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곽재우는 멍하니 자신의 우측에 놓인 괴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게 뭘까.
느닷없이 괴물을 죽이라니.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던 격렬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식어 버렸다.
아마도.
그 누구든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딱.
“복수하고 싶다면, 저 개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찢어 죽이고 싶다면… 괴물을 죽여 능력을 갖추는 게 먼저다.”
이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벌떡―
곽재우는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남자의 말에 몸을 확 일으켰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치듯.
남자의 한마디로 그동안 알음알음 전해 들었던 정보 중 일부가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니까! 괴물을 죽이면 ‘고유 능력’이 생긴다고 했어. 어렸을 때 자주 접했던 게임처럼.’
‘탈출도 탈출이지만, 나중에 복수하려면 어떻게든 괴물을 죽여야 해.’
‘설령 몇 명이 희생하더라도 그게 먼저야. 특히 재우 너는 반드시 얻어야 해.’
‘우리 중에 그나마 제일 강한 게 너니까.’
“아아…….”
한번 기억해 내자 봇물이 터지듯 마구 떠오르는 정보들.
척!
그것으로 명확하게 남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곽재우는 칼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집어넣으며 재빨리 괴물에게 다가갔다.
“키에에엑! 키엑!”
급격하게 솟구쳐 오르는 살의가 느껴졌을까.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일지라도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 아등바등하는 괴물.
“흐으으읍!!”
곽재우는 그 발악의 틈바구니를 찾아 칼날을 찔러 넣었다.
푸우욱!!
“크에에에에에엑!!”
‘…읍!’
두 손으로 꽉 쥔 칼날을 통해 살점이 갈리고 핏줄이 짓이겨지는 생생하고도 아찔한 살생의 감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 촉감에 집중하길 잠시.
이내 눈앞이 어지러워진다 싶은 직후.
[축하합니다!]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하셨습니다.]
[생(生)과 사(死)가 결정되는 투쟁의 현장에서 달성한 지고한 업적에 경의를 표하며 당신에게 걸맞은 보상을 지급합니다.]
[지금껏 당신이 살아온 ‘인생의 흐름’ 혹은 ‘현재 상황’ 등을 고려해 「고유 능력」을 결정합니다.]
[…완료!]
[‘고유 능력 :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습득했습니다.]
[〈개인정보〉 기능이 개방됩니다.]
[‘특이 사항’란에 「생명력」 항목이 추가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당신의 ‘정보’가 기록되는 중입니다.]
시야 한쪽으로 온갖 문장들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가히 환상과도 같은 광경.
그 신묘한 현상의 중심에서.
‘고유 능력, 천강홍의장군. 그리고…….’
곽재우는 처음 경험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대해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더 정확하게는.
단순히 ‘받아들인다’라는 수준을 넘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파도에서 단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진정한 의미의 ‘칼’을 당장 휘두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고유 능력 :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오랜 과거의 역사는 세월을 돌아 작금에 이르렀으니, 새로이 발하는 역사에 다시금 ‘피에 물든 홍의(紅衣)’가 있으랴. 주변의 ‘혈액’을 활용해 특수한 무장(武裝)을 소환한다.
만일 충분한 양의 ‘혈액’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본인의 「생명력」 10%로 대체하며 기본 지속 시간은 30분이나 추가 「생명력」 혹은 ‘혈액’을 통해 지속 시간을 추가할 수 있다. 또한, 흡수되는 ‘혈액’의 양과 질에 따라 무장(武裝)의 부가 효과가 개방됩니다.
그 공부가 충분한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무렵.
“…감사합니다.”
곽재우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으로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천강홍의장군]
촤르르르르르르륵!!
발목을 흠뻑 적실 정도로 넘쳐 흐르던 전장의 핏물을 죄다 끌어당기며 어디론가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보폭을 내디딜 때마다 하나둘 채워지는 붉은 갑주.
투구부터 신발까지.
온통 적색으로 물든 그가 마침내 한 자루의 붉은 환두대도를 뽑아 들었을 때.
“…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
목숨을 내던진 장수가 전장에 도래했다.
* * *
“…….”
나는.
‘고유 능력’을 개방하자마자 지체 없이 불곰파 조직원들을 향해 나아가는 거구의 남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저 꼴을 보기 위해 계획을 틀었던 선택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아무리 고심해 봐도 이 즉흥적인 행동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하나 분명한 건.
그로 인해 적잖은 시간을 소모했음에도 어째서인지 결코 후회되진 않는단 점이었다.
나와 닮은 사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
따로 묻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본 ‘동류’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됐다면 그걸로 됐다.
삑!
[‘반대편 신호기’에서 신호가 전달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의 위치가 「미니 맵」에 표시됩니다.]
[「미니 맵」은 10분 후 자동 삭제됩니다.]
상념을 정리하는 사이 주머니에서 신호기가 울렸다.
횟수는 한 번.
조이령의 유무에 따라 발견 시 1회, 미발견 시 2회에 걸쳐 신호를 보내도록 정해 두었던 바.
‘…다시 집중한다.’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에 홀로 주억거린 나는 주먹을 콱 틀어쥐며 서둘러 강당에 이은 두 번째 목표 지점으로 이동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은밀히 기동해 당도한 그곳은 제성 초등학교의 중심.
[환영합니다!]
[장차 가장 큰 별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응원을!]
괴물들의 공습과 노예들의 탈출 여파로 죄다 빠져나온 탓에 텅 비어 버린 본관 건물이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선 뒤 계단을 찾아 위로 올라갔다.
어딜 가나 지옥인 이 영역 내에서도 특히 심연에 가까운 곳.
[4―1]
[4―2]
[4―3]
다름 아닌 ‘4층’이었다.
많고 많은 장소 중에 구태여 여길 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우리도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나가긴 뭘 나가. 우리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다고.”
“하긴. 고유 능력이라고 해 봐야 ‘통각 증폭’ 따위나 걸리는 머저리들이 가긴 어딜 가냐. 푸흐흐흐흐.”
“좋냐? 좋아?”
“좋지. 그럼 싫냐? 쓰X, 괜히 딴 거 걸렸어 봐라. 나가서 뺑이 치다 뒈지기나 하지. 차라리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콰앙!
후두둑―
“오랜만이야.”
흔들어 놓는 김에 이덕구의 가장 큰 기쁨이자 쾌락을 빼앗아 갈 작정이었으니까.
그 목적을 위해.
“누, 누구…….”
“괴물.”
콰직!
4층에 오르자마자 마주친, 여전히 백색으로 뒤덮인 두 명의 고문관들을 단숨에 짓이겼다.
남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던 이들.
저 개자식들에게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간단한 형벌인 탓에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했으나, 일의 경중을 따져 이번만큼은 죽음 자체로 만족하고 곧장 4학년 1반 교실 문고리를 감고 있던 쇠사슬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흐읍!’
촤르르륵―
파앙!
거센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철쇄.
바닥에 흩뿌려지는 잔재를 시체와 함께 치우며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컴컴한 실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헌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없다.’
잠겨 있던 것치고 1반 내부는 휑했다.
이는.
촤르르륵―
파앙!
‘여기…도 없어.’
2반도 마찬가지.
그새 이덕구의 성적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듯. 내가 갇혀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곳곳에서 남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는데, 반면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촤르르륵―
파앙!
무의식적으로 세 번째 쇠사슬을 붙잡으며 그런 바람을 가졌다.
이덕구에게 정신적으로 타격을 주지 못해도 좋으니, 성격이 바뀌어 더 이상 우리처럼 괴로워하는 이가 나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물론,
내 소망은 부질없었다.
드르르륵―
쿵!
“상민 씨… 상민 씨, 대답 좀 해 봐……. 흐윽, 상민 씨……!”
그 개자식의 변태성은 여전했으니까.
“…젠장.”
타앗!
나는 문을 열자마자 드러난 광경에 짙은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교실 중앙으로 달려갔다.
저 자리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1분 1초라도 빨리 풀어 주고 싶었다.
“흐윽, 제발… 제발 상민 씨를…….”
황급히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온몸을 바동거리며 십자가에 박혀 있는 남자를 살려 달라 부르짖는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오직.
제 연인을 구하는 데에 간절할 뿐.
그런 탓에,
텁―
“쉿.”
나는 아예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할 것을 권고했다.
시끄러워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지금부터 여길 빠져나갈 겁니다. 남자분도 바로 구해드릴 테니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해 주시길 바랍니다.”
“……!”
끄덕―
끄덕―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여성은 금세 머리를 아래위로 격하게 움직였다. 연인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듯.
이에.
“풀어드리겠습니다.”
스으윽―
툭!
툭!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판단한 나는 왼손 검지의 손톱을 꺼내 밧줄을 잘랐다.
그러자.
체력적으로 결코 온전치 않을 텐데도 얼른 남자에게 달려가는 여성.
“으, 으으…….”
약속한 바가 있어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야윈 연인의 얼굴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겹쳐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해서.
딱히 보기 좋은 장면도 아닌 데다가 늑장 부릴 여유도 없었기에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꽉 달라붙은 여성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러고는.
“남자분도 풀어드릴 테니 옆으로…….”
십자가에 결박된 남자의 양팔과 다리의 밧줄을 끊어 내고자 팔을 뻗던 찰나.
피잉!
찌릿―
“……!”
후방에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마력 덩어리가 포함된 강렬한 살기가 감지됐다.
뭘까.
의문을 해결하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회전해 손톱을 전부 뽑아낸 왼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욱―
카앙!
대각선으로 내리그은 참격과 부딪치고서 묵직한 충격파를 일으키며 바닥에 떨어지는 무언가.
탕―
타당―
탕―
데구루루―
요란한 소음을 발생시키며 벽에 다다라 멈춰 선 그것의 정체는.
‘단…창?’
흔히 재블린(Javelin)이라 부르는, 던지기 좋게 제작된 대략 1m 길이의 ‘투척용 단창’이었다.
그걸 파악한 순간.
나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 불곰파와 단창, 이 두 가지가 결합한다면 무엇이 완성되는지를 매우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무기가 여기 나타났다는 건.
“허, 시X. 노예들이 괜히 날뛰는 게 아닐 것 같아서 와 봤더니만, 진짜 여기도 있었네.”
죄악의 근원이자 악마들의 왕 이덕구와 피를 나눈 혈육, 제 형을 닮아 인육 먹기를 즐기는 더러운 취향을 지닌 또 하나의 악마.
종말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던 인육 성애자 ‘이석열’이 행차했다는 증거라는 걸.
그 깨달음과 동시에.
“…이석여어어어어어어얼!!”
콰아앙!!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