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 *
삑!
[‘반대편 신호기’에서 신호가 전달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의 위치가 「미니 맵」에 표시됩니다.]
[「미니 맵」은 10분 후 자동 삭제됩니다.]
‘…왔다!’
제성 초등학교 서쪽 방벽에서 대략 100m 정도 떨어진 은신처.
정문에 설치되어 있던 비상종을 울리고 자리를 벗어나 적당한 곳에 숨어 있던 한세정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신호기에서 ‘두 번째’ 신호가 울리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이령아……!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조이령을 구할 시간이었다.
“후우, 가자!”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때가 도래하자 한세정은 지체 없이 강한 기합을 내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에 가까운 돌격에 급격하게 줄어드는 간격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제성 초등학교 서쪽 방벽.
그 위로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둘만 남기고 집합해!”
“무기 될 만한 건 뭐든 챙겨!”
간간이 울려 퍼지는 고함을 듣자 하니 아마도 정문을 통해 들이닥친 괴물들과 아윤의 활약 때문에 경계 인원까지 차출해 가려는 것 같았다.
타 넘기에는 상당히 좋은 타이밍.
[단거리 공간 이동]
우우웅―
번쩍!
하여 칼자루를 움켜쥔 한세정은 거침없이 방벽 위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탁!
“뭐, 뭐야!”
“…여자?”
갑작스런 난입으로 당황해하는 사람 중 이마에 ‘火’ 자가 각인된 두 남자를 찾아 매섭게 칼을 휘둘렀다.
후우우욱―
서걱!
“아, 아아… 아아아악!!”
먼저 빼내는 각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첫 번째 목표로 삼은 남자의 가슴을 가른 뒤.
촤아아아아악!!
‘…다음!’
“커헉!”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걸 확인하는 동시에 재차 공간을 도약해 다음 목표의 후방에서 튀어나와 큼지막한 등판에 칼날을 박아 넣는다.
[단거리 공간 이동]
번쩍!
콰직!
“아, 아아…….”
본디.
칼로 사람의 뼈를 부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간 맹렬하게 성장해 왔던 한세정은 잡아 뽑는 것까지 간단히 끝내고서.
퍼억―
쿵!
앞으로 쓰러지던 남자의 몸을 발로 밀어 차 방벽 바깥으로 떨어뜨리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더 처리해야 할 조직원이 있나 살피기 위해.
‘…없나?’
허나 이곳에 배정된 인원은 둘밖에 없었는지, 더 이상의 ‘火’ 자가 발견되진 않았다.
이에.
칼날을 털어 핏물을 제거한 한세정은 넋이 나간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히익!”
“사, 살려…….”
고작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귀신을 본 듯 기겁해 뒷걸음질 치는 이들.
어떤 이는 혹여 똑같이 살해당할까 두려워 그새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댄다.
당연히 해할 생각은 없는 터라.
아니.
“다들, 어서 도망치세요!”
애당초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기에, 한세정은 딱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방벽 안쪽으로 뛰어내려 다시금 발을 굴렀다.
‘두 번째 신호가 가면 그때부터가 가장 중요합니다. 놈들이라면 아무리 괴물들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오래 지나지 않아 회복할 겁니다.’
‘그러니 길어야 10분.’
‘정말 늦더라도 15분 이내에 조이령 씨와 다른 이들을 구출해 빠져나간다는 생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아윤은 몇 번이고 당부했다.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단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말라고. 한세정은 그 의견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흐으으읍!!’
그렇게.
순식간에 제성 초등학교 내부로 진입해 이어 달리길 약 3분여.
‘……!’
저 멀리.
어둠을 뚫고 슬그머니 익숙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오게 하는 최악의 감옥. 수많은 여성이 감금되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식당’이었다.
그 빌어먹을 장소에 다다르자.
꽈아아아아악―!!
‘개자식들……!’
자연스레 떠오르는 악몽과 같은 기억에 이가 갈리고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능력만 된다면.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다만.
‘쓰으으읍, 후우……!’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는 바.
한세정은 거세게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는 식당 측면에 바짝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입구로 향했다.
“쓰X, 진짜 죽다 살았네. 차출됐으면 그냥 뒈졌을 텐데.”
“카아악… 퉷! 그러니까 말이야. 들어 보니까 뭐 수십 마리? 암튼 존X 많다더라.”
“미친… 그걸 어떻게 잡냐.”
‘둘.’
고양이 걸음처럼.
미세한 소음조차 경계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꺾어지는 길목에 들어설 무렵 그녀의 귓가로 두런두런 대화 중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고 주변을 훑었으나.
“죽을 때 죽더라도…….”
“죽긴 뭘 죽어, 개새야. 난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꼭 간부가…….”
‘확실해, 둘뿐이야.’
둘 이외에 다른 음성은 잡히지 않는다.
이에.
‘흐읍!’
타앗!
후우우우욱!!
살짝 호흡을 가다듬은 한세정은 순간적으로 코너를 돌며 입구로 달렸다.
“차라리 차출되기 전에 화장실에라도 숨어 있을까?”
“그러다 걸리면.”
“안 걸리게 잘 나와야지, 씨X.”
“개소리 좀 작작…….”
설마 이곳이 공격받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걸까?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창을 쥔 남자들은 한껏 자세를 낮춘 한세정이 옆구리를 치고 들어올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딱.
“…뭐냐!!”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랬다.
‘아……!’
예측과 다르게 입구를 지키고 선 남자는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단지 무척이나 과묵했던 탓에 감지되지 않았을 뿐.
물론.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
한세정은 자신의 오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달려 전방을 크게 그었다.
확신이 있었다.
설령 누가 추가된다 하더라도.
‘…다, 베어 내면 그만이야!’
뚫어 낼 수 있으리라고.
슈화아아악!!
서걱!!
“크아아아악!!”
그녀의 자신감은 현실로 이어졌다.
반원을 그리며 남자가 뻗어 내던 창과 함께 팔목마저 잘라 버리는 칼날.
‘다음!’
[단거리 공간 도약]
번쩍!
왈칵 피를 쏟아 내며 울부짖는 남자를 뒤로하고 공간을 넘는다.
한세정은 마력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력을 팔아 시간을 산다는 개념으로 과감하게 투자했다.
더군다나.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전투 아니던가. 다치고 죽은 뒤에 ‘괜히 아꼈다’라고 떠들어 봐야 때늦은 후회일 따름이었다.
“어, 어디…….”
‘둘.’
후우욱―
서걱!
“……!”
털썩!
그 일념으로 또 한 명의 적을 베어 냈다.
갑옷은커녕 두꺼운 옷가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한 이는 척추가 훤히 드러날 정도의 심한 상처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이는.
세 번째도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으, 으으, 으아아아!!”
우우우웅―
그나마 덜덜 떨면서도 창에 불그스름한 빛을 휘감아 공격해 오긴 했지만, 문지기는 문지기.
간산히 ‘고유 능력’을 개방한 수준으로는.
푸욱!
“아, 아아…….”
촤아아악!
털썩―
매일같이 괴물들 사이를 넘나들던 한세정을 막을 수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끄으으으…….”
후우욱―
서걱!
손목이 잘려 나간 팔을 부둥켜안고 울던 남자의 목까지 확실하게 베어 버리고서 비로소 식당 입구에 섰다.
이전 날.
강제로 끌려들어 가야 했던 그 문 앞에.
“…흐읍!”
사아악!
차앙!
파직―
후드득―
그 더러운 과거를 청산하듯 두 손으로 꽉 틀어쥔 칼을 내리치자 문을 꽁꽁 감싸고 있던 붉은 쇠사슬이 단번에 끊어진다.
겨우 이딴 속박에 묶여 있어야 했다니.
한세정은 더러운 것을 본 눈빛으로 양분된 쇠사슬을 응시하다 칼끝을 걸어 옆으로 치워 버리고는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끼이이이익―
후욱!
“읍!”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유리에 나무를 덧대 둔 문이 개방되자마자 훅 하고 쏟아져 나오는 악취.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는 이곳이 얼마나 끔찍하게 운영되는지를 고스란히 알려 주었다.
그래서.
“흐아아아!”
우득―
콰앙!
쾅!
한세정은 열린 문짝을 발로 밟고 밀어서 아예 뜯어내 버렸다.
다시는.
누구도 잡혀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
“……!”
“……!”
그 커다란 충격파가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으레 불곰파 조직원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듯, 오늘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가 싶어 겁에 질린 눈초리가.
“이령아아아아아!! 조이령!!”
한세정은 그 눈길을 받아넘기며 크게 소리쳤다.
제 몸을 희생해 자신을 구하던 친구에게. 약속대로 구하러 왔다고, 이제 이 지옥에서 벗어나자고.
“조이려어어엉!!”
자꾸만 먹먹해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름을 불렀다.
그 울먹이는 외침이 식당 전체를 울리자.
“세, 세정…이?”
깊숙한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있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다치거나 안 좋은 일로 만나지 못한다면 어쩌나 걱정하고 또 걱정했는데.
“세정, 세정아!”
살아 있었다.
처절할지언정 끝까지 버텨 내 주었다.
“…나가자아아아아아아!!”
그 고마움에.
한세정의 눈가에서 검은 세상을 비추는 달빛이 담긴 환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이별 】
어딘가에서 재회의 눈물이 흐르는 동안.
“끄아아아악!!”
“켁…….”
연이어 들리는 비명과 고함에 거구의 남자 곽재우의 눈엔 붉디붉은 피눈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언젠가 꼭 함께 탈출하자 다짐했던 이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바스러지고 있었으니까.
무려 서른에 달하던 인원이.
나름 무기까지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가는 낙엽처럼 덧없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입힌 피해라고는.
‘도와주러 왔다’라고 떠들어 대며 방심시켜 기습적으로 베어 낸 넷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씨X, 씨X, 씨바X!!”
그 압도적인 격차에 곽재우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살려면 살 수도 있었던 이들이, 자신이 굳이 도망가지 않고 불곰파를 들이받은 건 복수심의 발로였다.
부모, 자식, 친구, 연인 등 악마들에게 잃어버린 인연에 대한 피의 복수.
그런데.
“이건, 아니라고…….”
꽈아아아악―!!
아무리 주먹을 세게 쥐어 보고, 아무리 칼을 강하게 틀어쥐어 봐도.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어, 엄…….”
콰직!
“엄마는 지X. 후우… 네가 마지막이냐?”
“개 같은 새끼들. 야, 빨리 정리하고 와. 저쪽이 진짜니까.”
“예! 형님!”
사방이 절망으로 가득했다.
죽음을 앞두고 진심을 조롱당할 만큼.
빠득―
곽재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홀로 죽어 나자빠질 수는 없었다.
최소한.
저놈이라도.
“어휴, 아까운 놈들. 저걸 다 어디서 또 잡아 오냐.”
내 몸을 불태워 저 개새끼 한 마리만은 결단코 찢어 죽이고 가…….
후우우우욱!!
콰직!
“……!”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일어서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든 물체에 불곰파 조직원의 머리가 박살 난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뻘건 핏줄기와 허연 뇌수.
뭐지?
의아해하던 순간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나.”
그 남자였다.
그가 검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쿵―
“키에에에, 키에엑…….”
“이것부터 죽여.”
다 죽어 가는 괴물 한 마리를 집어 던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