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홀로 맞이하는 밤공기.
신기하게도 어느 날보다 매섭고 차갑게 나를 스쳐 지나간다. 그제야 혼자됐음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
딱 그 말대로였다.
“…쯧.”
왠지 자꾸만 허해지는 기분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 보냈다.
지금은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불곰파의 멸망을 빚어낼 시나리오는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후우, 빨리 가자.”
나는 짤막한 기합을 추진력 삼아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전투에서 구출까지.
단시간 내에 워낙 많은 일을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피로가 몰려왔지만, ‘인간의 심장’ 효과로 어떻게든 이겨 내며 부리나케 움직여 도착한 곳은 일전에 한세정과 함께 들렀던 임시 아이템 창고였다.
불곰파 놈들에게서 수거해 온 수십 정의 무기들을 숨겨 놓은 건물.
“세정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시죠.”
그곳에서 나는 그득하게 쌓인 아이템의 8할가량을 꺼냈다.
근원석과 달리 사전에 분배 비율을 정해 두지 않아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솔직히.
필요하다면 더 가져갈 생각도 있었다. 언제 어떻게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매우 위급한 전시였으니까.
그런 고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몸에 두르고 있던 장포를 벗어 보따리 식으로 펼쳐 아이템을 깔끔하게 챙긴 나는 남은 것들을 잘 은닉해 두고 다시금 성풍 아파트 방향으로 이동했다.
왔던 길을 벌써 두 번째나 돌아가는 행군이라니.
상당히 비효율적인 경로 같지만, 이거야말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봇짐처럼 등에 진 아이템들을 처분하기 위해 당장 입장 가능한 ‘차원 상점’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설마, 벌써 입장 인원 초과로 사라지진 않았겠지.’
아마.
그렇진 않을 거다.
나와 한세정이 들어갔다 나왔음에도 여전히 ‘5/15’로 열 명이나 더 입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퇴장 이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틀면… 있다!’
다행히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혹시나.
우리보다 먼저 발견했던 이들이 ‘차원 상점’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해 그새 들락날락거려서 아예 없애 버린 건 아닐지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다.
확률 자체는 있다고 여겼지만.
《차원 상점 LV. 1》
[입장 가능 인원 : 5/15]
‘완전히 그대로네.’
운이 따라 주었는지 달라진 건 없었다.
폐점 시간도 한결같이 넉넉했고.
해서 바로 입장한 나는 보따리에 넣어 왔던 아이템들을 지체 없이 전부 판매대에 올려 모조리 처분해 버렸다.
대부분이 ‘괴물 사냥용 철검’ 혹은 ‘괴물 사냥용 장창’에 불과했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애당초 김성태의 창 ‘잘 제련된 괴물 사냥용 장창’도 팔아 치웠던 바. 저런 무기들을 두고 아까워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이석열의 단창.
무려 불곰파의 이인자가 쓰던 무기이니만큼 성능이야 보장된 아이템을, 구매가의 반값으로 쳐 주는 상점에 던지기가 아쉬웠다.
전 주인의 정체가 어떠했든.
한세정이나 다른 누군가가 가져가서 썼다면 충분히 빛을 보았을 테니까.
“…음?”
하여 팔기 전에 정보나 확인할 겸 아이템 설명 창을 띄우던 나는 주르륵 출력된 홀로 그램 화면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내용 끝자락에 적혀 있는 문자 때문이었다.
《레켑투스의 단창》
- 행성 ‘렐래고(Relego)’의 지배종 「레켈투스」의 골각(骨角)에 특수한 처리를 더해 제작한 단창이다. 뼈라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단단하며 날카롭다.
또한 「레켈투스」의 능력이 그대로 담겨 있어 피를 묻혀 〈주인 각인〉을 진행한 이후에는 최대 100m 내에 존재할 시 언제든 주문 ‘리턴’으로 회수 가능하다.
‘리…턴?’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다. 거듭 몇 번을 읽어 봐도 ‘언제든 주문 ‘리턴’으로 회수 가능하다.’라고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꽤나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내가 알기로.
‘리턴’은 분명… 이석열의 ‘고유 능력’이었으니까.
즉.
“정보가, 잘못됐다.”
고문을 견디며 꾸역꾸역 각인해 두었던 불곰파에 대한 자료의 신뢰성이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여태껏 짜 놓았던 계획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근간이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어디서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고, 또 어디서 어디까지를 걸러야 하는지 그 선이 모호해진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허나.
곰곰이 따져 보면 이석열과 같은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을 듯했다.
불곰파 놈들이 뭐가 무섭다고 고문당하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비능력자인 데다가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에게 일부러 거짓된 정보를 넘기겠는가.
그러니 위와 같은 일은 이석열의 독단적인 능력 숨기기 과정에서 일어난 우연일 터.
“일단 주의는 해 두자. 윗물이 썩었는데 아랫물이 맑을 리는 없을 테니까.”
으음.
나는 왠지 두통이 이는 듯한 착각에 인상을 찡그리며 이석열의 단창을 판매대에 내던졌다.
[모든 물품이 판매되었습니다.]
[전체 판매가 : 1등급 근원석 317개(화폐 전용)]
그 ‘레켑투스의 단창’을 끝으로 판매가 종료되고 나타난 거대한 근원석 주머니. 집어 드니 묵직함이 손을 타고 전달된다.
다만.
썩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3백 개 초반……. 그리 많지는 않네.”
예측대로 중고품이라 제값을 받지 못했거니와.
《1등급 근원석 : 화폐 전용》
- ‘차원 상점’에서 물건을 판매하고 나면 수령할 수 있는 「화폐용 근원석」이다. 일반적인 근원석과 달리 복용해도 아무런 상승 효과가 없다.
차라리 복용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불가능한 탓이었다.
만일.
능력치 상승에 활용할 수 있었다면 죄다 먹어 치워 무지막지한 성장을 거뒀을 텐데. 그래서인지 마치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였다.
쯧.
“…빨리 사서 나가자.”
결국 혀를 찬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내 손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큼지막한 서류는 다름 아닌 ‘차원 상점’ 내 아이템 리스트였다.
한세정이 손수 만들어 준 작품.
나는 그 안에서 이 순간을 위하여 미리 별표로 표시해 두었던 물품들을 찾아다녔다. 300여 개의 근원석을 거의 다 소진할 때까지.
향후 시나리오 진행에 있어 중요도와 가치에 따라 별 개수를 나눠 두었기에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게 잡아도 대략 5분.
“됐어, 이만하면.”
저번과 다르게 매우 빠른 속도로 상점에서의 일을 마친 나는 새로 장만한 아이템들을 장포와 연결해 안쪽에 걸어 두고서 도심으로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정 씨, 거기가 저쪽… 아.”
방향을 정하다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공간, 찬바람만이 스쳐 지나가는 허공에 대고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보는 이 하나 없건만.
괜히 스스로 민망해져 눈가에 씁쓸함이 걸렸다.
그래.
씁쓸함, 더 정확하게는 외로움이었다.
“…….”
* * *
“…….”
같은 시각.
제성 초등학교 4층 복도, 아니, 그 이전에 위치한 중앙 계단에 선 이석구는 말없이 정면을 바라봤다.
도저히.
무어라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시꺼먼 재로 뒤덮여 밤의 어둠보다도 더욱 짙은 흑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
“석열이가, 저기 있다고?”
동생 이석열과 함께.
“야.”
“…….”
“이 씨X 새끼야. 말해 봐. 석열이가, 저기 있다고?”
“그렇, 습니…….”
후우우우욱―
콰직!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질문에 대답하던 누군가의 머리가 박살 난다.
가득 쌓인 잿더미 위로 흩뿌려지는 붉은 피.
“원인은.”
이덕구는 서서히 쓰러지는 시체를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정면을 응시하며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마땅히 지정한 대상이 없는 물음.
그 한마디에 모여 있던 모두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서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정말 대답을 하자니 앞서 죽는 자와 같은 꼴이 될 게 확실했기에 굳게 닫힌 입술이 벌어지질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이 먼저 나서 주기만을 기도할 따름.
“아, 아직 원인을 파악…….”
콰직!
“불길은…….”
푸화하학!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콰앙!
그렇게.
연달아 세 명이 더 죽어 나가고 나서야 이덕구의 살행이 멈춰졌다. 이 자리에 모인 조직원 전원이 바란 대로 살생을 통해 짙게 내재하여 있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형님. 우선 들어가서 쉬고 계시죠. 이쪽은 제가 정리해서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때.
습관인 듯 검지로 반대편 손등을 탁탁 두드리고 있던 한 남자가 적막을 깨고 나왔다.
방금까지 치른 전투의 여파를 미처 닦아 내지 못해 각종 피와 살점 찌꺼기로 도배되어 있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사내. 이덕구가 제일 신뢰하는 부하이자 불곰파 내에서도 무력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조창기였다.
그는.
진득한 살기가 감도는 이덕구의 시선에도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후, 그래, 창기야. 맡기고 갈 테니까 하나만 약속해라.”
“예. 반드시 살려서 데려가겠습니다.”
“기다리마.”
“예.”
그 변함없는 표정에 이덕구도 이번만큼은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제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은 것이다.
조창기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비록 배신할 궁리만 하던 녀석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눈앞에 대령하리란 걸.
살점을 하나하나 바르고 뼈를 뽑아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수 있게끔.
“들어가십쇼.”
그러한 신뢰를 전달받은 조창기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억누르며 떠나가는 이덕구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백여 마리의 괴물들을 처리했을 당시보다 더욱 안도하는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곧장 지시를 내렸다.
어느 정도 계획한 바가 있었는지 그의 지시는 굉장히 신속했다.
“우선 추출부터 시작한다. 난전 중이라 누가 무엇을 죽였는지 알 수 없으니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은 전원 나를 따라 공터를 돈다.”
“옛!”
“추출 작업이 끝나면 무리는 세 부대로 나눈다. 하나는 박대길, 네가 맡아서 습득한 근원석과 기존의 재고를 챙겨 상점으로 가라. 일의 스케일로 보아 적도 다수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가서 포션들을 사 와.”
“알겠습니다! 형님!”
“황충안. 넌 내부를 정리하고 피해 현황을 정리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살펴라.”
“바로 실시하겠습니다!”
“마지막, 건덕이는 완전 무장 상태로 나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대규모 인원이 움직였다면 우리 같은 프로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잘 지워도 흔적이 남았을 거다.”
“저만 믿으십쇼!”
“좋아. 움직여.”
“옛!”
“혹여라도 부딪치는 상황이 생긴다면 부대장의 판단에 따르되, 가능한 생포해라. 처분은 형님의 몫이다.”
“옛!”
한 번의 막힘없이 줄줄이 흘러나오는 명령, 그에 맞춰 조직 전체가 대대적으로 들썩였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주히 뛰어다니는 조직원들을 보며 조창기는 사흘을 다짐했다.
최대 72시간.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목을 내놓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물론.
“…창, 창기 형님!!”
“대길이 형님께서, 대길이 형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본디 세상일이란 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