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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41화 (41/232)

41화

투―

투두둑―

무너져 간다.

돌과 모래, 목재와 철근 등.

각종 자재로 건축되었던 제성 초등학교 정문이, 지옥의 입구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아니다.

표현이 잘못되었다.

휘이이이이잉―

40을 넘어선 마력의 4할가량을 한꺼번에 소모해 벌인 파괴는, 단단하고 높았던 방벽은 폭발이 일고 뒤늦게 불어온 칼바람에 휘날려 먼지처럼 흩어져 가고 있었다.

물론.

“…이제 시작이야.”

여기에 심취해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고작 문이 부서졌을 뿐.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인 만큼.

삑―

[‘고주파 신호기’가 작동되었습니다.]

[‘반대편 신호기’로 당신의 위치 정보가 전달됩니다.]

서둘러 신호기를 재작동해 한세정에게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갈 것을 알린 나는 즉시 뚫린 문을 넘어 불곰파의 본진으로 발을 내디뎠다.

목표는 정문을 통과해 진입했을 때 동쪽에 보이는 대형 강당.

악마들에게 납치돼 노예로 전락한 사람 중 대다수, 흔히 ‘노동자군’으로 분류된 이들이 감금된 숙소였다.

이곳을 목적지로 삼은 까닭은.

곧 들이닥칠 괴물들에 의해, 내가 벌인 일로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다치지 않도록 구해 주기 위해…라며 도의적인 책임을 지기 위함은 당연히 아니었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이상.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냉철하게 판단해서 저들이 여기 있으면 불곰파의 피해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남의 희생을 기본 명제로 삼는 불곰파 놈들이라면 민간인들을 방패로 써먹을 테니까.

생명은 물론 시체마저 철저히.

따라서 기껏 데려온 괴물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여기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다.

“다들 도망쳐!!”

“어, 어디로 도망치라고!”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그런 이유로 한달음에 달려온 강당은 완전히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연달아 발생한 사건으로 통제 인원조차 사라진 터라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할 말을 쏟아 내고 발버둥 치는데, 흡사 재난 영화를 보는 듯했다.

쉽사리 진정시키기가 어려워 보이는 현장.

하여.

말로 떠들기보단 주먹으로 소리쳤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웅―

쾅!

“……!!”

“…히익.”

“뭐, 뭐야.”

전과 달리.

최소 마력만 사용해 시전한 일격이었으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던 듯, 탕을 타고 퍼져 나간 충격파에 일시적으로 침묵이 감돌며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됐다.

“…지금부터 탈출합니다. 살고 싶다면 따라오십쇼.”

무겁게 가라앉은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목소리.

말을 마치고 곧장 돌아선 나는 더 이상의 충고나 조언 없이 그대로 동쪽 담장으로 달렸다.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키에에에에엑!!”

“그어어어어!!”

마침내 당도한 괴물들의 선두가 정문을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이쪽으로!”

딱 한마디.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겨우 따라오라는 말만 던지고서 내달리자, 대체 무슨 일인가 당황하던 이들이 엉겁결에 하나둘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뭔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괴물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

후우우욱!

콰직!

“끄아아아악!!”

“……?!”

뭐지?

사람들을 이끌고 집단 도주극을 벌이려던 그때,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후방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아한 일이었다.

괴물들과는 제법 거리가 있고, 주변에 불곰파 조직원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비명이 나올 원인이라고는 딱히…….

“지금부터 움직이는 새끼들은 다 죽여 버린다!”

“어딜 도망가!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아!”

기이한 장면에 돌아보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척 당황스럽게도.

민간인들 중 일부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단검 따위를 들고서, 자기 근처에 선 사람 몇을 죽이며 당장 멈추라 외치고 있던 탓이었다.

대체 왜?

‘…설마!’

의문이 증폭되던 찰나에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내가 왜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민간인들 사이에 놈들의 ‘끄나풀’이 있을 거라는 점을. 저들의 중요성을 아는 놈들이라면 반란이나 도주, 폭거를 대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심어 뒀으리란 건 충분히 고려했어야 하거늘.

“제기랄.”

멍청했던 나 스스로의 무지함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갑작스러운 변수에 멘탈이 흔들린 탓인지, 이렇다 할 확실한 대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때.

“이런 개새끼가!!”

“이, 이 미친놈…….”

“뒈져어어어엇!!”

쾅!

퍼억!

퍽!

별안간 튀어나온 거구의 남자가 끄나풀 하나를 몸으로 부딪쳐 쓰러뜨린 뒤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는 일이 발생했다.

난데없는 기습.

무기를 쥐고 있다 보니 공격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끄나풀은 제대로 된 반항은커녕 손발을 허우적거리다 끝내 정신을 잃었다.

“으아아아아!”

푸욱!

촤아아악!

거구의 남자는 칼을 빼앗아 들고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혼절한 끄나풀의 머리를 잘랐다.

솟구쳐 오르는 선혈.

그게 신호탄이 되었나.

“죽어!”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불쑥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서른여 명의 남자들이 제 동료의 죽음에 넋을 잃은 끄나풀을 덮쳤다.

날아드는 칼에 베이고 찔리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 어떻게든 끄나풀들의 심장을 짓이겼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복수를 꿈꿨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걸.

설령 달걀로 바위 치기일지언정, 언제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날뛸 각오가 된 이들이 기회를 찾고 있었음을.

* * *

타다다다닷―

쿠웅!

살짝 굽혔다가 펴는 무릎.

대지를 강하게 밀어내며 뛰어오른 내가 강당으로부터 약 50m가량 떨어져 있던 동쪽 성벽에 다다르자마자 엉겁결에 무기를 빼 드는 불곰파 조직원들.

“마, 막아!”

“숫자가 너무……!”

‘넷, 시작은… 가장 오른쪽.’

보통 일반인들이 주를 이루는 방벽 위와 달리 아래쪽은 전부 조직원들뿐이었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실력이 제일 좋은 놈부터 노리고 쇄도했다.

“흐아아아아!!”

‘우측 베기, 피할 수… 있다!’

후우우욱―

탁!

“어? 어어…….”

촤악!

부릅뜬 눈동자로 훤히 읽어 내려가는 공격.

대각선을 그리며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내리긋는 베기에 발뒤꿈치를 땅에 박아 순간적으로 급정거해 자그마한 틈을 만들어 피해 냈다.

그러고는.

애꿎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 칼날이 채 회수되기도 전에 다시 돌격해 가슴팍에 왼손을 쑤셔 넣었다.

콰드드득―!

“아, 아아…….”

방어구 대용으로 두툼하게 겹쳐 입었던 옷가지에 새겨지는 다섯 줄기의 선명한 상흔.

‘하나.’

푸확!

쾅!

깊숙이 틀어박혔던 손톱을 빼냄과 동시에 오른팔로 옆구리를 후려쳐 한 놈의 시야를 가린 뒤.

[플뤼의 탄성 일격]

투우웅!!

콰드드드득!!

“켁!”

“커헉…….”

단번에 두 놈을 더 처리했고, 기세를 몰아 나머지도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그게.

교전이 일어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이뤄진 결과였다.

[오르그의 파괴 본능]

우우우웅!!

콰앙!

이후.

멈추지 않고 더 직진해 동쪽 성벽에 구멍을 뚫어 내자.

“빨리 나가!”

“빨리빨리들 나가시오!”

뒤를 바짝 쫓아오던 거구의 남자를 비롯한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내 수고를 덜어 주려는지 알아서 사람들을 인솔해 밖으로 빠져나간다.

다만.

탈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나, 난 못 가!”

“서윤이! 서윤이가 아직 잡혀 있어! 내가 가면…….”

한세정의 친구인 조이령처럼.

노동이 아닌 다른 행위로 착취당하고 있는 여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등이었다. 그들은 한쪽으로 물러나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는 단순했다.

구해 달라.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격임을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인 이들의 눈빛이었다.

이에.

미리 상정한 시나리오의 대사를 떠올리며, 그쪽에는 동료가 갔으니 운이 따른다면 구해 낼 거라 대답하고 지나치려 하는데.

“씨이X! 구하고 싶으면 직접 구해!!”

누군가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괴성을 질렀다.

또 그였다.

거구의 남자.

“우릴 구해 줬는데 그쪽을 안 가시겠어?!! 그러니까 병신같이 부탁만 하지 말고 가서 불을 지르든 뭐라도 하라고 이 새끼들아!!”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한차례 쏘아붙인 그는, 이내 방금 전 끄나풀들과 격렬하게 싸웠던 남자들을 데리고 칼 한 자루 딸랑 쥐고서 동쪽 성벽을 따라 불곰파가 사용하는 학교 본관으로 달렸다.

마치.

자신이 부나방 역할을 맡아 희생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볼 테니, 부디 이 발악을 발판 삼아 한 번만 더 도와 달라 절규하듯.

“…….”

또 하나의 변수였다.

내가 짜 둔 설계에는 이런 이타적인 무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물론.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기는 했다. 솔직히 민간인들을 구출하는 이유 중에는 집단 도주극으로 하여금 불곰파의 집중력을 뒤흔들려는 목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되레 안쪽에서 같이 날뛰어 준다는 걸 반기지 않을 리가 있나.

단지.

“…젠장.”

뭔가가 조금 걸렸다. 그게 무엇인지 딱 꼬집어 정의하진 못하겠지만, 가슴 한 부분이 턱 막혔다.

아무래도.

빡빡하게 세웠던 계획에 약간의 구멍이 생길 것 같았다. 불곰파를 상대로 이러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저들과 나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삑―

* *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새끼들아!!”

목구멍을 타고 내뱉어진 고함에 불곰파 조직원들이 비상에 걸렸다.

안 그래도 난데없는 수색조 학살 사건으로 한껏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마당에, 갑자기 정문이 폭파당하질 않나.

“크에에에에에에!!”

“키에에에엑!!”

“그어어어어어!”

이제는 괴물들의 습격?

“후우우……. 막아, 막으라고!!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예, 옛!”

“옛! 형님!”

결국 한계에 다다른 이덕구의 노호에 간부든 말단이든 허둥지둥 무기를 챙겨 운동장으로 뛰쳐나간다.

이석열은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 재빨리 이덕구에게 다가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한번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면 설사 아군이라 한들 화가 풀릴 때까지 막무가내로 찢어 죽이는 성격이라 어떻게든 선을 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 달래자.

“창기와 애들이 나갔으니 금방 정리될 겁니다. 우선 진정 좀 하시죠. 형님.”

그래도 혈육인 덕분일까?

“개 같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알아낼 겁니다. 하하. 하…….”

여전히 살기를 풀풀 피워 대고는 있지만서도 차차 감정을 다스리는 이덕구.

그렇게.

가까스로 이덕구의 정신을 부여잡고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던 찰나였다.

“…덕, 덕구 형님!!”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직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고.

“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쾅!!

어렵사리 이성의 끈을 쥐고 있던 이덕구가 기어이 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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