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 *
“지금부터 앉았다 일어서기 서른 번 시작!”
“하나!”
“둘!”
“셋!”
어둠이 짙게 깔린 늦은 저녁.
도심 한복판 어느 폐건물 안에서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황수현은 고작 속옷만 걸친 채로 옆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작했다.
몰아치는 추위에 몸이 덜덜 떨리다 못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으득―
혀를 깨물어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며 무릎을 굽히고 또 폈다.
버텨야 한다.
“푸흐흐흐……. 아, 존X 웃기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싶은 청년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참아 내야만 했다.
실수는 곧.
“아앗.”
“어허! 3번! 앞으로!”
“앞, 앞으로!”
“왜 혼자 틀리고 그래. 다들 힘들게.”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에이, 이미 했는데 뭘.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엎드려.”
후우욱―
빠악!
“끄으으읍!!”
“쉿. 그러다 괴물들 몰릴라.”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테니까.
당연히.
‘개 같은 새끼……!’
속에서 천불이 났고,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저 청년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다.
허나.
그건 상상이자 망상일 뿐.
황수현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종찬, 저 악마는 이마에 ‘火’자가 새겨진 불곰파의 조직원이었고… 자신들은 매일매일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낱 노예에 불과했으니까.
반항이든 저항이든.
뭐라도 하는 순간 목이 날아갈 테니 비루한 목숨이라도 연명하려면 그저 어떻게든 숙여야 했다.
빠악!
“끄으으으읍!!”
“끝! 어휴, 잘 버티네. 잘했어. 이번이 처음이니까 여기까지만 할게. 다음엔 실수하지 말자고. 동료가 얼마나 힘들겠어. 그치?”
“으으… 으읍, 흐…….”
“대답.”
“끄으읍, 알겠, 알겠습니다…….”
“그래. 자, 그럼 이제 슬슬 수색 나가 볼까?”
“옛!”
그러는 사이.
대략 5분간 이어진 구타를 끝내고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이종찬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황수현을 비롯한 이들이 황급히 옷을 입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를 일으켜 세웠다.
통증이 상당한 듯.
“으으… 으…….”
몸져누운 이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또다시 두들겨 맞을 테니 억지로 옷을 입히고 허리와 다리를 받쳐 쓰러지지 않게끔 지지했다.
그 선택이 옳았을까.
“준비 끝났으면 출발해.”
다행히 이종찬은 더 이상의 주먹질 없이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물론.
안심은 금물이었다.
권력과 폭력에 물든 불곰파 내에서도 유독 노예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탓에 저러다 언제 또 돌변할지 몰랐기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드디어 본격적으로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황수현과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식량 및 생존 물품 전량 수거’로.
식량부터 의복이나 침구류에 하다못해 나사나 못까지, 종류와 관계없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물건을 찾는 것이었다.
다만.
“상등품, 상등품…….”
되도록이면 부피나 수량보단 활용성이 좋은 물건을 최고로 쳐 주는 터라 벌써 10여 번을 넘게 수색을 다닌 황수현은 최대한 상등품 위주로 찾아다녔다.
수색지가 바뀐 덕분인가.
“부탄가스!”
황수현은 고작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원하던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겨울나기에 필수품 부탄가스였다.
무려.
아직 포장지조차 뜯지 않은 스무 개짜리 세트. 이만하면 설사 이종찬이라 하더라도 괜한 트집 없이 넘어가 주리라는 생각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수확물을 가방에 담은 그는 다시금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부탄가스만으로도 할당량은 충분했지만, 보여 주기 위한 숫자도 중요했거니와 무엇보다 혹여라도 성과가 부족한 이가 나오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래야.
이후에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테니까.
바스락!
“……!”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인근을 뒤지던 찰나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에 황수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자그마한 잡음일 뿐이나.
그간의 경험상, 만일 소음의 정체가 괴물이라면 자칫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음을 매우 매우 잘 알았으니까.
꿀꺽―
“…….”
절로 삼켜지는 침.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어떻게 하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에 얼어붙은 황수현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질문과 답변을 늘어놓으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정체가 뭐든 간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일단은 밖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달아나지 못했다.
툭―
“…흐읍!”
한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목 위로 달라붙은 칼날 때문이었다.
살짝만 힘을 줘도 머리가 잘려 나갈 것만 같은 살벌한 예기(銳氣)에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박동한다.
이제.
죽는 걸까?
황수현의 머릿속에 오직 한 단어만이 차오르던 그때.
‘살고 싶…….’
“소리만 지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해 주실 수 있다면 오른손으로 입만 가려 주세요.”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던 황수현은 느닷없는 목소리에 놀라면서도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은.
어투나 어조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으니까.
스윽―
“좋아요.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이쪽을 봐 주세요.”
오로지 살고 싶다는 의지로 요구에 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에서 사라지는 칼날의 촉감.
그러나.
위기임은 여전했기에 경거망동하지 않고 재차 지시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황수현은 이내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벌써 몇 번이고 더 뒤졌던 공간에서 무려 두 사람이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목에 닿았던 칼을 쥔 여자와 커다란 장포로 뒤덮여 얼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남자가.
터업!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에 다급히 놀고 있던 왼손마저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고마워요. 몇 가지만 물어볼 테니 대답만 해 주시면 보내드릴게요.”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침묵을 유지하자.
잘했다는 듯 미소 지은 여자가 바깥을 슬쩍 가리키며 질문을 던진다.
“불곰파, 노예 말고 조직원으로… 몇이나 되나요?”
【 복수의 시작 】
“끄아아아아아악!!”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야심한 시각.
조용하던 거리에 느닷없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어디야!”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사람들.
개중에는.
“아, 쓰X, 어떤 새끼야!”
오늘의 수색 7대 팀장 이종찬도 있었다.
노예들에게 수색을 시킨 뒤.
적당한 장소를 마련해 부하들과 한창 재미나게 포커를 치던 그는 난데없이 일어난 소동에 판이 깨져 상당히 짜증 난 상태였다.
만약.
별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흥을 깬 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 다짐할 정도로 분노를 토해 낸 그는 사람들이 재빨리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으, 으으으… 으아아아!”
그곳엔 한 노예가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는 팔뚝을 부여잡고서 아스팔트 도로에 널브러진 채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색지 내에 괴물이 숨어 있는 듯했다.
“머저리 같은 새끼.”
이에.
이종찬은 자신의 시간을 방해한 괴물과 그런 괴물 하나 처리하지 못해 울고불고 난리 치는 노예를 싸잡아 욕하며 성큼성큼 문제가 생긴 현장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같이 죽여 버리기 전에 꺼져.”
그 강렬한 기세에 짓눌려 다급히 물러나는 사람들.
이윽고.
“으으으으…….”
소동을 일으킨 노예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라 불곰파 조직원이 되는 기념으로 하사받은 ‘괴물 사냥용 철검’을 뽑아 든 이종찬이 다친 노예가 도망쳐 나온 건물로 발을 뻗었다.
내부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노예가 한 방에 죽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는 건, 그만큼 수준이 떨어지는 괴물일 테니 충분히 사냥 가능하다는 계산도 나온 터라 이참에 노예들이나 부하들에게 제 존재감이나 확실하게 각인시킬 겸.
“어디냐, 개 같은 새끼야.”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것이.
콰직!
이종찬이 이 생에 보여 준 마지막 호기였고.
“혀, 형님!”
“형님!”
이 밤의 살육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 * *
“일곱 명. 다 잡았어요.”
“놓친 게 없다면 바로 가죠.”
“네.”
폭풍이 몰아친 듯.
한순간에 들이닥쳐 이종찬을 포함한 불곰파 수색 7팀을 전원 살해하고는 짧게 대화를 나누고서 아무 일도 없던 양 떠나가려 하는 두 남녀.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황수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리를 질렀다.
“…저, 저기!”
도와주고 싶었다.
과연.
노예 나부랭이가 뭘 도와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토록 처죽이고 팠던 불곰파를 대신해서 죽여 준 이들이었다.
그러니.
사소한 거라도, 정말 조그마한 거라도 은혜를 갚아야 했다.
뭐라도…….
“아! 수, 수색 1팀은 세 시 방향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생각나는 게 있었다.
“2팀은 다섯 시, 3팀은 열두 시, 4팀은…….”
불곰파를 적대시하는 저들에게 확실히 도움될 만한 카드가.
“…….”
“그게 정말인가요?”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멀어져만 가던 두 남녀가 우뚝 멈춰 서서 이쪽을 돌아본다.
됐다.
“제, 제가 들었습니다! 수색지는 차례대로 배정받는 터라 6팀까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닫자 한껏 기분이 좋아진 황수현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수색 팀으로.
“또… 또… 아! 오늘은 포획조도 출발한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기억나는 것, 주워들은 모든 걸 털어놓았다.
이는 황수현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도 들었는데…….”
“그 이번에…….”
그의 행동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던 나머지도 상황을 파악하곤 하나둘씩 합류해 앞다투어 정보를 쏟아 냈다.
수색대, 포획조, 경계 근무 사항 등등.
다 같은 마음이었다.
본인들이 가진 정보로 악마들의 소굴이었던 불곰파가 역으로 짓밟히기를 소망하고 기원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간절함으로 장장 30여 분간 계속된 대화.
마침내 주제가 다 떨어져 더 알려 주고 싶어도 아는 정보가 없는 지경에 놓일 즈음, 두 남녀가 허리를 숙였다.
받은 은혜에 보답한 것뿐인데 감사라니.
“아니, 아닙니다!”
당황한 황수현은 손을 절레절레 휘저으며 막아 보았으나, 두 남녀는 끝끝내 진심을 다해 인사를 건네고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마치.
꿈을 꾸다 깨어난 것처럼.
아마도 바닥을 나뒹구는 일곱 구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영영 현실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황수현과 사람들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성풍 아파트 단지…….”
두 남녀가 남기고 간 한마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