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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51화 (51/232)

51화

【 마침표를 찍는 순간 】

“누나.”

“응?”

“누나, 고마워.”

“갑자기 뭐가?”

툭 던진 한마디에 배시시 웃는 여인.

그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풋.”

여인은 이런 내가 귀여운지 싱긋 미소를 짓는다.

스윽―

나는 그런 여인에게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 밀었다.

“…어? 이게 뭐야?”

포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투박한 박스를 건네니, 다 마른 옷을 차곡차곡 개던 여인이 꽤나 놀란 표정으로 나와 상자를 번갈아 본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설명을 해 달라 묻는 듯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툭 말을 뱉었다.

“30일이잖아.”

에둘러 얘기한 것이다.

오늘이 ‘4월 30일’, 당신의 생일이라고.

“아! 설마 내 생일 선물이야?!”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여인이 활짝 만개한 꽃처럼 밝게 웃으며 들고 있던 옷감을 내려놓고 상자를 쥐어 열어 본다.

툭―

조심스럽게 열어 본 박스 안에는 은색빛이 감도는 ‘십자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그것을 발견한 여인의 입에서는 순수한 기쁨이 잔뜩 묻어 나왔다.

척 보기에도 그리 비싼 제품은 아니었지만, 꿈에 그리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특히.

‘아서연’이라는 이름에서 따와 중앙에 작게 새겨 놓은 이니셜 《ASY》가 마음에 드는 듯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더니.

와락!

“뭐, 뭐야!”

“진짜 고마워! 윤아!”

느닷없이 몸을 던져 나를 확 끌어안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허둥지둥 팔을 휘저어 보지만, 여인은 더더욱 나를 꽉 붙잡으며 한참을 놔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고마움을 표현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좋기는 했다.

“어때?”

그렇게.

몇 분간을 껴안고 있다 스르륵 물러난 여인은 바로 목걸이를 걸어 보더니 거울에 한번 비춰 보고는 내게 자랑하듯 희고 예쁜 목덜미를 내보인다.

“뭐, 괜찮네. 으흠.”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반응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여인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명품은커녕.

가격을 맞추느라 겨우 최소 금액으로 제작한 목걸이였다.

그걸 알 텐데도 물건의 질보다는 안에 담긴 정성에 감동해 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차량 사고로 오른팔을 잃고서 절망에 파묻혀 있던 내게 매일같이 다가와 다시금 빛을 안겨 준 이에게 고작 이 정도밖에 해 줄 수 없다는 현실이.

“평생, 평생 간직할게!”

“됐어. 적당히 쓰고 버려. 다음에 더 좋은 걸로 해 줄 테니까.”

“진짜? 우와아아아아! 누나 기대한다?”

그래서.

슬쩍 약속해 주었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남들 다 부러워하는 명품으로 목에 걸어 주겠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써.”

“응!”

해맑게 웃는 누나에게 맹세했다.

* * *

화르르륵!

화르륵!

“…….”

불길이 치솟는 제성 초등학교 본관.

시뻘건 화마가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말없이 목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툭―

가볍게 쥐어 보는 목걸이를 통해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그 한기를 느끼다 보니 문득 오래전 과거가 떠올랐다.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날, 이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던 기억이.

나아가.

행복해하는 누나를 보며 다음을 약속하던 장면이.

어째서였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누나…….”

누나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아무래도.

복수라는 절대적인 목표가 사라진 지금, 공허해진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오로지 누나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러한 감정이 조금씩 커지더니.

“…보고 싶네.”

종래에는 누나를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으로 번져 갔다.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누나의 얼굴, 따스한 온기로 가득하던 누나의 손길, 어머니만큼이나 포근하던 누나의 품……. 머릿속에서 ‘누나’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거듭되며 떠나가질 않았다.

분노가 해소된 자리를 대신해서 채운 아픔이 나를 미치도록 괴롭혔다.

“…보러, 가자.”

그래서였을까.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던 나는 불현듯 중얼거렸다.

누나를.

보러 가자고.

어떻게?

방법이야 간단했다.

스릉―

왼손의 손톱.

웬만한 칼날보다도 더욱 예리한 이것을 스스로에게 휘두르기만 하면 됐다. 심장이든 목덜미든, 불곰파 조직원들을 베어 넘길 때처럼 가르고 꿰뚫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

죽으면 될 일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런 내 속마음을 전해 듣는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고 야단을 칠지도 모르겠다.

허나.

“아깝기는.”

난 단언할 수 있었다.

전혀.

찬란한 희망에 이어 짙은 복수심마저 모조리 털어 낸 작금의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 따윈 없다고.

애당초.

누나가 아니었다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죽었을 목숨. 복수에 미쳐 괴물이 되어 버린 시점부터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단지.

스르릉―

탁!

“조금만 있다가 갈게.”

나는 심정 언저리까지 들어 올렸던 손톱을 도로 집어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미련 없이 떠나고 싶었으나, 그 전에 딱 한 가지만큼은 해결해야 했다.

한세정.

날 돕고자 자신의 생명을 건 그녀를 살리고, 동시에 그 주변에 있을 불곰파의 잔당을 지워 버리는 것 하나는.

“금방 끝내고 올게.”

나는 그 마지막 임무를 위해 자살을 뒤로 미뤘다.

* * *

“어디냐!! 이 빌어먹을 년아!!”

멀리서.

아니.

금세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한세정은 침을 꿀꺽 삼키며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그리고 칼을 쥐며 일어서기 무섭게.

콰앙!!

굳게 닫혀 있던 현관이 뜯기다시피 하며 강제로 열리고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냐!! 이 개 같은 년아!!”

한쪽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남자.

커다란 도끼를 단단히 틀어쥔 양건덕이었다. 그는 지독한 살의를 피워 내며 한세정이 숨어 있던 장소에 들이닥쳤다.

추적 과정에서.

방심했다가 한세정의 투척술에 재수 없게 왼쪽 안구가 파열됐기 때문이었다.

각종 포션과 회복 계열 능력자들의 빠른 조치로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탓에 치료가 끝나자마자 얼굴에 흥건히 묻은 피도 닦지 않고 재차 전장에 뛰어든 상태였다.

“벌써 왔네?”

한세정은 그런 양건덕을 보며 얼른 힘든 내색을 감추고 비아냥거렸다.

기세가 꺾이면 안 된다.

아윤이 불곰파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이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괴물이든, 뭘 상대하든 간에 지친 티를 내거나 피로해하면 그 즉시 적의 사기가 올라가고 나의 생존 확률은 낮아지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지 마라.

이 법칙을 지키고자 항시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력은… 이제 5분의 1 정도. 이렇게 되면 앞으로 공간 이동은―’

끊임없이 남은 전력으로 가능하고 불가능한 경우를 계산해 나갔다.

다만.

여건상 형편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백여 명을 훌쩍 넘어가는 불곰파 병력과 대치한 지도 벌써 30분이 넘었기에 마력으로나 체력으로나 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가야겠어.’

그런 탓에 여러 가지 수를 헤아리던 한세정은 잠시 물러나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에 미리 계획해 두었던 전략을 써먹기로 결심했다.

회피도 할 겸.

저 거머리 같은 놈도 죽일 겸.

‘바로 가자!’

타앗!

“와라! 이 X년아!”

결정을 내린 한세정은 곧장 바닥을 박차며 추잡한 욕설을 내뱉는 양건덕에게 달려들었다.

슈화하하학!!

바람을 가르는 도끼와 칼.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려던 일촉즉발의 순간.

번쩍!

한세정의 몸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후우우우욱―

“…이런 젠장할!”

양건덕의 도끼가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공격할 것처럼 쇄도하던 한세정은 어느새 양건덕을 지나 복도를 뛰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씨익―

싱긋 미소를 지으며.

“으아아아아아!!”

콰앙!

그 날렵한 움직임에 또다시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양건덕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벽을 두들긴 도끼를 황급히 회수해 한세정의 뒤를 쫓았다.

“형님!”

“옥상입니다!”

밖으로 나오자 일제히 위를 가리키는 부하들.

눈을 잃은 복수를 할 거니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터라 따라가지는 않고 위치만 알려 주는 이들을 지나쳐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옥상으로 향하는 한세정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딜!”

양건덕은 거침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는 길에 함정이 있든 동료가 있든 개의치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스크래치 난 자존심에 분노로 시야가 매우 좁아져 있었다.

남자란 곧 자존심에 살고 죽는 동물.

금방 생포해 오겠다 호언장담해 놓고 되레 핀치에 몰려 빌빌 기었으니 조창기를 비롯해 위아래로 얼마나 한심하게 볼지, 양건덕은 그 점이 의식되어 다른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린다아아아!!”

화산이 폭발하듯.

분노를 토해 내며 기어코 주위도 살피지 않고 개방된 문을 넘어 옥상에 도착한 양건덕.

쿵―

쿵―

쿵―

먼저 도착해 있던 한세정은 멧돼지인 양 달려오는 양건덕의 돌격에 몇 걸음 물러나며 난간으로 향했다.

흡사.

난간을 넘어 도망칠 것 같은 모양새에 양건덕이 더욱 속력을 높이며 도끼를 휘두른다.

“으아아아!!”

후화하하하하학―!!

우에서 좌로 일직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지르는 궤적을 따라 밀려나는 풍압.

살짝만 닿아도 살점은 물론 뼈까지 단숨에 갈라 버릴 듯한 강렬한 기세가 한세정을 덮치려던 그때.

“이얏!!”

“……!”

좌측 후방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오직 전방의 한세정만을 주시하던 양건덕은 느닷없는 공세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틀며 옆을 쳐다보았다.

살벌한 눈빛으로 주시한 그곳에선 웬 묘령의 여인이 어설픈 동작으로 큼지막한 천 끝단을 쥐고 펼쳐서 던지고 있었다.

‘…이불?’

자세히 보니 꽃무늬 이불이었다.

양건덕의 하나 남은 동공에 의문이 서렸다. 칼이나 창 따위의 무기도 아니고 이불이라니,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그래서 재빨리 전방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간의 경험상.

저게 단순한 시선 끌기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집중력을 분산시킨 후, 도망치던 이가 급작스럽게 뒤돌아서 반격을 날린다.

“흐앗!”

딱 지금처럼.

“이딴 건 내게 안 통한다!!”

순식간에 전후 사정을 파악한 양건덕은 예상대로 후퇴하는 척하다 칼을 뻗어 오는 한세정을 보며 한껏 비웃었다.

이런 얄팍한 수를 써서 고맙다고.

덕분에.

드디어 네년을 붙잡게 되었…….

콰직!

쿠웅!

“……?”

광기에 가까운 살기를 쏟아 내던 양건덕은 순간적으로 옆구리를 파고드는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뭐지?

난데없는 기묘한 감각에 의아해하는 찰나 몸이 붕 뜨는 부유감이 느껴졌다. 바닥에 닿아 있어야 할 다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괴현상에 무심코 돌아보니.

“뒈져, 이 개자식아.”

붉은 대검을 든 거구의 남자가 옆구리에 칼날을 박아 넣으며 그대로 몸통으로 부딪쳐 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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