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걸쭉한 살의를 내보이며 몸통을 들이밀었던 곽재우는 충격에 저만치 날아가 옥상 난간에 부딪히는 양건덕을 보며 멈추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스르릉―
‘고유 능력’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의 힘으로 소환한 환두대도를 바짝 세워 시도하는 찌르기.
정교함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공격이었다.
허나.
그래서인지 더더욱 흉흉한 기세로 내지른 칼날이 겨우 목숨 줄을 부여잡고 있던 양건덕의 가슴팍을 힘차게 꿰뚫는다.
콰직!!
“커억!”
섬뜩한 파육음을 따라 터져 나오는 날숨 섞인 비명. 그 초라한 절규에 곽재우의 눈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
“뒈져! 뒈져! 뒈져, 이 개새끼야!!”
퍽!
퍼억!
퍼어억!
찌르고 또 찌르고, 다시 찌르고.
고작 이딴 놈들 때문에 동생을 잃어야 했다는 슬픔이 원망의 불씨가 되어 뼈가 조각나고 살점이 헤집어진 가슴팍을 몇 번이나 갈라놓았다.
한세정의 계획을 따라.
이 차디찬 옥상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고민했었다.
과연.
자신이 불곰파 놈들을 몇이나 죽일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기껏해야 서너 명쯤 죽이면 다행이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그래서.
이미 죽어 나자빠진 양건덕을 향해 더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여기서라도 원한을 풀지 못하면, 영원히 복수를 꿈꾸기만 하다 바스러질 것 같았으니까.
“하아, 하… 후읍, 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사람이었던 것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 곽재우는 다소 격해진 호흡과 감정을 다스리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격렬했던 탓인가.
후욱―
“으음.”
굳건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크게 휘청이는 다리.
“저, 저기…….”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건지 처절한 현장을 지켜보며 창백해진 조이령이 군데군데 묻은 피를 닦으라고 이불을 건넨다.
의외였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이런 광경을 목도한 순간 기절을 하거나 적어도 토악질을 해 대기 바쁠 텐데, 힘들어할지언정 피하지 않다니.
“감사합니다.”
곽재우는 얼른 이불을 받아 들고 대강 혈흔을 지우며 한세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무언의 질문.
“확실하게 닦아 주세요.”
그 의문 어린 눈빛에 한세정은 피가 제대로 닦이지 않은 허벅지 부근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엔 냄새를 잘 맡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간부를 잃었으니 더욱 집요하게 쫓아올 텐데 피하려면 혈 향은 최대한 없애야 해요.”
“아, 예.”
단호한 얘기에 놀란 곽재우는 서둘러 지적당한 부분을 꼼꼼하게 털어 냈다.
그사이.
“이령아, 꽉 잡아.”
“어? 어.”
“소리도 지르면 안 돼.”
한세정은 조이령을 안아 들고서 짧게 주의를 준 후 대뜸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빠르게 내달리다 훌쩍 도약해 난간 위로 올라선다.
그러고는.
꾸우우욱!
“흐읍!”
쿠웅!
무릎을 쭉 굽혔다가 쫙 펴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하늘길을 통해 다른 동으로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공간 이동 능력이 없다면 웬만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도주 방법.
“…읍!!”
이를 증명하듯.
갑작스레 한세정의 품에 안겼던 조이령은 훅 밀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랬다가는 동네방네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아서.
번쩍!
타아앗―
“잘했어. 재우 씨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어어…….”
그런 조이령을 바닥에 내려 준 한세정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의 공간 이동을 더 사용해 곽재우와 함께 돌아온 뒤 곧장 두 사람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길어야 5분.
불곰파 조직원들이 양건덕의 사망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그 전에 다음 포인트로 이동해야 했다.
곽재우는 간부도 하나 죽인 데다가 무엇보다 불곰파 병력을 상대로 어느덧 30분이나 버텼으니 슬슬 최후를 준비하는 듯한 눈치지만, 한세정으로서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일부러.
조이령과 곽재우를 굳이 여기 101동 옥상에 숨겨 둔 것도 그래서였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원활하게 도망치려고.
더군다나.
아윤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꼭 웃으면서 재회하기로. 그러니 살아남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이쪽으로!”
미리 정해 두었던 수신호를 보낸 한세정이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3층의 어느 집으로 들어간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창문에 방충망까지 전부 개방해 둔 도주로 중 한 곳이었다.
소음이 일지 않게끔 커튼을 덮어 두고 밧줄을 걸어 둬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베란다에 다다라 살펴보는 주변.
죄다 한쪽에 몰려 있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반대쪽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나가요!”
꽈아아악―!
안전을 확인한 셋은 한세정을 필두로 튼튼하게 조여진 밧줄을 타고 밖으로 나와 105동으로 달렸다.
짧게라도 휴식을 취하며 소모된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투척용 무기 보급을 위해서였다.
철컥!
“하아, 하…….”
“이령아. 여기.”
“하아아… 고마, 고마워.”
“재우 씨도 여기, 물.”
“감사, 합니다. 후.”
전력으로 질주해 아윤과 2주 가까이 머물렀던 거처에 도착한 한세정은 조이령과 곽재우에게 물을 전달해 주고 바로 화장실 욕조를 찾았다.
온갖 약물로 물든 칼날 수백 개가 놓여 있는 욕조를.
지이익―
“되도록 많이 챙겨 가야 해.”
가방에서 큼지막한 상자를 꺼낸 한세정은 텅 빈 내부에 칼날을 차곡차곡 담았다.
언제 또 들를 수 있을지 모를 이곳.
어쩌면 영영 못 들를 가능성도 있기에 다시는 오지 않을 각오로 보급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세정아, 여기.”
“아, 고마워.”
약간이나마 숨을 돌린 조이령이 뚜껑을 연 물병을 넘겨준다.
그걸 받아 들고 벽에 기대앉아 쉬길 5분여.
“@#*@#*#!!”
“#@*!@#!!”
“……!”
처음 갖는 휴식에 피로가 풀리긴커녕 되레 참고 참았던 졸음이 밀려오던 찰나.
어디선가 시끄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번뜩 정신을 차리며 베란다 쪽으로 가 보니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둠을 뚫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채 10분도 안 됐는데 벌써 발각당한 듯했다.
“…빨리 밖으로!”
이에.
이를 악문 한세정이 내려놓았던 가방을 둘러메며 외치자 조이령과 곽재우도 제각기 자기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106동.
정확하게는 101동과 102동처럼 연결되듯 건축되어 있어 여차하면 공간 이동으로 거리를 벌릴 수 있는 106동의 옥상이었다.
“저기다!”
“빨리 쫓아가!!”
“이번에도 놓치면 우리가 뒈진다!”
“으아아아!”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귓가를 스치는 고함.
슬쩍 뒤를 보자 대략 30m 정도 떨어진 후방에서 수십 명의 불곰파 조직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조금만 늑장 부려도 금방 따라잡힐 듯한 아슬아슬한 간격에 셋은 쉴 틈 없이 106동으로 뛰어야 했다.
다만.
워낙 좁혀진 간극.
“속도 올려!”
“버프! 버프 돌려!!”
“비켜! 내가 잡는다!!”
그런 데다가 악에 받친 이들이 마력을 공격적으로 투자해 이동 속도를 올려 주는 버프나 본인의 속력을 자체적으로 높이는 ‘고유 능력’을 남발하는 탓에 멀어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가까워진다.
결국.
“재우 씨! 소독제!”
“…바로 던지겠습니다!”
“네!”
한세정은 몇 개 없는 대용량 손 소독제와 라이터를 조합해야만 했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껴 보려 노력 중이던 비장의 한 수. 그것들이 심지에 불을 달고 허공을 날았다.
후우우우욱!
퍼억!
화르르르르륵!!
효과는 엄청났다.
따로 연습한 적도 없건만, 기름을 충분히 먹여 둔 심지로부터 전달된 화염이 정확히 땅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 흩뿌려지는 소독제와 뒤엉켜 일대에 거대한 불길을 선사했다.
비록.
2차, 3차 발화제가 없어 금세 꺼져 버릴 불꽃이었으나.
“뭐, 뭐야, 시빨!”
“으아아아아!! 살려, 살려 줘!! 끄아아!!”
도합 여섯 개의 화염병은 운 좋게 한 명을 불사르는 등 추격자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동안 106동에 입성한 세 사람.
“둘이 먼저 올라가요!”
“세, 세정아, 너는?”
“저지하고 갈 테니까 가방은 나 주고 가서 체력 비축해! 특히 15층에서 이불 챙겨 가는 거 잊지 말고.”
“알겠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이령이 좀 부탁할게요.”
한세정은 입구에 자리를 잡으며 조이령과 곽재우를 우선적으로 올려 보냈다.
외친 대로.
천천히 물러나며 몇 명이라도 좋으니 추격대의 선발을 끊어 볼 계획이었다.
“후, 할 수 있다.”
철컥―
긴장이 되는지 콱 조여 오는 목구멍.
억지로 들숨을 삼키며 상자로 운반해 온 칼날을 양손에 쥐었다.
그즈음.
약이 바짝 오른 추격대가 화마를 뚫고 106동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앗!”
한세정은 머리통이 보이자마자 투척을 시도했다.
후우욱!
후욱!
빠르게 손끝을 떠나가는 칼날들.
퍽!
콰직!
“끄아아아악!!”
“아악!”
“씨펄! 또 투척이다!”
“방패 든 새끼들 앞으로 나와!!”
각기 얼굴과 가슴을 내준 두 명이 쓰러졌다.
연달아 열 자루를 더 던진 한세정은 방패인지 그냥 나무판자인지 모를 판때기를 쥔 남자들이 선두로 나올 때까지 팔을 휘젓다가 공간을 열고 후다닥 3층 복도로 위치를 옮겼다.
남을 짓밟는 데 익숙한 불곰파의 성향인지 놈들은 대체로 방어보다 공격 위주의 무장을 취하고 있다.
비율로 따져도 거의 9 대 1.
즉.
암만 방패를 들어도 비는 구간은 매우 많다는 뜻이다.
‘하아!’
딱.
촤좌좌작!!
“크아아악!!”
“머리야! 머리 위!!”
“방패 어딨어!!”
“쓰발, 앞으로 오라며!!”
지금처럼 말이다.
살짝 각도만 틀었을 뿐인데, 다시금 칼날에 맞아 죽어 나가는 대여섯 명의 조직원들.
물론.
하도 숫자가 많은 탓에 순식간에 열 명 가까이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규모는 비슷했다.
게다가.
“뭣들 해! 창기 형님 오고 계신다고!! 여기서 꾸물거리다간 저년이 아니라 창기 형님한테 죽는다! 이 머저리들아!!”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눈앞의 추격대가 아니라 저 멀리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으며 걸어오고 있는 남자였다.
조창기.
양건덕처럼 커다란 도끼를 쥔 그가, 이제껏 뒷짐만 지고 기다리던 그가 여기로 직접 행차하는 중이었다.
한세정은 조창기의 무심한 눈을 쳐다보는 순간 직감한 상태였다.
저 남자는 자신이 뭔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렇기에.
‘이젠 피해야 해.’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린 한세정은 조이령에게서 넘겨받은 세 병의 화염병마저 계단에 던져 버리고는 즉시 칼 상자를 챙겨 옥상으로 몸을 던졌다.
아니.
“흐읍……?!”
우뚝―
그러려고 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복도와 착 달라붙어 버린 다리.
원인은 당연하게도 저쪽에 있었다.
[‘속박의 저주’에 당했습니다. ]
[‘저항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10초간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아!”
고작 10초에 불과했지만, 공간 이동조차 비활성화시키는 저주.
한세정은 반사적으로 위기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불길에 저지당한 조직원을 지나쳐.
“가긴.”
타앗!
“어딜 가.”
쿠웅!
단숨에 10m를 훌쩍 뛰어넘어 바로 앞에 떨어진 남자.
조창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