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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기억법-36화 (36/232)

36화

후우우우욱―

탁!

“세정 씨!”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발을 굴러 하늘을 날아 102동에 도착한 나는 곧장 한세정을 불러 1~2분 정도 시간을 끌어 달라 부탁했다.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지.

“네, 네? 시간이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잘하리라 믿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적당한 집 한 곳을 골라 들어가 ‘기억 포식’을 발동시켰다.

[남은 시간 : 309초]

[남은 시간 : 308초]

[남은 시간 : 307초]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

슈화아아아악―!

그에 맞춰 시곗바늘이 멈추며 금세 뒤바뀌는 세상.

시뻘건 하늘 아래 황무지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기다리니, 얼마 지니지 않아 투르바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쿠웅―

“키에에에에엑!!”

제 딴에는 무시무시하고 위압감 넘치는 존재감을 선보이고 싶은 듯, 등장 직후 목청이 찢어져라 포효하는 놈.

헌데.

며칠 사이에 엄청난 숫자를 사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리 생활을 하는 현실과 달리 이곳에선 혼자라서 그런지.

어째 우렁차게 울부짖고 있음에도 괴물 특유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속전속결.”

탓―

탓―

타악!

구태여 늑장 부릴 필요는 없는지라.

보폭을 크게 늘린 걸음으로 단숨에 놈에게 접근한 뒤 하울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의 가슴팍에 왼팔을 박아 넣었다.

콰직!

“키엑, 켁…….”

뼈를 부수고 심장을 가르는 손톱에 반항은커녕 제대로 된 동작 한 번 펼쳐 보지 못하고 투르바의 육체가 무너져 내린다.

전부터 그러했지만.

소환되는 상대와 내 능력의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 터라 확실히 ‘포식의 땅’에서의 전투는 쉬워도 너무 쉬웠다. 종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이런 기세라면 앞으로는 10초 이상 가는 경우도 없을 듯했다.

‘성장의 땅’에서처럼 수백 단위의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모를까.

“아니, 중위 등급이 되면서 고유 능력에도 변화가 있었으니 이쪽도 뭔가 달라지려나?”

흐음.

왠지 그럴 것 같다.

본래 뭐든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법이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겁을 먹거나 두려워할 마음은 1도 없었다. 기왕이면 쉽고 안전하게 강해지고 싶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축하합니다!]

[이식된 「투르바의 뿔」에 남아 있던 기억 속에서 ‘특별한 기술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추출 완료!]

[「종족 전용 기술 : 투르바의 포효」를 습득합니다.]

[마력이 3 상승합니다.]

[‘고유 능력 : 프레데터의 기억 포식’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기억 포식’을 성공하셨습니다.]

[육체가 온전한 진화를 이룩해 냅니다.]

이런저런 상념을 이어 가는 사이 머릿속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지식이 떠오름과 동시에 현실에서 눈이 떠졌다.

“투르바의 포효.”

《기술 : 투르바의 포효》

- 행성 ‘클라마티오(Clamatio)’의 지배종 「투르바」만이 개화 가능한 기술입니다. 성대에 마력을 모아 포효하는 것으로 최대 500m 범위 내내 존재하는 ‘미리 지정된 10인(명) 이하의 아군’에게 지원 요청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아군 지정’은 서로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포효를 듣고 대상의 30m 안쪽으로 찾아온 아군은 5분간 모든 신체 능력이 7% 상승합니다.

곧바로 얻은 새 기술의 효능은 크게 좋지도,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은 그럭저럭 한 수준이었다.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달까.

최대 10인에게 광역 버프를 준다는 것 자체는 괜찮아 보이지만, 다 차치하고서라도 반드시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부분이 무척이나 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사용했다가는 자칫 주변의 괴물들을 죄다 끌어들여 더 위험해질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 기술에 대해서는 사용처를 제한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전투가 시작된 전장에서나 써야겠네.”

구원 요청보다는 오로지 버프만 활용하는 속도전 양식으로.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탓에 딱 그 정도가 적당할 듯 보였다.

휘익―

그리 다짐하며 대강 손을 휘저어 설명 창을 없앤 나는 청소되지 않은 방바닥에 누운 대가로 한가득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다시금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세정의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할 차례였다.

* * *

“최대한 조심히.”

후우우욱―

퍼억!

“키에에에에엑!!”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내뻗은 주먹에 기세 좋게 달려들던 투르바 한 마리가 복부를 처맞고 나가떨어진다.

아직 신체가 진화되는 과정에서 적잖게 향상된 육체 능력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듯.

살살 친다고 쳤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조금 과하게 들어간 탓에 녀석이 바닥을 구르다 말고 시뻘건 핏물을 토해 낸다.

그래도.

“흐읍!”

서걱!

툭―

“스물여섯!”

다행히 일격에 죽지는 않아 재빨리 다가가 목을 쳐 낸 한세정이 기분 좋게 카운팅한 숫자를 외친다.

목표치까지 단 네 마리 남았다고.

그렇게.

“스물일곱!”

서걱!

“스물여덟!”

콰직!

“스물아홉!”

콰드드드득―!

같은 방식으로 네 마리를 더 잡아 죽여 마침내 마지막 숫자마저 채워진 순간.

푸우우우욱!

“서른! 됐어요!”

힘없이 늘어져 있던 투르바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한세정이 활짝 웃으며 날 돌아봤다.

이에.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제한해 두었던 힘을 100% 발휘하며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최후까지 생존해 있던 나머지 다섯 마리를 처리하고서 바로 추출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무려 마흔일곱 개나 되는 근원석을 거머쥘 수 있었다.

여기에 불곰파 김성태의 공습으로 미처 복용하지 못한 티그리스의 근원석과 뿔을 구하기 위해 사냥한 투르바 두 마리까지 합하면 50개를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양에 나나 한세정이나 둘 다 입을 떡 벌렸다.

지금껏 이만한 성과는 거둔 적이 없었기 때문.

하여.

“…분배는 집에 가서 하죠.”

“…네.”

저걸 다 집어삼킨다면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 당장에라도 복용하고픈 욕망이 차올랐지만, 분배를 하려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근원석들을 한데 뭉쳐야 했기에 일단은 근처에서 구해 온 이불로 전부 모아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참.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마침 여유도 생겼겠다.

가는 길에 미뤄 두었던 내 얘기를 들려주었다.

“와……. 혼자서 그럼 200마리를 넘게 사냥하신 거예요? 그것도 2등급 투르바가 끼어 있는?”

이에 대한 한세정의 반응은 꽤나 뜨거웠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느껴지는 모양.

특히.

“네? 특수 퀘스트를 네 개나 하셨다고요?”

다수의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구간에서는 더더욱 감탄하더니.

곧이어.

“축하드려요. 정말로…….”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에 그녀는 단 일 푼의 거짓도 없이 100% 솔직한 감정으로 진심을 다해 나의 성장을 기뻐했다.

사람인 이상, 하다못해 그녀 또한 능력자인 만큼 자신도 모르게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법도 하건만, 내게 축하를 건네는 한세정의 눈동자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우리의 특수한 관계가 참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간혹.

동료나 친구 사이에서, 아니,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일지라도 부러움과 질투로 끔찍한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으니까.

철컥―

“다른 근원석 다 가져올게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도착한 집.

거실에 보따리를 내려놓는 동안 한세정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근원석들을 하나둘 가져왔다.

“이번엔 3대 1 비율로 해요. 저는 딱 4분의 1만 가져갈게요.”

그러곤 총 54개나 되는 근원석 중 열세 개만 따로 챙기더니 여전히 수북하게 쌓여 있던 나머지를 모조리 내게 밀었다.

그 행동이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 도움이 컸음은 인정하나 엄연히 함께 수확한 보상이니만큼 평소처럼 2대 1 비율로 배분하려 하던 차였으니까.

허나.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에 그 어떤 질문은 물론 거절 의사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확고한 눈빛으로 제 몫을 챙겨 물러나 어서 가져가라는 제스처만 취하는 한세정.

“…감사합니다.”

결국.

졸지에 40개가량의 근원석을 떠안게 된 나는 그녀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판단하고 내린 선택일 테지만, 어찌 됐든 덕분에 복수에 한결 더 가까워졌으니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뒤.

‘반만 복용하자.’

잠깐 고민하다 도합 41개나 되는 근원석을 절반으로 나눠 씹어 먹기 시작했다.

[‘1등급 근원석’을 복용했습니다.]

[순발력이 2 상승합니다.]

[‘1등급 근원석’을 복용했습니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1등급 근원석’을 복용했습니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전부 다 복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균형의 추’와 ‘고주파 신호기’에 김성태가 죽으며 주인이 사라진 창까지 더해서 ‘차원 상점’에서도 웬만한 건 다 구매 가능할 터.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향후 ‘차원 상점’을 찾게 될 때를 대비해 일정량을 비축해 두었다가 상체나 머리를 가릴 방어구 혹은 김성원이 갖고 있던 반지 같은 아이템을 사고 싶었다.

무기야 양팔과 다리면 충분했으니까.

우득―

우드득―

“으음.”

한꺼번에 스무 개의 근원석을 흡수하자 단기간에 폭증한 근력과 순발력에 맞게 새로이 변화하는 신체.

전신에 감도는 고양감에 한바탕 몸을 풀어 주며 시선을 돌리니.

“후우우우…….”

비슷하게 소화를 마친 한세정이 성장의 열기가 고스란히 담긴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바닥에 내려놓은 칼을 쥐었다가 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 듯했다.

가서.

뭐든 베어 넘기며 ‘특수 퀘스트’에 이어 열 개가 넘는 근원석을 일시에 복용하고 급성장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갈까요?”

나는 그녀에게 제안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어차피 적응 훈련도 해야 하니 나가서 시원하게 한바탕 난리 치고 오자고.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피 냄새 좀 뿌려 주고 거기다가 하는 김에 ‘아군 지정’도 해 둘 겸 ‘투르바의 포효’를 몇 번 얹어 주면 훈련용으로 사냥할 괴물들쯤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좋아요.”

한세정은 제안을 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칼을 챙기며 앞장서서 성큼성큼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슬슬 시간이 됐나.’

한세정에게 약속했던 때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날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준비.

누군가에게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누군가에게는 하나뿐인 가족의 복수를 위한 칼날이 더없이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사나흘.’

아마도.

그 칼날이 휘둘러지기까지는 짧으면 사흘, 길어도 나흘을 넘기지 않으리라. 본능은 그리 얘기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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