이이잉―

펄럭!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긴 장포를 두른 한 남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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