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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49화 (49/232)

49화

* * *

“이쪽은 저만 믿으세요.”

딸깍―

무전기가 꺼진다.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아윤과 무전을 마친 한세정은 가만히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나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억지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 조이령.

또 하나는.

반대로 두려움이란 일절 느끼지 않는지 되레 분노와 살의로 눈을 빛내고 있는 남자 곽재우였다.

그 두 남녀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령아, 나 안 되겠어.’

‘아……?’

‘가야겠어. 그 사람 지금 혼자서 불곰파를 상대하려 하는 중이야. 아니, 상대하는 중이야. 그러니 도와줘야 할 것 같아.’

‘그… 남자분?’

‘응. 내가 도망쳤을 때에도, 다시 너한테 돌아갔을 때에도, 너와 내가 같이 빠져나오던 때에도 자기 일처럼 힘써 준 사람. 아윤 씨… 그런 사람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나려니까 발이 안 떨어져.’

황수현 일행과 함께 불곰파와의 거리를 벌리던 중, 불현듯 멈춰 서서 조이령에게 심경을 토로했던 회군의 시발점부터.

‘그런 거라면… 나도 갈게.’

‘뭐? 안…….’

‘나도 돕고 싶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가 봐야 짐만 된다는 것도 알지만… 이미 반쯤은 버린 목숨이었어.’

‘이령아…….’

‘세정이 네가 말했잖아. 도움받았으니 도와주고 싶다고. 나도 그래. 뭐라도 하게 해 줘.’

위험한 일이기에 잠시 헤어지려 했던 조이령이 대뜸 자신도 돕겠다며 나서며 했던 말과.

‘저도, 저도 갑니다……!’

‘자네! 자네 정신이 좀 드나?!’

‘후우, 후……. 저도 갑니다. 불곰파, 저도…….’

‘가길 어딜 가나! 자네는 치료와 안정이…….’

‘나도, 나도 가야만 한다고!!’

혼절한 상태로 황수현에게 업혀 가다시피 하던 곽재우가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스스로 일어나 같이 가야만 한다고 울부짖던 광경까지.

하나둘 오버랩되는 기억들을 쭉 지켜본 한세정은 회상의 종점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칫하면 죽을지도 몰라요. 이령이 너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재우 씨도 이제 겨우 능력을 개방했을 뿐이라 전투는커녕 일방적으로 공격받을 거예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돌아가세요.”

병약한 일반인과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능력자의 조합.

돕겠다는 심정이야 정말 고맙지만, 그게 전부인 사람들이기에 그녀로서는 조이령과 곽재우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든 위험하지 않은 곳은 없더라구. 어디는 사람 때문에, 어디는 괴물 때문에……. 그러니 기왕에 위험한 세상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어. 그래서 널 구한 거였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조이령도.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단 1분, 1초라도 좋으니 시간을 끌 겁니다. 그분께서 저 개새끼들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따위 목쯤이야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곽재우도.

이미 죽음을 각오한 채로 권유를 거부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들 하던가. 현재 두 사람이 내보이는 의지는 딱 그와 같았다.

“…….”

결국.

한세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기한 것이다.

“좋아요. 둘 다, 무슨 마음인지 알겠으니 앞으로 돌아가라고는 하진 않을게요.”

목숨을 걸었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하지만, 이것만큼은 내 말을 따라 줬으면 해요. 그래야 재우 씨 말대로 1분이든 1초든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까.”

한 가지는 확실히 했다.

곽재우가 군대를 다녀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의 투쟁은 이쪽이 한 수 위였다.

그런 만큼.

작전을 짜고 실행하는 모든 과정에 불복하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따라와 주기를 명확하게 선언했다.

“나는 당연히 네 의견을 따를 거야.”

“저 역시 상관없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특히 곽재우는 아무런 반대 의견 없이 한세정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고개를 끄덕인 한세정은 힐끔 옥상 난간 너머로 아파트 단지에 다다른 불곰파를 살펴본 후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아윤의 복수가 이뤄지길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우리들의 전쟁을 개시했다.

* * *

“…….”

나는 부디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잠잠해진 무전기를 한참 동안 응시하며 고민했다.

이대로.

저 불곰파를 공격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위험해질 게 뻔한 한세정에게로 가서 그녀를 돕는 게 맞을지.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당장에라도 제성초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최대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조창기를 포함한 간부진과 조직원 대다수가 빠진 이때보다 이덕구를 공격하기 좋은 시점은 없을 테니까.

단지.

이런 식으로 남의 희생을 발판 삼아 복수를 이루고 나면 과연 떳떳할지가 걸렸다.

노예로 잡혀 있던 이들을 미끼로 쓰려던 계획이야, 나 또한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이후의 일은 어찌 되든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으나 한세정은 달랐다.

사지라는 걸 뻔히 알면서 전장에 합류한 그녀를 희생시킨다는 게 도무지 내키질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가자.”

답은 ‘진격’이었다.

이게 정답일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한세정의 결정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쏘지 않았다면 모르되, 손에서 놓아 버렸다면 되돌리기에는 늦다.

그러니.

본인은 물론 나도 인정하는 도망의 귀재인 그녀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 믿고 나아간다.

으적―

으적―

꿀꺽!

[「인간의 심장」을 섭취했습니다.]

[상처 회복 및 재생 능력이 200% 향상됩니다.]

[「괴물의 심장」을 섭취했습니다.]

[마력 순환 속도 및 기술 위력이 150% 향상됩니다.]

분명하게 방향을 정한 나는 그 직후부터 온전히 불곰파에만 집중하며 장포에 묶어 두었던 것들을 꺼내 씹어 넘겼다.

‘인간의 심장’과 ‘괴물의 심장’을 비롯해.

콰직―

[‘아브도의 정수’를 복용합니다.]

[지금부터 3분간 「은신」 상태에 돌입합니다.]

[‘라테스코의 침묵’을 복용합니다.]

[지금부터 5분간 「인기척」이 감춰집니다.]

[‘하급 각성 물약’을 복용합니다.]

[지금부터 3분간 모든 신체 능력이 10% 상승합니다.]

단 한 번.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세 개의 아이템도 모조리.

스스스슷―

아이템 효과가 한바탕 휘몰아치며 점점 반투명해지는 육체.

좌우로 움직여 보며 출력된 설명대로 실제 소리나 흔적이 생기지 않음을 확인한 나는 지체하지 않고 제성 초등학교로 발을 뻗었다.

이제.

결전의 순간이었다.

* * *

“그러니까 말이야. 이러다…….”

“진짜 어떤 새끼들이지? 확 그냥…….”

후욱―

훅―

당당히 지나가는 정문.

다섯 명의 경계병들은 내가 제 옆을 지나가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

그 뒤로도 몇 명.

도합 스무 명쯤 되는 이들을 순식간에 돌파하며 빠른 걸음으로 본관 건물에 입성한 나는 곧장 계단을 올라 교장실을 찾았다.

오로지 이덕구만이 사용 가능하며, 그가 허락한 이 외에는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는 악마 왕의 침소를.

쿵―

쿵―

쿵―

그 심처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고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호흡도 가빠졌다.

이덕구와의 간극이 줄어드는 것과 비례해 감정이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인간성’이 단 1%만 소실되었더라도 단숨에 괴물이 되었을 정도로 격하게.

‘참아야, 한다……!’

꽈아아아아악―!

나는 금방이라도 폭주할 듯한 이성을 최선을 다해 가라앉혔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갑게.

가장 완벽한 복수를 성사시키려거든 가장 냉정해야 했기에 이 악물고 멘탈을 다스리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장실]

위압감을 조성하려 함인가.

삐딱하게 걸쳐진 팻말을 타고 흐르다 못해 굳어 버린 핏물이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물론.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내 뇌리에 새겨진 ‘이덕구’라는 인물은 추잡하고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개새끼일 뿐이었다.

그런 놈이 제집에 해 놓은 치장 따위.

고작해야 추락한 이미지를 세탁하고 싶어 하는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탁―

철컥!

무척이나 담담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스르륵―

기름칠이 잘돼 있는지 부드럽게 열리는 문.

서서히 벌어지는 틈으로 교장실 끝자락에 설치된 커다란 침대 중앙에 앳된 여인을 깔아뭉개고 막 상의를 벗어젖히던 이덕구가 보였다.

대단한 일이었다.

부하들이 죽어 나가고, 심지어 제 혈육도 목숨을 잃은 상황인데 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니.

그래서였을까.

한순간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고작 저런 짐승만도 못한 개자식 때문에 누나가 자살을 했다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죽여, 버린다……!’

빠득―

이가 갈린다.

어금니가 부서져라 꽉 깨문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문을 찢어 버릴 듯 잡아당기며 거기서 나오는 반발력을 발판 삼아 날아올랐다.

쿠웅!

* * *

“창기 형님! 이쪽입니다! 여기서 한 번 멈췄습니다!”

성풍 아파트 단지 입구.

최태용의 외침에 조창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설마.

대불곰파를 습격한 간 큰 놈들이 이렇게나 근접한 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창기 형님, 그런데 여기 성태 형님이 가신다던 거기 아닙니까?”

“성태?”

“예.”

약간은 허탈한 기분으로 진입하라 지시를 내리려던 찰나 옆을 지키던 양건덕이 의아한 눈초리로 묻는다.

“어쩐지 명칭이 익숙해서 그냥 알고 있던 곳이라 그런가 긴가민가했는데, 아닙니다. 요 며칠 전에 성태 형님이 갑자기 출장 나갔다가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러다 갑자기 소식이 끊겨서 어디 괴물 놈들한테 당한 건가 싶었습니다만,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성태 형님께서 분명 ‘성풍 아파트 단지’로 출장 나간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흐음.”

조창기는 양건덕의 얘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이야기대로라면 이번 전쟁이 꽤나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소리인데, 그럼에도 인지는커녕 간부가 피습당하는 사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생포해야 할 이유가 늘었군.”

조창기는 자신의 실책을 통감하며 높게 들어 올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당장 진입하라는 제스처.

가서.

살아 있는 건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죄다 끌고 오라는 지시였다.

이에 따라오던 조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무언의 대답을 남기고는 각자의 부대로 갈라져 아파트 단지 내로 뛰어 들어간다.

허나.

채 10여 미터를 달려가기도 전에 제동이 걸렸다.

후우우우욱!

콰직!

콰드득―

느닷없이 어둠을 뚫고 이빨을 드러낸 칼날이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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