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키메라의 기억법-32화 (32/232)

32화

* * *

“괜찮으신 거겠지……?”

한세정은 급작스럽게 혼절해 버린 아윤을 곱게 눕혀 주며 불안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쩔 수 없었다.

복부에는 여전히 창이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심장을 먹은 뒤로 계속해서 새어 나오던 피가 멎고 상처 자체도 이전보다 훨씬 괜찮아지긴 했지만,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임은 분명했기에 도저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만일.

이러다가 아윤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냐, 아닐 거야. 잘해 내실 거야.”

점점 극단적으로 이어지는 상상에 한세정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념을 털어 내고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뒤처리나 할 생각이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아윤에게 건네줄 심장과 뿔 달린 괴물의 시체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복도에 피가 잔뜩 흩뿌려진 상태.

중간마다 공간 이동을 겸하며 움직인 덕분에 선이 완전히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기에 얼른 지워야…….

쿵―

“……?!”

TV나 영화에서 봤던 대로 피를 최대한 깨끗하게 지우기 위해 락스를 챙겨 나가려던 한세정은 신경을 자극하는 진동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뭘까.

반사적인 긴장감에 전신의 근육이 바짝 땅겨 오는 걸 느끼며 어느새 애병이 되어 버린 ‘괴물 사냥용 철검’을 손에 꽉 쥐고 현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쿵―

쿵―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되는 진동이 건물을 연결 고리 삼아 귀로 전해진다.

이에.

“…….”

한세정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경황 중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흔적들로 인해 꼬리가 밟혔다는 걸.

더불어.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엑!!”

“…나가야 해.”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진 괴물들의 포효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이 집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당면한 사태가 최악의 비극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아윤이 깨어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괴물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고작 아파트 철문 따위로는 괴물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할 테니까.

단지.

“마력이… 절반 아래.”

문제라면 아윤을 구하고자 실행했던 도주극에 심장 적출과 괴물 사냥까지 연거푸 행해 놓고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제일 중요한 마력이 많지 않다는 점.

끽해 봐야 공간 이동 두어 번이면 바닥을 보이는 터라 걱정이 됐지만.

어차피 농성도 불가능한 데다가 그렇다고 아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바.

서걱―

한세정은 미끼로 쓸 수 있게끔 괴물 사체에서 살점 일부를 잘라 챙기고는 락스 통을 들고서 과감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흡!”

쿵!

쿵!

쿵!

복도에 서자마저 확 하고 올라오는 혈 향과 함께 더욱 거세진 진동이 신발을 타고 전해진다.

대략 한두 층 정도 차이.

촤아아아악―

그리 멀지 않은 거리감에 서둘러 락스를 여기저기 뿌리며 문 앞에 가득하던 피 냄새부터 지웠다.

깨끗이 닦아 내는 게 아니라 그저 뿌리는 정도였기에 큰 효과는 없을 테지만, 자그마한 혼란이라도 줄 수 있다면 된다는 생각으로 단숨에 대용량 락스 한 통을 모두 쏟아부은 뒤 일부러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동족의 복수를 바라는 괴물들과 재회할 때까지.

쿵!

쿵!

쿵!

“키에에에엑!!”

“키에엑!!”

목표는 금세 이루어졌다.

이미 지척에 다다랐던 만큼 채 10여 초도 지나지 않아 괴물들이 반대편 복도 입구에 들어선 것.

개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올라온 놈들은 한세정을 발견하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른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는 모양새였다.

혹은.

철푸덕―

“키에엑! 키에에에에엑!!”

방금 잘라 왔던 살점을 고의로 떨어뜨려 준 데에서 완전히 눈이 돌아간 건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확실하게 도발이 먹혀들었음을 인지한 한세정은 옅은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부디.

아윤이 어서 빨리 깨어나 주길 바라며.

“흐으읍!!”

타닷―

* * *

꼬르르륵―

“후……. 간신히 쉴 만한 곳을 마련했더니, 이젠 다른 게 문제네.”

지상으로부터 약 15m가량 떨어진 나무 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나오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 결국 적당한 거목 위로 올라가 윗 단의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잘라 아래 단을 메꾸는 식으로 나름대로 보수 공사까지 진행하며 임시방편으로나마 직접 휴식처를 만든 나는 두 다리 뻗고 앉기 무겁게 느껴지는 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성장의 땅’.

이 괴랄한 심상 세계는 거대해진 전쟁 스케일만큼이나 다른 쪽으로도 신경 써야 할 게 너무나도 많았다.

갈증과 허기는 물론 심지어 배변 욕구까지, 모든 부분에서 현실과 똑 닮은 세상이었다.

“먹을 게 있으려나.”

점차 심해지는 허기에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사방엔 오로지 갈색과 녹빛만 가득할 뿐, 과거를 되짚어 봐도 과일은커녕 그 흔한 버섯조차 본 기억이 없다.

“…여기서도 식량 탐사를 나가야 하나.”

최근 들어 현실에서도 안 하는 식량 탐사를 심상 세계에서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황당해진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갈증과 허기, 수면의 해결은 생명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사안. 더욱이 투쟁과 같은 고에너지 소모 활동을 지속하려면 다소 힘들더라도 수색을…….

“…아니, 방법이 아예 없진 않네.”

점점 추가 기울어지던 순간.

문득.

한 가지 방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씹어 삼켰던 ‘괴물의 심장’을 근간으로 삼아, 마치 짐승을 사냥해 잡아먹듯 이 땅에 존재하는 괴물들을 식용으로 삼으면 어떨지.

효율을 따져 보니 썩 괜찮아 보였다.

본인들이 알아서 다가와 주는 데다가 ‘프레데터’답게 핏물과 장기를 섭취해도 부작용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로운 버프가 생겼으니까.

“여전히 역겹긴 하지만.”

벌써 세 차례나 복용하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고, 생존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감정 따위야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었다.

* * *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는 밤.

“츠에에에엑!!”

“드디어 찾았네.”

저녁노을마저 자취를 감출 무렵 나는 ‘특수 퀘스트 : 오만한 속도’의 마지막 퍼즐 조각과 마주하게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만남이었다.

오르그나 티그리스 등 괴물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 탓에 시일이 좀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플뤼 외에는 나타나질 않았다.

아마.

일정한 영역이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수백 마리나 되는 괴물들이 밤이 되도록 날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

“뭐가 됐든…….”

“츠에에에엑!”

슈화아아악―

촤악!!

[공격 횟수 : 1회]

“나야 잘됐지.”

달리던 자세 그대로 몸만 살짝 틀어 대각선 베기를 피한 후 왼손을 뻗어 플뤼의 팔을 붙잡았다.

콰드득―

가죽을 찢고 살점을 강하게 틀어쥐는 손톱.

“츠에에엑!”

비명을 내지르며 벗어나려는 놈을 역으로 끌어당기며 주먹을 뻗었다.

[오르그의 전투 본능]

우우우웅―

콰앙!

속도전이라 단 한 번에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내지른 일격에 직격당한 플뤼의 몸통이 세포 단위로 소멸한다.

그에 맞춰 등장하는 문장들.

[축하합니다!]

[〈특수 퀘스트 : 오만한 속도〉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으로 ‘칭호 : 선수 필승’을 습득합니다.]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이 3씩 상승합니다.]

《칭호 : 선수 필승》

- 특별한 업적을 달성한 대상에게 부여되는 칭호. 향후 선제공격 시 위력이 5% 상승한다. 또한, 「플뤼」를 상대로 전투가 일어날 경우 모든 신체 능력이 5% 상승한다.

무척이나 화려한 내용을 증명하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에 자연스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아.”

따로 보면 별거 아닌 듯하나 뭉치고 뭉쳐 도합 15가 된 능력치 상승은 내게 적잖은 고양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빨리 끝내야겠어.”

후욱―

훅―

이리저리 움직이며 변화한 몸에 적응한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그, 티그리스, 투르바.

그 세 종(種)의 ‘특수 퀘스트’도 완료하기 위하여.

물론.

“고유 영역이 존재한다면, 숫자도 정해져 있겠지?”

가기 전에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는 살아 있을 명목이 없으니, 후방도 안정화할 겸 생각이 맞는지 확인도 해 볼 겸 일단 플뤼부터 완전히 박멸할 작정이었다.

츠에에엑!!

“거기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핏물이 뚝뚝 흐르는 살점을 쥐고 다니니 피 냄새를 맡은 놈들이 알아서들 제 위치를 알려 주었으니까.

“츠에에에엑!!”

[플뤼의 탄성 일격]

탓―

촤아아아아악!!

콰직!

* * *

‘성장의 땅’ 2일 차.

“캬우우우우우!”

“캬우우우!”

새롭게 떠오른 태양이 중천에 다다를 무렵.

플뤼에 이어 투르바까지 모조리 멸절하고서 다음 상대를 물색하던 나는 마침내 다음 상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호랑이와 인간이 뒤섞인 듯한 형체.

“여긴 티그리스 영역인가 보네.”

웨어 타이거라고 칭했던 티그리스들이었다.

놈들은 내가 상당히 반가운지.

“캬우우우!!”

“캬우우우!”

투두두두두두―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마구 달려들어 왔다.

숫자는 스물가량.

결코 적지 않은 무리가 한꺼번에 돌진하자 쿵쾅거리는 소리로 울창한 수림이 뒤흔들렸다.

이에.

우우우웅―

콰앙!

[티그리스의 대지 비틀기]

쿠구구구궁―!!

“캬우우?!”

“캬우우우우?!!”

묵직한 발길질로 전장을 뒤틀자, 지근거리까지 다다랐던 티그리스들이 요동치는 대지에 휩쓸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공간.

나는.

“이렇게 해서도 가능할지 모르겠네.”

그 중심에선 여유롭게 중얼거리고는 근처에 있던 티그리스의 머리를 노렸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두개골을 함몰시키고자.

이것이.

“캬우우―”

후우우욱―

콰직!

“됐나?”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티그리스」를 일격에 사냥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특수 퀘스트〉의 ‘트리거’가 발동되었습니다.]

“이게 되네.”

티그리스의 ‘특수 퀘스트’를 부여받는 조건이었으니까.

《특수 퀘스트 : 괴물의 균형 감각》

- 행성 ‘바이오스(Bioous)’의 지배종 「티그리스」는 항거불능의 강대한 적을 마주했을 때 대지를 뒤흔들어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려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렇기에 만일 그 뒤틀린 공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당신의 균형 감각 역시 괴물의 그것만큼 엄청난 성장을 이룩할 것입니다.

(0/9)

┗특수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대지 비틀기’의 지속 시간이 머리 위로 표시됩니다.

┗남은 시간 : 2일 23시간 59분 59초

참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본래는 티그리스들이 기술을 발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수에 처죽였어야 발동되는 ‘특수 퀘스트’를 지금처럼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형식으로도 얻게 되다니.

‘프레데터’의 능력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했다.

“아홉 마리, 빠르게 처리해 보자.”

0